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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역사 기본 9. 백년전쟁(1337~1453) 속의 잉글랜드
전쟁의 재개와 영국의 위기(1369-1396)
샤를 5세의 개혁과 전쟁 재개
브레티니 조약은 지속되지 않았다. 1364년 장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샤를 5세(1364-1380)로 즉위하면서 프랑스는 회복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샤를 5세는 '현명한 왕(le Sage)'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군사, 재정, 행정 등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정규군 유지를 위한 안정적인 세금 제도를 확립하고, 베르트# 영국 역사 기본 9. 백년전쟁(1337~1453) 속의 잉글랜드
백년전쟁의 배경과 원인
영토 분쟁과 봉건적 관계
백년전쟁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프랑스 내 영국 왕이 소유한 영토를 둘러싼 분쟁이었다. 이는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부터 시작된 복잡한 역사적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 왕들은 프랑스 내에 상당한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헨리 2세(1154-1189) 시기에는 잉글랜드 왕이 노르망디, 브르타뉴, 앙주, 메인, 투렌, 푸아투, 아키텐 등 프랑스 영토의 거의 절반을 지배했다. 이는 '앙주 제국(Angevin Empire)'이라 불렸다.
그러나 존 왕(1199-1216) 시기에 대부분의 프랑스 영토를 상실했고, 헨리 3세(1216-1272)는 1259년 파리 조약을 통해 가스코뉴(Gascony)만을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서 보유하게 되었다. 바로 이 봉신 관계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영국 왕은 프랑스 내 영토에 대해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으나, 동시에 자국에서는 군주였다. 이러한 이중적 위치는 자연스럽게 갈등을 낳았다. 영국 왕은 프랑스 왕의 간섭을 최소화하길 원했고, 프랑스 왕은 영국 왕이 프랑스 내에서 지나치게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견제하고자 했다.
특히 에드워드 1세(1272-1307)와 에드워드 2세(1307-1327) 시기에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가스코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했고, 이는 양국 간 긴장을 고조시켰다.
프랑스 왕위 계승 분쟁
백년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였다. 1328년,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카페 왕조의 직계가 끊겼다.
이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어머니 이사벨라(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딸)를 통해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 귀족들은 여계를 통한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살리카 법(Salic Law)'을 근거로 필리프 4세의 조카인 필리프 드 발루아(Philip of Valois)를 필리프 6세로 추대했다.
처음에 에드워드 3세는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지 않았고, 1329년에는 프랑스 영토에 대해 필리프 6세에게 봉신 서약을 했다. 그러나 양국 관계가 악화되면서 에드워드는 1340년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전략적 이해관계
영토 분쟁과 왕위 계승 문제 외에도, 경제적·전략적 이해관계가 백년전쟁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경제적으로 가스코뉴(특히 보르도 지역)는 와인 무역으로 영국에 큰 수익을 안겨주었다. 또한 플랜더스(현재의 벨기에 북부와 프랑스 북부)는 영국 양모의 주요 수출지였다.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는 이러한 무역 관계를 위협했다.
특히 필리프 6세가 플랜더스를 통제하려 하면서 영국의 양모 무역이 타격을 입게 되자, 에드워드 3세는 플랜더스 도시들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했다. 또한 프랑스가 스코틀랜드와의 '옛 동맹(Auld Alliance)'을 강화하면서, 영국은 북쪽 국경의 안보에도 위협을 느꼈다.
결국 1337년, 필리프 6세가 가스코뉴를 몰수하자 에드워드 3세는 이에 대응해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다시 주장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이로써 116년간 지속될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에드워드 3세와 초기 전쟁(1337-1360)
해상 승리와 플랜더스 동맹
전쟁 초기, 에드워드 3세는 플랜더스 도시들과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와 독일의 군주들을 포섭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동맹은 비용이 많이 들면서도 군사적으로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전쟁의 첫 중요한 전투는 1340년 6월 24일 슬라위스(Sluys) 해전이었다. 에드워드 3세가 직접 지휘한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를 크게 물리쳤다. 이 승리로 영국은 영불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고, 이후 수십 년간 프랑스 해안에 대한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슬라위스 해전 승리 이후 에드워드는 프랑스 북부에 상륙하여 투르네(Tournai)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1340년 9월 트루스 오브 에스플레셴(Truce of Esplechin)이라는 임시 휴전 협정을 맺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크레시 전투와 칼레 함락
휴전 기간 동안 양국은 브르타뉴 공국 계승 분쟁에 개입하면서 간접적으로 충돌했다. 1345년, 휴전 협정이 만료되자 에드워드는 본격적인 공세를 계획했다.
1346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진격했다. 8월 26일, 크레시(Crécy) 마을 근처에서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크레시 전투에서 영국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장궁(longbow)의 효과적인 운용, 방어적 진지 선택, 엄격한 군기 등을 통해 프랑스 기사들의 무모한 돌격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기존의 중세 기사 중심 전투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으로 평가된다.
크레시 승리 이후 에드워드는 북동쪽의 중요 항구 도시 칼레(Calais)를 공격했다. 11개월간의 포위 끝에 1347년 8월 칼레는 함락되었다. 칼레는 이후 1558년까지 200년 넘게 영국의 통제 하에 있으면서, 프랑스 본토를 공격하는 전진 기지이자 영국과 대륙을 연결하는 무역의 관문 역할을 했다.
흑사병과 전쟁의 중단
칼레 점령 직후인 1348년, 유럽 전역을 강타한 흑사병(Black Death)으로 인해 전쟁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흑사병은 영국과 프랑스 모두에게 막대한 인구 손실과 경제적 타격을 입혔다.
영국에서는 인구의 약 30-45%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군사 동원 능력과 세금 징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생존자들의 임금 상승, 노동력 부족, 사회적 불안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흑사병은 1350년경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그 여파로 대규모 군사 작전은 몇 년간 중단되었다. 이 기간 동안 산발적인 교전과 휴전이 반복되었다.
푸아티에 전투와 브레티니 조약
1355년, 에드워드 3세의 장남 에드워드 '검은 왕자'(Edward the Black Prince)는 가스코뉴에서 출발하여 프랑스 중부와 남부를 약탈하는 원정을 벌였다. 다음 해인 1356년 9월 19일, 그는 푸아티에(Poitiers) 근처에서 프랑스 왕 장 2세(필리프 6세의 아들)가 이끄는 군대와 마주쳤다.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영국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크레시에서와 유사한 전술로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이 전투에서는 프랑스 왕 장 2세가 포로로 잡히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이는 프랑스에 군사적 타격뿐만 아니라 정치적 위기도 가져왔다.
장 2세의 포로 생활 동안 프랑스는 왕세자 샤를(후의 샤를 5세)이 섭정을 맡았으나, 국내적으로 자크리의 난(Jacquerie, 1358년 농민 반란)과 에티엔 마르셀(Étienne Marcel)이 주도한 파리 시민 봉기 등 큰 혼란을 겪었다.
1359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노리고 대규모 원정을 다시 시작했으나, 샤를 섭정의 지구전 전략과 보급 문제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1360년 5월 8일, 양국은 브레티니 조약(Treaty of Brétigny)을 체결했다.
브레티니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한다.
- 프랑스는 가스코뉴, 푸아투, 칼레 등 광범위한 영토를 영국에 완전한 주권으로 양도한다(더 이상 봉신 관계 없음).
- 영국은 장 2세의 석방을 위해 300만 크라운의 몸값을 받는다.
이 조약으로 전쟁의 1단계(에드워드 3세 시기)는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영국은 프랑스 남서부에 넓은 영토를 획득했고, 장 2세를 인질로 잡아 큰 몸값을 요구할 수 있었다.
전쟁의 재개와 영국의 위기(1369-1396)
샤를 5세의 개혁과 전쟁 재개
브레티니 조약은 지속되지 않았다. 1364년 장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샤를 5세(1364-1380)로 즉위하면서 프랑스는 회복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샤를 5세는 '현명한 왕(le Sage)'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군사, 재정, 행정 등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정규군 유지를 위한 안정적인 세금 제도를 확립하고, 베르트랑 뒤 게클랭(Bertrand du Guesclin)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1369년, 가스코뉴 귀족들의 불만을 구실로 샤를 5세는 에드워드 3세가 브레티니 조약을 위반했다고 선언하고 전쟁을 재개했다. 프랑스는 이전과 달리 대규모 결전을 피하고 게릴라전과 지구전을 펼쳤다. 영국군이 진격하면 후퇴하고, 보급선을 공격하며, 소규모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1370년대를 통해 프랑스는 푸아투, 브르타뉴, 노르망디 등 이전에 영국이 차지했던 영토를 대부분 회복했다. 1375년까지 영국은 보르도, 바이욘, 칼레 등 몇몇 항구 도시만 유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시기 영국의 어려움은 군사적 실패뿐만 아니라 국내 문제에도 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노쇠하여 통치력이 약화되었고, 검은 왕자는 병으로 1376년 사망했다. 또한 1376년 '착한 의회(Good Parliament)'는 왕의 측근들을 탄핵하며 내부 갈등을 보였다.
1377년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하고 그의 10세 손자인 리처드 2세(1377-1399)가 즉위하면서 영국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리처드 2세 초기의 군사적 실패
어린 리처드 2세의 통치 초기, 실질적인 권력은 그의 삼촌들(존 곤트(John of Gaunt), 토마스 우드스톡 등)과 귀족 평의회가 행사했다. 이 시기 영국은 군사적으로 수세에 몰렸다.
1377-1380년 사이 프랑스는 영국 해안을 여러 차례 공격했고, 프랑스의 동맹국인 카스티야(스페인)는 영국 함대를 격파했다. 특히 1377년 라이(Rye)와 포츠머스, 1380년 윈첼시(Winchelsea) 해안 습격은 영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381년에는 농민 반란(Peasants' Revolt)이 발생하여 국내 혼란이 가중되었다. 비록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그 여파로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고 전쟁 수행 능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1383년, 노리치의 주교 헨리 디스펜서(Henry Despenser)가 플랜더스 원정을 이끌었으나 실패로 끝났고, 1385년 리처드 2세 자신이 스코틀랜드 원정을 지휘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86년, 프랑스는 영국 본토 침공을 계획했다. 수백 척의 선박과 수만 명의 군대가 모였으나, 악천후와 내부 갈등으로 계획은 취소되었다.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위협은 영국 방위 비용을 크게 증가시켰다.
휴전과 평화 노력
1380년대 중반, 양국 모두 전쟁의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5세가 1380년 사망하고 12세의 어린 샤를 6세가 즉위했다. 그의 삼촌들에 의한 섭정 기간 동안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고, 1382년에는 세금 문제로 파리와 루앙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영국에서도 리처드 2세와 귀족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386-1388년 동안 항소 영주(Lords Appellant)들이 실권을 장악하며 내부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국은 1389년 렌링햄 휴전(Truce of Leulinghem)을 맺었다. 처음에는 3년간의 휴전이었으나, 여러 차례 연장되어 결과적으로 1415년까지 대규모 전투 없이 비교적 평화로운 기간이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리처드 2세는 프랑스와 항구적인 평화를 모색했다. 1396년, 그는 7세의 이사벨(샤를 6세의 딸)과 결혼하며 양국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혼인 지참금으로 프랑스는 상당한 금액을 지불했고, 휴전은 28년으로 연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 노력은 리처드 2세의 몰락으로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1399년, 그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폐위되었고, 헨리 4세(랭커스터 왕조의 시작)가 즉위했다. 이것은 영-프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했다.
헨리 5세와 아쟁쿠르 전투(1415-1422)
랭커스터 왕조와 전쟁 재개
헨리 4세(1399-1413) 시기에는 전쟁이 본격적으로 재개되지 않았다. 그는 폐위된 리처드 2세의 지지자들을 진압하고, 글렌도워(Glendower)의 웨일스 반란, 퍼시 가문(Percy family)의 북부 반란 등 국내 문제에 집중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헨리 5세(1413-1422)는 즉위 직후부터 프랑스에 대한 원정을 계획했다. 그는 용맹한 전사이자 뛰어난 지략가로,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전쟁을 재개했다.
당시 프랑스는 내부적으로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샤를 6세의 정신 질환으로 인해 실질적 권력은 버건디 공작 존 무서운 자(John the Fearless)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 사이의 파벌 다툼 속에 있었다. 이러한 내부 분열은 헨리 5세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1414년, 헨리는 프랑스에 거창한 요구를 했다: 노르망디, 앙주, 메인, 투렌, 푸아투에 대한 주권, 30만 크라운의 보상금, 프랑스 공주(캐서린)와의 결혼 등이었다. 이러한 요구가 거부되자 그는 1415년 8월 대규모 원정을 시작했다.
아쟁쿠르 전투와 영국의 승리
1415년 8월, 헨리 5세는 약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노르망디의 항구 도시 아르플뢰르(Harfleur)를 공격했다. 5주간의 포위 끝에 아르플뢰르는 함락되었으나, 영국군은 질병과 전투로 인해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당초 계획은 더 남쪽으로 진격하는 것이었으나, 병력 손실로 인해 헨리는 칼레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철수 과정에서 프랑스군이 진로를 차단했고, 결국 10월 25일 아쟁쿠르(Agincourt) 마을 근처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영국군은 약 6,000-9,000명으로, 프랑스군 15,000-30,000명에 비해 크게 열세였다. 그러나 지형적 이점(좁은 들판과 진흙 땅), 뛰어난 장궁수들, 헨리 5세의 탁월한 지휘 등으로 영국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아쟁쿠르 전투는 크레시, 푸아티에와 함께 백년전쟁에서 영국의 3대 승리로 꼽힌다. 이 승리로 헨리 5세는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프랑스 정복에 대한 그의 야망은 더욱 커졌다.
노르망디 정복과 트루아 조약
아쟁쿠르 승리 이후 헨리 5세는 1417년 다시 프랑스에 원정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노르망디 전체를 체계적으로 정복하는 것이 목표였다.
1417-1419년에 걸친 노르망디 정복 작전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루앙(Rouen)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이 하나둘 함락되었고, 1419년 1월에는 노르망디의 수도 루앙이 6개월간의 포위 끝에 항복했다. 이로써 헨리는 노르망디 전체를 장악했다.
같은 시기, 프랑스의 내분은 더욱 심화되었다. 1419년 9월, 프랑스 왕세자 샤를(후의 샤를 7세)의 부하들이 존 무서운 자를 몽트로(Montereau) 다리에서 암살했다. 이로 인해 버건디 파는 완전히 왕세자와 적대하게 되었고, 새 버건디 공작 필리프 선한 자(Philip the Good)는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20년 5월 21일, 트루아 조약(Treaty of Troyes)이 체결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딸 캐서린과 결혼한다.
- 샤를 6세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가 명목상 프랑스 왕이 된다.
- 샤를 6세 사망 후에는 헨리 5세와 그의 후손들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다.
- 왕세자 샤를은 왕위 계승에서 제외된다.
이 조약으로 헨리 5세는 사실상 프랑스의 섭정이 되었고, 영국과 프랑스의 왕관이 통합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헨리 5세와 샤를 6세의 사망
트루아 조약 이후 헨리 5세는 왕세자 샤를과 그의 지지자들(주로 프랑스 중남부 지역에 있는 아르마냑파)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1422년 8월 31일, 전투 도중 얻은 이질로 인해 헨리 5세는 불과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더욱 놀랍게도, 샤를 6세도 헨리 5세 사망 2개월 후인 1422년 10월 21일에 사망했다. 트루아 조약에 따라 헨리 5세와 캐서린의 아들인 9개월 된 헨리 6세가 영국과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헨리 5세의 동생들, 특히 베드퍼드 공작 존(John, Duke of Bedford)이 프랑스에서,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Humphrey, Duke of Gloucester)가 영국에서 섭정으로서 행사했다.
한편, 왕위를 빼앗긴 샤를 6세의 아들 샤를은 자신을 프랑스의 정통 국왕 샤를 7세로 주장하며 루아르 강 남쪽 지역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이로써 백년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잔 다르크와 프랑스의 회복(1429-1453)
오를레앙 포위전과 잔 다르크의 등장
헨리 5세 사망 이후에도 영국은 프랑스에서의 군사적 성공을 이어갔다. 베드퍼드 공작의 뛰어난 지휘 하에 영국군은 루아르 강 북쪽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고, 1428년 10월에는 루아르 강의 중요한 도시 오를레앙(Orléans)을 포위했다.
오를레앙은 프랑스 남부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도시가 함락되면 샤를 7세의 세력권인 남부 프랑스까지 영국의 지배가 확장될 것이었다. 도시는 7개월 동안 영국군의 공격을 견뎌냈으나,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1429년 3월, 한 시골 소녀가 샤를 7세의 궁정에 나타났다. 그녀는 도미니(Domrémy) 마을 출신의 17세 소녀 잔 다르크(Joan of Arc)였다. 잔은 하느님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성한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던 샤를 7세와 그의 고문들은 결국 잔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그녀에게 오를레앙 구원을 위한 원정대를 이끌 기회를 주었다. 잔은 갑옷을 입고 군대를 지휘하며 1429년 4월 29일 오를레앙에 도착했다.
잔의 도착은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그녀의 지휘 하에 프랑스군은 계속된 공격을 감행했고, 5월 8일 영국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오를레앙의 기적'이다.
샤를 7세의 대관식과 잔 다르크의 최후
오를레앙 승리 이후, 잔 다르크는 샤를 7세에게 랭스(Reims)로 가서 정식 대관식을 치를 것을 촉구했다. 랭스는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하는 도시였으나, 당시에는 영국-버건디 동맹의 통제 하에 있었다.
1429년 7월, 잔의 지휘 하에 프랑스군은 파테(Patay)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랭스로 진군했다. 7월 17일, 샤를 7세는 랭스 대성당에서 정식 대관식을 거행했고, 이로써 그의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후 파리 공격은 실패했고, 잔 다르크의 운도 기울기 시작했다. 1430년 5월 23일, 그녀는 콩피에뉴(Compiègne) 전투에서 버건디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버건디 공작은 그녀를 영국에 넘겼고, 영국은 그녀를 이단과 마녀라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1431년 5월 30일, 잔 다르크는 루앙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불과 19세였다. 샤를 7세는 그녀를 구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후대에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잔의 짧은 활동(약 2년)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그녀의 희생은 프랑스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영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 의지를 강화했다.
아라스 조약과 버건디의 태도 변화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1435년, 대륙 정치에 중요한 변화가 찾아왔다. 1435년 9월 14일, 베드퍼드 공작이 사망했고, 같은 달 21일 아라스 조약(Treaty of Arras)이 체결되었다.
아라스 조약을 통해 버건디 공작 필리프 선한 자는 영국과의 동맹을 깨고 샤를 7세와 화해했다. 그 대가로 샤를은 버건디에 상당한 양보를 했다: 솜(Somme) 강 유역의 도시들, 플랜더스에 대한 주권, 그리고 존 무서운 자의 암살에 대한 사과.
버건디의 이탈은 영국에게 큰 타격이었다. 버건디는 영국의 핵심 동맹이었을 뿐만 아니라, 칼레와 노르망디의 영국 영토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를 제공했다. 이 동맹의 붕괴로 영국의 프랑스 내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1436년, 버건디와 프랑스 연합군은 파리를 탈환했다. 이로써 파리는 1418년 이후 17년 만에 다시 프랑스 왕의 통제 하에 들어왔다.
샤를 7세의 개혁과 영국의 패배
1435년 이후, 샤를 7세는 군사 및 재정 개혁을 통해 프랑스를 강화했다. 그는 상비군 제도를 도입하고, 효율적인 포병대를 구성했으며, 정규적인 세금 제도(taille)를 확립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438년 '부르주 실용 조례(Pragmatic Sanction of Bourges)'를 통해 프랑스 교회에 대한 왕의 통제권을 강화한 것이다. 이로써 교황보다 프랑스 왕에게 충성하는 '갈리칸 교회(Gallican Church)'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개혁과 강화된 국력을 바탕으로 프랑스는 영국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1449년, 영국이 브르타뉴를 침공한 것을 구실로 샤를 7세는 노르망디 탈환 작전을 개시했다.
1449-1450년에 걸친 노르망디 전역에서 프랑스군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450년 4월 15일 포르미니(Formigny)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둔 후, 프랑스는 노르망디 전체를 탈환했다. 영국은 30년 만에 노르망디를 잃은 것이다.
이어서 프랑스는 남서부 가스코뉴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1451년, 프랑스군은 가스코뉴 대부분을 점령했고, 잠시 영국의 반격으로 보르도가 탈환되기도 했으나, 1453년 7월 17일 카스티용(Castillon) 전투에서 프랑스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카스티용 전투는 백년전쟁의 사실상 마지막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포병의 화력에 크게 패배했고, 지휘관 탤봇(John Talbot, 슈루즈베리 백작)도 전사했다. 이 패배로 영국은 300년 이상 보유했던 가스코뉴 지역을 잃었고, 프랑스 본토에서는 칼레만 남겨두게 되었다(칼레는 1558년까지 영국 영토로 남았다).
정식 평화 조약이 체결되지는 않았지만, 1453년을 백년전쟁의 종료 시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같은 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함락되면서, 유럽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백년전쟁이 잉글랜드에 미친 영향
정치적 영향과 장미전쟁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패배는 국내 정치 불안으로 이어졌다.
헨리 6세(1422-1461, 1470-1471)는 아버지 헨리 5세와 달리 군사적 지도자로서 역량이 부족했다. 그는 온화하고 독실한 성격이었으나 의지가 약했고, 1453년에는 정신질환으로 일시적 통치 불능 상태에 빠졌다.
프랑스에서의 영토 상실은 많은 귀족들에게 경제적 타격을 주었고, 국왕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을 키웠다. 특히 서포크 공작(Duke of Suffolk)과 서머셋 공작(Duke of Somerset) 등 왕의 측근들이 프랑스 전쟁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1455년, 이러한 불만이 폭발하여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이 시작되었다. 랭커스터 왕가(붉은 장미)와 요크 왕가(흰 장미) 사이의 이 내전은 1485년까지 30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튜더 왕조의 등장으로 마무리되었다.
백년전쟁은 또한 의회의 역할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해 왕은 자주 의회를 소집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의회, 특히 하원(Commons)의 권한이 점차 확대되었다. 특히 세금 동의권과 청원권을 통해 의회는 국정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적, 사회적 영향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경제에 혼합된 영향을 미쳤다. 전쟁 초기에는 프랑스에서의 약탈과 승리로 일부 귀족과 군인들이 부를 축적했다. 특히 아쟁쿠르 전투 같은 승리는 상당한 양의 몸값과 전리품을 가져왔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전쟁은 무역 방해, 높은 세금, 인플레이션 등으로 경제에 부담을 주었다. 특히 가스코뉴 상실은 와인 무역에 타격을 주었고, 칼레를 통한 모직물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사회적으로는 군사 활동의 증가로 인해 기사 계급과 궁수들의 지위가 상승했다. 특히 장궁수들은 크레시, 푸아티에, 아쟁쿠르 등의 승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이는 그들의 사회적 가치를 높였다.
전쟁은 또한 영국인의 정체성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와의 장기간 대립은 '영국인'으로서의 민족 의식을 강화했고, 프랑스어 대신 영어 사용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를 비롯한 작가들이 영어로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1362년에는 법정에서도 영어 사용이 공식화되었다.
군사적 영향
백년전쟁은 중세 후기 군사 기술과 전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크레시, 푸아티에, 아쟁쿠르 전투에서 보여준 영국의 전술, 특히 장궁수와 하마한 기사의 조합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다.
장궁(longbow)은 영국의 상징적인 무기가 되었다. 사거리가 길고 발사 속도가 빠른 이 무기는 중장갑 기사들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모든 건강한 남성들에게 장궁 훈련을 의무화했고, 이는 일종의 국민 방위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쟁 후반부에는 화약 무기의 중요성이 점차 커졌다. 특히 카스티용 전투에서 프랑스 포병의 우세는 전통적인 기사 중심 전투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이는 향후 유럽 전장에서 화포와 총기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임을 예고했다.
조직적인 면에서는 백년전쟁이 직업군인 제도의 발전을 촉진했다. 에드워드 3세와 헨리 5세는 '계약 시스템(indenture system)'을 통해 귀족들과 계약을 맺고 특정 수의 군인을 모집했다. 이는 근대적 군대 조직의 선구가 되었다.
문화적 영향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문화와 예술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전쟁 영웅들, 특히 에드워드 흑태자와 헨리 5세는 기사도와 영웅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문학에서는 전쟁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했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Canterbury Tales)'에는 기사가 주요 인물로 나오며, 아쟁쿠르 전투 이후에는 헨리 5세의 업적을 칭송하는 많은 시와 발라드가 지어졌다.
특히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헨리 5세'는 아쟁쿠르 전투와 헨리의 리더십을 극적으로 묘사하여 영국인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켰다. "우리 소수의 행복한 형제들(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으로 시작하는 유명한 연설은 오늘날까지 영국 군사 전통의 일부로 남아있다.
건축에서는 전쟁의 필요성이 성(castle)과 방어 시설의 발전을 가져왔다. 특히 헨리 5세가 프랑스에 건설한 요새들은 당시 최신 방어 기술을 보여주었다.
예술적으로는 기사와 전쟁 장면을 묘사한 필사본 삽화, 태피스트리, 장식용 갑옷 등이 발달했다. 또한 많은 귀족들이 전쟁 승리를 기념하여 교회와 대학을 설립했는데, 헨리 5세의 유언에 따라 세워진 이튼 칼리지(Eton College)가 대표적이다.
백년전쟁의 역사적 의의
근대 국가로의 전환점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모두에게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특히 두 나라의 민족 정체성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영국의 경우, 전쟁은 노르만 정복 이래 지속된 프랑스와의 연계를 약화시켰다. 영국 귀족들은 더 이상 프랑스에 토지를 소유하지 않게 되었고, 점차 영국 내 이해관계에 집중하게 되었다. 또한 영어 사용의 확산은 프랑스어와의 언어적 분리를 가속화했다.
프랑스의 경우, 전쟁은 분열된 봉건 영지에서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샤를 7세의 개혁(상비군, 정규 세금 제도, 갈리칸 교회 등)은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초를 마련했다.
양국 모두에서 전쟁은 국왕의 권한 강화와 관료제 발전을 촉진했다. 전쟁 수행을 위해 더 많은 자원을 동원하고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봉건제에서 근대 군사 체제로
백년전쟁은 중세 봉건 군사 체제에서 근대적 군사 체제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기사도와 봉건적 동원 방식의 한계가 드러났고, 보다 전문적이고 조직적인 군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프랑스는 샤를 7세 시기 '주둔군(Compagnies d'ordonnance)'이라는 상비군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유럽 최초의 정규 상비군 중 하나로, 이후 근대 군사 조직의 모델이 되었다.
또한 백년전쟁은 포병과 보병의 중요성을 증가시켰다. 특히 전쟁 후반부에 프랑스가 발전시킨 포병 기술은 중세 성벽과 기사 중심 전투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경제적 변혁의 촉진제
백년전쟁은 14세기 중반 흑사병과 함께 중세 사회경제 구조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전쟁의 장기화는 높은 세금, 인플레이션, 사회적 불안을 가져왔고, 이는 기존 봉건 질서에 도전했다.
영국에서는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한 과세가 1381년 농민 반란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도 전쟁으로 인한 고통이 1358년 자크리의 난(Jacquerie)과 같은 민중 봉기를 촉발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전쟁이 도시 발전과 상업화를 촉진하는 측면도 있었다. 군수품 조달, 군인 지불, 전쟁 금융 등의 필요성은 은행업과 국제 무역의 발전을 가져왔다.
특히 주목할 점은 전쟁이 기술 혁신을 촉진했다는 것이다. 무기 제조, 조선, 요새 건축 등 분야에서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는 후에 산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결론: 백년전쟁과 영국 역사
백년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영국의 패배로 끝났지만, 그 영향은 훨씬 복잡하고 다면적이었다. 영국은 프랑스 본토에서 거의 모든 영토를 잃었지만(칼레만 예외), 이는 역설적으로 보다 통합된 섬나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에 대한 영토적 야망에서 벗어난 영국은 점차 해상 강국으로서의 정체성을 발전시켰다. 대륙 정치에 개입하면서도 바다를 통한 안보와 무역에 더 집중하게 된 것이다. 이는 후에 영국이 해상 제국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백년전쟁의 여파가 장미전쟁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결국 튜더 왕조의 등장을 가져왔다. 헨리 7세로 시작된 튜더 왕조는 영국을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나아가 근대 국가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백년전쟁은 또한 영국인의 집단적 기억과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크레시, 푸아티에, 아쟁쿠르에서의 승리는 민족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고, 헨리 5세와 같은 전쟁 영웅은 국가적 상징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정치 제도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전쟁 수행을 위한 세금 동의 과정에서 의회, 특히 하원의 역할이 강화되었고, 이는 영국 헌정주의 발전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처럼 백년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영국과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영국과 프랑스의 국가 정체성과 상호 관계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