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가젯
프랑스 역사 기본 8. 발루아 왕조와 르네상스 수용
발루아 왕조의 등장과 초기 통치
발루아(Valois) 왕조는 카페 왕조의 방계 가문으로, 1328년 카페 직계의 단절로 왕위에 올랐다. 필리프 6세(재위 1328-1350)가 첫 발루아 왕으로, 그의 즉위는 백년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발루아 왕조는 1589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하며, 중세 후기에서 근대 초기로의 전환기를 이끌었다.
발루아 왕조는 크게 두 계열로 나뉜다:
- 직계 발루아(1328-1498): 필리프 6세부터 샤를 8세까지
- 발루아-오를레앙/앙굴렘(1498-1589): 루이 12세부터 앙리 3세까지
백년전쟁 이후 루이 11세의 아들 샤를 8세(재위 1483-1498)는 13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의 누나 안 드 보주(Anne de Beaujeu)가 섭정으로서 능력 있게 통치했으며, 귀족들의 반란인 '미친 전쟁'(La Guerre Folle, 1485-1488)을 진압하고 왕권을 수호했다.
1491년, 샤를 8세는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의 딸 안(Anne de Bretagne)과 결혼하여 브르타뉴를 프랑스 왕실에 연결했다. 이 혼인은 프랑스의 영토적 통합에 중요한 진전이었다.
이탈리아 전쟁의 시작과 르네상스와의 만남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1494-1495)
1494년, 샤를 8세는 나폴리 왕국에 대한 가문의 권리를 주장하며 이탈리아 원정을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정복 전쟁을 넘어 프랑스와 이탈리아 문화의 중요한 접점이 되었다.
원정의 주요 경과는 다음과 같다:
- 1494년 9월: 프랑스군 3만 명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침공
- 1494년 11월: 피렌체 무혈 입성, 메디치 가문 추방
- 1495년 2월: 나폴리 입성 및 왕국 점령
- 1495년 3월: 베네치아, 교황, 밀라노,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의 '베네치아 동맹' 결성
- 1495년 7월: 포르노보 전투에서 동맹군과 대치 후 프랑스로 철수
군사적으로는 제한된 성공에 그쳤으나, 문화적으로는 프랑스에 르네상스를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샤를 8세와 그의 귀족들은 이탈리아의 예술, 건축, 문학, 생활 양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루이 12세와 이탈리아 전쟁의 계속(1498-1515)
1498년 샤를 8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의 사촌 루이 오를레앙이 루이 12세(재위 1498-1515)로 즉위했다. 그는 전임자의 이탈리아 정책을 계승하고 확대했다:
- 밀라노에 대한 권리 주장(그의 할머니가 밀라노 비스콘티 가문 출신)
- 1499년: 밀라노 점령 성공
- 1500년: 나폴리 왕국을 스페인과 분할 점령 합의
- 1503년: 나폴리를 둘러싸고 스페인과 갈등, 가리글리아노 전투에서 패배
- 1508년: 교황,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프랑스의 캄브레 동맹 결성
- 1509년: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 격파
- 1511년: 교황이 '신성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대항
- 1513년: 노바라, 기네가테 전투에서 연이은 패배
루이 12세는 국내 통치에서는 '국민의 아버지'(Père du Peuple)라 불릴 정도로 선정을 베풀었으나, 이탈리아 전쟁의 비용과 패배로 인해 말년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수아 1세와 프랑스 르네상스의 전성기
프랑수아 1세의 즉위와 마리냥 전투
1515년, 루이 1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의 사위이자 먼 친척인 앙굴렘 백작 프랑수아가 프랑수아 1세(재위 1515-1547)로 즉위했다. 20세의 젊고 야심 찬 왕은 즉위 직후 이탈리아 원정을 재개했다.
1515년 9월 13-14일, 마리냥(Marignano)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는 스위스 용병들을 격파하고 밀라노를 재점령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그는 군사적 명성을 얻었고, 교황 레오 10세와 볼로냐 콩코르다트(1516)를 체결하여 프랑스 교회에 대한 왕권의 통제를 강화했다.
'학문의 아버지'와 르네상스의 후원
프랑수아 1세는 '학문의 아버지'(Père des Lettres)라는 별명에 걸맞게 예술과 학문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그의 문화 정책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였다:
-
이탈리아 예술가와 학자 초빙:
-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프랑스로 초청(1516), 앙부아즈성에서 말년을 보냄
- 안드레아 델 사르토, 베네베누토 첼리니 등 이탈리아 예술가 초빙
- 그리스어, 히브리어 학자들을 초빙하여 고전 연구 장려
-
문학과 교육의 후원:
- 1530년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 설립
- 궁정 시인 클레망 마로(Clément Marot) 등 문인 후원
- 프랑스어의 사용과 발전 장려(1539년 빌레르코트레 칙령)
-
건축과 예술 사업:
- 퐁텐블로 궁전 재건과 '퐁텐블로 학파' 형성
- 루브르 궁전 재건 시작
- 샹보르, 블루아 등 루아르 계곡 성들의 르네상스 양식 개축
프랑수아 1세 시기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황금기로, 국가적 차원의 문화 정책이 체계적으로 추진되었다.
샤를 5세(신성로마제국 황제)와의 경쟁
프랑수아 1세 시대의 큰 도전은 합스부르크가의 샤를 5세와의 경쟁이었다. 샤를은 스페인,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나폴리-시칠리아, 그리고 신세계의 식민지를 통치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
양자 간의 경쟁은 여러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
제국 선제 경쟁(1519):
- 마크시밀리안 1세 사망 후 황제 자리를 두고 경쟁
- 프랑수아의 뇌물 외교에도 불구하고 샤를이 황제로 선출됨
-
이탈리아 전쟁의 계속:
- 1521-1526년: 제1차 프랑스-합스부르크 전쟁
-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 패배, 프랑수아 1세 포로로 잡힘
- 1526년: 마드리드 조약으로 풀려나나 굴욕적 조건 수용
- 1526-1530년: 코냑 동맹 결성, 제2차 전쟁
- 1529년: 캉브레 부인의 평화로 일시 종전
- 1536-1538년: 제3차 전쟁, 니스 휴전
- 1542-1546년: 제4차 전쟁, 크레피 조약
-
외교적 혁신:
- 오스만 제국과의 동맹(1536): 기독교 왕이 이슬람 세력과 동맹을 맺는 파격적 조치
- 독일 개신교 제후들과 협력
- 영국, 교황과의 관계를 전략적으로 활용
이 경쟁은 프랑스가 단일 강대국에 의한 유럽 지배를 저지하는 '세력 균형' 정책을 펼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르네상스의 특징과 발전
프랑스적 르네상스의 특성
프랑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수용하면서도 독자적인 특성을 발전시켰다:
-
건축적 특징:
- 중세 고딕 전통과 이탈리아 고전 양식의 독특한 융합
- 성채의 기능성을 유지하면서 장식적 요소 가미
- 샤토(château)라는 프랑스 특유의 성궁 양식 발전
- 루아르 계곡의 샹보르, 블루아, 셰농소, 앙부아즈 등이 대표적 사례
-
예술적 특징:
- 퐁텐블로 학파: 이탈리아와 프랑스 요소의 혼합
- 장 클루에(Jean Clouet)와 같은 초상화가의 활동
- 프랑수아 클루에(François Clouet)의 세련된 궁정 초상화
- 장식미술과 공예의 발달
-
문학적 특징:
- 프랑스어 문학의 본격적 발전
- 라블레(Rabelais)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중세와 르네상스의 융합
-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Marguerite de Navarre)의 『헵타메론』
- 플레이아드(Pléiade) 시인 그룹의 활동
고전 학문의 부흥과 인문주의
프랑스 르네상스는 학문적 혁신과 인문주의 정신의 확산을 가져왔다:
-
인문주의의 발전:
- 기욤 뷔데(Guillaume Budé): 그리스어 연구와 콜레주 드 프랑스 설립 주도
- 에티엔 가문(Estienne): 인쇄업과 사전 편찬 선구
- 르페브르 데타플(Lefèvre d'Étaples): 성서 연구와 교육 개혁
- 쟝 무랭(Jean Moulin): 라틴어 학습의 혁신
-
법학과 역사학의 발전:
- 쟝 보댕(Jean Bodin): 『국가론』에서 주권 개념 발전
- 에티엔 파스키에(Étienne Pasquier): 프랑스 역사 연구
- 미셸 드 로피탈(Michel de L'Hôpital): 법과 관용의 원칙 옹호
-
과학적 발전:
- 아믈루아즈 파레(Ambroise Paré): 외과 의학의 혁신
- 장 페르넬(Jean Fernel): 의학 교과서 편찬
- 수학, 천문학 연구의 확대
종교 개혁의 시작과 영향
16세기 전반에 프랑스는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
프랑스 종교 개혁의 초기 발전:
- 르페브르 데타플과 모(Meaux) 집단: 온건한 교회 내 개혁 시도
- 칼뱅(Calvin)의 등장: 제네바로 망명하여 개혁 교회의 중심 형성
- 1530년대부터 개신교(위그노)의 확산, 특히 남부와 서부 지역에서 성장
-
프랑수아 1세의 대응:
- 초기에는 종교적 관용 경향
- 1534년 '포스터 사건'(Affaire des Placards) 이후 탄압 강화
- 발도파 학살(1545):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잔혹한 탄압
-
문화적 영향:
- 개신교의 프랑스어 성경 번역과 보급
- 종교 논쟁을 통한 지적 담론의 활성화
- '갈리칸 자유'(Gallican Liberties)와 종교 개혁 사이의 복잡한 관계
앙리 2세와 발루아 왕조의 후기
앙리 2세의 통치(1547-1559)
프랑수아 1세의 아들 앙리 2세는 아버지의 정책을 대체로 계승하면서도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보였다:
-
정치적 특징:
- 몽모랑시(Montmorency) 가문과 기즈(Guise) 가문의 권력 경쟁
-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스의 점진적 영향력 강화
- 디안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의 후원자 역할
-
종교 정책:
- 개신교에 대한 더 강력한 탄압
- 샹브르 아르당트(Chambre Ardente): 이단 재판소 설치
- 종교적 긴장의 고조
-
외교와 전쟁:
- 샤를 5세와의 경쟁 계속
- 1552년: 메스, 툴, 베르됭(Metz, Toul, Verdun)의 세 교구 점령
- 1557년: 생-캉탱(Saint-Quentin) 전투에서 패배
- 1558년: 칼레 탈환으로 영국의 마지막 프랑스 영토 회수
- 1559년: 카토-캉브레시 조약으로 이탈리아 전쟁 종결
1559년 6월 30일, 앙리 2세는 딸의 결혼식 기념 기사 시합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이는 발루아 왕조의 위기와 종교 전쟁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스와 종교전쟁의 시작
앙리 2세의 사망 후, 그의 아들들(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으나 모두 취약한 통치자였다. 실질적인 권력은 왕세자비 카트린 드 메디치스가 장악했다:
-
프랑수아 2세 시기(1559-1560):
- 어린 왕을 대신하여 기즈 가문이 실권 장악
- 앙부아즈 음모 사건(1560): 위그노 귀족들의 쿠데타 시도 실패
- 프랑수아 2세의 갑작스러운 사망(1560년 12월)
-
샤를 9세 초기(1560-1562):
- 카트린 드 메디치스의 섭정
- 종교적 화해 시도: 푸아시 종교회담(1561)
- 생-제르맹 칙령(1562년 1월): 제한적 종교 자유 허용
-
제1차 종교전쟁의 발발(1562-1563):
- 바시 학살(1562년 3월): 기즈 공작이 개신교 예배 참석자들을 학살
- 콩데 왕자가 이끄는 위그노와 기즈 가문이 이끄는 가톨릭 세력 간 무력 충돌
- 앙부아즈 칙령(1563년 3월)으로 일시적 평화
이 시기 프랑스는 점차 종교적 분열과 폭력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스는 왕권 수호를 위해 양측 사이에서 균형 정책을 시도했으나, 종교적 열정은 정치적 계산을 넘어 프랑스를 내전 상태로 몰아갔다.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 사회와 문화의 변동
사회경제적 변화
16세기 프랑스는 인구 증가와 경제적 팽창을 경험했다:
-
인구 변화:
-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인구 회복이 계속되어 약 1,600만 명에 도달
- 도시 인구의 증가, 특히 파리는 약 30만 명의 주민을 가진 대도시로 성장
- 전염병과 기근이 여전히 주기적으로 발생했으나 영향은 제한적
-
경제적 발전:
- 농업 생산의 증가와 상업적 농업의 발달
- 국제 무역의 확대: 리옹, 루앙, 보르도, 마르세유 등 무역 중심지 성장
- 식민지 개발의 시작: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의 캐나다 탐험
- 물가 상승(가격 혁명)으로 인한 사회적 변동
-
사회 구조의 변화:
- '법복 귀족'(noblesse de robe)의 지속적 성장과 영향력 확대
- 도시 부르주아 계층의 강화와 사회적 상승 도모
- 농촌 인구의 분화: 부유한 소농과 빈곤한 소작농의 격차 확대
일상생활과 사고방식의 변화
르네상스는 사람들의 일상과 정신세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
의복과 주거:
- 궁정 문화의 영향으로 귀족과 부유한 시민층의 의복 변화
- 이탈리아식 가구와 장식 도입
- 도시 주택의 변화: 목구조에서 석조 건물로 점진적 전환
- 개인 위생과 프라이버시 개념의 점진적 발전
-
식생활:
- 신대륙에서 도입된 새로운 식재료(감자, 토마토, 옥수수, 칠면조 등)
- 이탈리아 영향으로 세련된 요리법 발전
- 식사 예절과 식탁 문화의 변화
-
사고방식과 세계관:
- 종교적 확신과 회의주의의 공존
- 미셸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의 수상록에 나타난 비판적 사고
- 마법과 과학적 사고의 공존
- 개인의 가치와 인간 능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
프랑스 르네상스의 한계와 특수성
프랑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구별되는 몇 가지 특수성과 한계를 가졌다:
-
왕권과의 긴밀한 관계:
- 프랑스 르네상스는 왕실과 귀족의 후원에 크게 의존
- 궁정 문화로서의 성격이 강함
- 도시 공화정 전통의 부재
-
종교적 요소의 강한 영향:
- 인문주의와 전통 신앙 사이의 긴장
- 종교 개혁과 가톨릭 반종교개혁의 영향
- 복음주의적 인문주의의 발전
-
중세 전통과의 연속성:
- 고딕 예술과 르네상스 양식의 공존
- 봉건적 관습과 근대적 제도의 혼합
- 고전 학문과 중세 스콜라 철학의 병존
프랑스 르네상스는 16세기 중반 종교전쟁의 발발로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도입한 사상과 문화적 혁신은 계속 영향을 미쳐,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의 역사적 의의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는 국가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
국가 정체성의 강화:
- 이탈리아 전쟁을 통한 국제적 위상 확립
- 프랑스어의 공식화와 문화적 통합
- 갈리칸 교회의 특수성 강화
-
국제 질서에서의 역할 변화:
- 유럽 세력 균형 체제의 주요 축으로 부상
- 합스부르크 포위망에 대한 대항 전략 발전
- 근대 외교의 기초 확립
-
문화적 자신감의 획득:
- 고유한 프랑스적 르네상스 스타일 발전
- 파리의 문화 중심지로서의 위상 강화
- 프랑스 문학과 사상의 독자적 흐름 형성
이 시기는 프랑스가 중세적 왕국에서 근대적 국가로 전환하는 중요한 과도기였다. 비록 16세기 후반 종교전쟁으로 이어지는 위기를 맞았으나,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된 문화적, 정치적 기반은 이후 17세기 프랑스의 '대세기'(Grand Siècle)를 준비하는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