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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 7. 중세 철학 (초기 교부철학·스콜라 철학)
1. 아우구스티누스 등 교부철학의 특징과 신앙·이성의 관계
중세 철학의 배경
로마 제국의 쇠퇴와 기독교의 국교화는 서양 사상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기원후 4세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함으로써, 이교도 철학과 기독교 사상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리스 철학의 전통 위에 기독교적 세계관이 결합되면서 중세 철학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교부철학의 성립과 특징
교부철학은 초기 기독교 시대에 '교부'(Church Fathers)라 불리는 기독교 이론가들이 발전시킨 사상이다. 이들은 기독교 교리의 체계화, 이단 사상 비판,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신앙의 조화를 시도했다.
주요 특징
- 계시와 이성의 관계: 교부철학자들은 신앙과 이성이 조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해하기 위해 믿으라"(Credo ut intelligam)는 그들의 기본 원칙이었다.
-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플로티노스(205-270)의 신플라톤주의는 교부철학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자(一者, The One)에서 시작되는 유출설과 영혼의 상승 이론은 기독교적으로 재해석되었다.
- 창조론: 그리스 철학의 영원한 우주관과 달리, 기독교는 신의 창조 행위를 강조했다. 이는 시간과 역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 악의 문제: 신이 전지전능하고 선하다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신정론'(theodicy)의 문제는 교부철학의 중요 주제였다.
주요 교부철학자들
동방 교부
- 오리게네스(185-254):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중심 인물로, 『원리론』에서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했다. 성서의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발전시켰다.
- 카파도키아 교부들(바실리우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 니사의 그레고리): 삼위일체 교리 확립에 기여했으며,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을 발전시켰다.
서방 교부
- 테르툴리아누스(160-220):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철학과 신앙의 분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 입장은 주류 교부철학에서 수용되지 않았다.
-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중세 철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그의 사상은 서방 기독교 전통의 기초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정신적 방황과 회심 과정을 『고백록』에 기록했다. 그의 철학은 신플라톤주의적 요소와 기독교 교리의 독창적 결합이다.
인식론
아우구스티누스는 내면성과 직관을 강조했다. "너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라. 진리는 내면에 거한다"라는 그의 가르침은 자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진리 탐구를 연결한다. 그는 또한 '신적 조명설'을 주장하여, 인간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신의 빛 덕분이라고 보았다.
시간론
『고백록』 11권에서 그는 시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성찰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내게 묻지 않으면 나는 안다. 그러나 누군가 물으면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시간을 영혼의 '확장'(distentio animi)으로 보았으며, 과거는 기억, 현재는 주의, 미래는 기대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역사철학
『신국론』에서 그는 기독교적 역사관을 제시했다. 세속 도시(civitas terrena)와 신의 도시(civitas dei)라는 두 가지 상징적 공동체의 대비를 통해 역사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는 후대 서방 역사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악에 대한 이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실체가 아닌 '선의 결여'(privatio boni)로 정의했다. 모든 존재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본질적으로 선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의 남용이 악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은총과 자유의지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신의 은총에 달려있다는 그의 주장은 후대의 예정설로 발전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도 인정했으며, 이 두 가지 요소의 관계는 중세 전반에 걸쳐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2. 이슬람권 사상가를 통한 아리스토텔레스 전승
서양 철학의 중단과 보존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년) 이후, 서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대부분이 잊혀졌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비잔틴)과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 전통이 보존되고 발전되었다.
이슬람 철학의 발흥
8-9세기 아바스 왕조 시기,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Bayt al-Hikma)을 중심으로 그리스 철학서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슬람 철학자들은 그리스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슬람 신학과 조화시키려 노력했다.
주요 이슬람 철학자들
알-킨디(801-873)
'아랍 철학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킨디는 그리스 철학을 이슬람 세계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철학과 종교의 조화를 추구했으며,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적 탐구를 연결했다.
알-파라비(872-950)
'제2의 교사'(아리스토텔레스가 제1의 교사)로 불렸던 알-파라비는 논리학에 뛰어났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에 주석을 달았다. 그의 『덕성의 도시』는 플라톤의 『국가』에 영향받은 이상 국가론을 제시했다.
이븐 시나(아비센나, 980-1037)
중세 이슬람 철학의 정점을 이룬 이븐 시나는 의학과 철학 모두에서 탁월했다. 그의 주저 『치유의 책』(Kitab al-Shifa)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백과사전적 저작이다.
존재론
이븐 시나는 본질(essence)과 존재(existence)의 구분을 발전시켰다. 신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본질과 존재가 구분되며, 신만이 '존재 자체'라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후대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혼론
그는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하면서도, 개별적 불멸이 아닌 보편적 지성(Active Intellect)과의 합일을 통한 불멸을 설명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신플라톤주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였다.
이븐 루슈드(아베로에스, 1126-1198)
코르도바 출신의 이븐 루슈드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에 충실한 해석을 내리려 노력했으며, 그의 주석서는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유럽 스콜라 철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중진리설
이븐 루슈드는 종종 '이중진리설'의 창시자로 오해받는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철학과 종교 사이의 조화를 추구했으며, 단지 두 영역이 다른 언어와 방법론을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철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 사이의 명백한 모순은 종교적 텍스트의 적절한 해석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고 보았다.
라틴 아베로에주의
이븐 루슈드의 사상은 13세기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라틴 아베로에주의'라는 형태로 발전했다. 시제 브라방(Siger of Brabant) 등이 주도한 이 운동은 종교적 교리보다 철학적 탐구를 우선시하여 교회의 비판을 받았다.
유대 철학과의 교류
이슬람 철학은 유대 철학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마이모니데스(1135-1204)는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유대교 사이의 조화를 추구했으며, 이는 후대 기독교 스콜라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3.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신존재 증명, 스콜라 철학의 체계
스콜라 철학의 발전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은 11-14세기 서유럽 대학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철학 전통이다. '스콜라'라는 명칭은 당시 대학의 교수법에서 유래했으며, 권위 있는 텍스트에 대한 체계적 주석과 논리적 분석을 특징으로 한다.
초기 스콜라 철학
11세기 성 안셀무스(1033-1109)는 『프로슬로기온』에서 '신존재의 존재론적 증명'을 제시했다.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는 신의 정의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이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 근대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중요한 형이상학적 논변이다.
12세기 스콜라 철학
피터 아벨라르(1079-1142)는 논리학과 변증법을 신학적 탐구에 적용했다. 그의 『예, 아니오』(Sic et Non)는 교부들의 상반된 견해들을 대조하며,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논리적 방법론을 제시했다.
대학의 설립
12-13세기에 걸쳐 파리, 옥스퍼드, 볼로냐 등 유럽 각지에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들 대학은 스콜라 철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특히 파리 대학은 신학과 철학 연구의 최고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의 확대
12세기 말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아랍어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본격적으로 번역되었다. 이 '아리스토텔레스 르네상스'는 스콜라 철학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형이상학적 주장들은 기독교 교리와 충돌했고, 1210년과 1215년 파리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부 저작들은 금지되기도 했다.
13세기 스콜라 철학의 황금기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200-1280)
도미니크회 수도사였던 알베르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 저작에 주석을 달았으며, 자연과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의 작업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독교 세계관에 통합하는 길을 열었다.
보나벤투라(1221-1274)
프란체스코회의 보나벤투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에 더 가까웠다. 그는 신비주의적 경향을 보이면서도 이성의 역할을 인정했으며, "신을 향한 정신의 여정"(Itinerarium Mentis in Deum)에서 영혼이 신에게 이르는 과정을 설명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중세 스콜라 철학의 정점을 이룬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크회 수도사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가장 완벽한 통합을 이루어냈다.
주요 저작
- 『이교도들에 대한 변론집』(Summa contra Gentiles): 비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독교 변증서
-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그의 대표작으로, 기독교 신학과 철학의 모든 주요 주제를 체계적으로 다룬 백과사전적 저작
신앙과 이성의 관계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신앙과 이성은 모두 신에게서 온 것이므로 서로 모순될 수 없다. 그러나 일부 신앙의 진리(삼위일체, 성육신 등)는 이성을 초월하며,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존재 증명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섯 가지 방법('Five Ways')을 제시했다:
- 운동의 논증: 세계의 모든 운동은 첫 번째 동자(First Mover)를 필요로 한다.
- 원인의 논증: 원인의 연쇄는 최초 원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 우연성의 논증: 우연적 존재들은 필연적 존재를 전제한다.
- 완전성의 논증: 존재의 단계적 완전성은 최고의 완전자를 가리킨다.
- 목적론적 논증: 자연의 질서와 목적성은 지적 설계자를 암시한다.
이 증명들은 모두 세계의 현상에서 출발하여 신의 존재를 추론하는 후험적(a posteriori) 방법이다.
존재론과 본질-존재 구분
아퀴나스는 이븐 시나의 영향을 받아 모든 피조물에서 본질(essence)과 존재(existence)의 실재적 구분을 주장했다. 신만이 본질과 존재가 일치하는 순수 현실태(Pure Act)이며, 다른 모든 존재는 가능태와 현실태의 혼합체이다.
인식론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지성에 있는 것은 먼저 감각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경험에서 출발하는 인식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는 추상화 과정을 통해 보편적 개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유명론과 실재론 논쟁에서 중도적 입장인 '온건한 실재론'을 취한 것이다.
윤리학
그의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와 기독교적 관점을 결합했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신과의 합일(beatific vision)이며, 이를 위해 자연적 덕(사덕: 지혜, 용기, 절제, 정의)과 신학적 덕(삼덕: 신앙, 소망, 사랑)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법 이론
아퀴나스는 법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 영원법(Eternal Law): 신의 이성 안에 있는 우주 질서의 계획
- 자연법(Natural Law): 인간이 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도덕적 원리
- 인정법(Human Law): 자연법에 기초한 인간 사회의 구체적 법률
- 신법(Divine Law): 성경을 통해 계시된 법
이 중 자연법 이론은 후대 법철학과 자연권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14세기 스콜라 철학의 변화
둔스 스코투스(1266-1308)
프란체스코회의 둔스 스코투스는 아퀴나스와는 다른 방향으로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의지의 우위를 강조했으며, 형이상학에서 '이것임'(haecceitas)이라는 개체화 원리를 제시했다.
윌리엄 오캄(1285-1347)
후기 스콜라 철학의 대표자인 오캄은 유명론(nominalism)을 주장하며 보편 개념의 실재성을 부정했다. "필요 이상으로 존재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는 '오캄의 면도날' 원칙은 형이상학적 실체의 증식을 경계하는 사고방식이다. 그의 사상은 근대 경험론의 선구가 되었다.
4. 중세 철학의 역사적 의의
신앙과 이성의 관계 정립
중세 철학은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하기 위해 믿으라"에서 아퀴나스의 신앙과 이성의 조화, 오캄의 분리론까지 다양한 입장이 제시되었다.
대학의 발전과 학문적 전통
중세의 대학 제도는 현대 학문 체계의 원형이 되었다. 문답법(disputatio), 강의(lectio), 주석 등의 학문적 방법론은 비판적 사고와 체계적 지식 탐구의 전통을 형성했다.
그리스 철학 전통의 보존과 발전
이슬람 철학자들과 스콜라 학자들의 노력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 전통이 보존되고 재해석되었다. 이러한 작업 없이는 르네상스와 근대 철학의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형이상학적 사유의 심화
중세 철학은 존재, 본질, 신, 인간, 영혼, 자유의지 등 형이상학적 주제들에 대한 심오한 사유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사유의 깊이와 체계성은 현대 철학에도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근대 사상에 미친 영향
중세 철학은 흔히 '암흑기'로 잘못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근대 사상의 여러 핵심 개념들—자연법, 인간의 권리, 국가와 교회의 관계, 주권 개념 등—이 중세 사상가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특히 스콜라 철학의 논리적 엄밀성과 체계성은 근대 과학 방법론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동서양 철학의 교류
이슬람 철학을 매개로 한 동서양 사상의 교류는 철학사의 중요한 장이다. 그리스 철학이 시리아, 페르시아, 아랍 세계를 거쳐 다시 서유럽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권의 사상적 기여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