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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역사 기본 7. 헨리 3세와 에드워드 1세, 의회 제도의 형성
헨리 3세와 왕권의 위기
어린 왕의 즉위와 초기 통치
1216년, 9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헨리 3세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긴 통치 기간(56년)을 기록한 왕 중 한 명이다. 그의 아버지 존 왕이 남긴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마그나 카르타 서명에도 불구하고 귀족들과의 갈등은 내전으로 격화되었고, 프랑스 왕세자 루이(후의 루이 8세)가 반란 귀족들의 초청으로 잉글랜드에 상륙한 상태였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교황의 특사이자 영국의 섭정이 된 윌리엄 마샬(William Marshal, 펨브로크 백작)의 역할이 중요했다. 노련한 기사이자 정치가였던 마샬은 마그나 카르타를 수정하여 재공포하고, 1217년 링컨과 샌드위치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쳐 내전을 종식시켰다. 그의 지도력 덕분에 헨리 3세의 왕위는 안정될 수 있었다.
1219년 마샬이 사망한 후에는 허버트 드 버그(Hubert de Burgh)가 섭정 역할을 맡았다. 1227년, 헨리 3세가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했을 때까지 버그는 왕국의 행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프랑스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데 주력했다.
외국인 측근들과 귀족들의 불만
헨리 3세의 통치가 문제를 겪기 시작한 것은 그가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헨리는 프로방스 출신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했고, 그 이후 왕비의 가족들과 사보이 가문의 친척들(헨리의 어머니가 사보이 백작과 재혼)을 궁정으로 불러들였다. 이들 외국인들에게 중요한 직위와 토지를 하사하면서 잉글랜드 귀족들의 불만이 커졌다.
특히 피터 데 리발스(Peter des Rivaux), 피터 드 사보이(Peter of Savoy), 윌리엄 드 발렌스(William de Valence) 등의 외국인 측근들은 헨리의 총애를 받으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잉글랜드 귀족들은 이를 '외국인의 침략'이라고 비난했고, 국가의 부가 외국인들에게 빼앗기고 있다고 여겼다.
또한 헨리 3세는 건축에 대한 열정이 컸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재건축과 같은 거대 프로젝트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했다. 그의 건축 사업은 영국 고딕 건축의 발전에 기여했으나, 재정적으로는 큰 부담이 되었다.
시칠리아 사건과 재정 위기
헨리 3세 통치의 결정적 위기는 '시칠리아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25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는 헨리의 둘째 아들 에드먼드에게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를 제안했다. 이는 교황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인 맨프레드로부터 시칠리아를 빼앗으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헨리는 이 제안을 수락했으나, 교황은 시칠리아 정복을 위한 비용으로 13만 5천 마르크(당시 잉글랜드 왕국 연간 수입의 약 6배)라는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다. 헨리는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무리한 과세를 시도했고, 이는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258년까지 헨리는 교황에게 약속한 비용의 일부도 지불하지 못했고, 교황은 그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재정적 파산 위기에 처한 헨리는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고, 이것이 귀족들이 왕권에 중대한 제한을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몽 드 몽포르와 옥스퍼드 규정
옥스퍼드 규정의 채택
1258년 4월, 헨리 3세는 재정 위기 해결을 위해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단순한 재정 지원 대신 정치 개혁을 요구했다. 그 결과 1258년 6월 옥스퍼드에서 열린 의회에서 '옥스퍼드 규정(Provisions of Oxford)'이 채택되었다.
옥스퍼드 규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5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평의회가 왕을 감독한다.
- 의회는 1년에 세 번 정기적으로 소집되어야 한다.
- 왕실의 주요 관직자(대법관, 재무관 등)는 평의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다.
- 왕의 외국인 측근들을 추방한다.
이 규정은 헨리 3세의 왕권을 심각하게 제한했으며, 이후 1259년 '웨스트민스터 규정(Provisions of Westminster)'을 통해 더욱 확대되었다. 웨스트민스터 규정은 지방 행정과 법원 개혁, 봉건적 의무 완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시몽 드 몽포르의 역할
옥스퍼드 규정 채택의 중심에는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 레스터 백작)가 있었다. 프랑스 출신이었지만 헨리 3세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잉글랜드 귀족이 된 몽포르는 뛰어난 지도력과 정치적 비전을 가진 인물이었다.
몽포르는 초기에는 헨리 3세와 가까운 관계였으나, 점차 왕의 전제적 통치와 재정 낭비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는 가스코뉴(Gascony) 총독으로 일하면서 행정 개혁을 추진했지만, 현지 귀족들의 불만으로 해임되는 등 헨리와 갈등을 겪었다.
옥스퍼드 규정 이후 몽포르는 개혁파 귀족들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단순히 귀족들의 특권을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사계급과 도시 부르주아지의 지지를 얻어 더 폭넓은 정치 참여를 추구했다. 이런 점에서 몽포르는 단순한 반란자가 아닌 정치적 개혁가로 평가받는다.
갈등의 심화와 내전 발발
헨리 3세는 처음에는 옥스퍼드 규정을 수용했지만, 곧 이를 벗어나려 시도했다. 1261년, 그는 교황 알렉산더 4세로부터 옥스퍼드 규정 준수 서약에서 면제받는 교서를 얻어내고, 권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몽포르는 프랑스로 잠시 망명했다가 1263년 봄에 돌아와 개혁파 귀족들을 다시 규합했다. 양측의 대립이 격화되자 프랑스 왕 루이 9세(성 루이)가 중재에 나섰다. 1264년 1월, 그는 '아미앵 재결(Mise of Amiens)'을 통해 옥스퍼드 규정을 무효화하고 헨리 3세의 권한을 회복시키는 판결을 내렸다.
몽포르와 개혁파 귀족들은 이 판결을 거부했고, 결국 내전이 발발했다. 1264년 5월 14일, 몽포르는 루이스(Lewes) 전투에서 헨리 3세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후의 에드워드 1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두 사람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몽포르의 의회와 의회 제도의 발전
1265년 의회와 그 역사적 의의
루이스 전투 이후 몽포르는 사실상 잉글랜드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헨리 3세를 명목상의 왕으로 유지하면서, 자신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몽포르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1265년 1월에 소집한 의회이다.
이 의회의 혁신적인 점은 참가자의 구성이었다. 기존의 의회가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Magnates)만으로 구성된 것과 달리, 몽포르는 각 주(shire)에서 2명의 기사대표와 각 주요 도시(borough)에서 2명의 시민대표를 추가로 소환했다. 이는 영국 의회사에서 최초로 귀족이 아닌 평민 대표들이 국가 의사결정에 참여한 사건으로, 후대 평민원(House of Commons) 형성의 기원으로 평가받는다.
몽포르가 이러한 혁신을 시도한 이유는 다양했다. 우선 그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넓히고자 했다. 귀족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헨리 3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몽포르는 기사계급과 도시민들의 지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그는 정치 참여의 확대가 더 안정적인 통치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몽포르의 패배와 죽음
그러나 몽포르의 통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포로 상태에 있던 에드워드 왕자가 1265년 5월 탈출에 성공했고, 이후 로저 모티머(Roger Mortimer)와 길버트 드 클레어(Gilbert de Clare, 글로스터 백작) 등 몽포르에게 등을 돌린 귀족들과 연합하여 반격에 나섰다.
1265년 8월 4일, 이븜(Evesham) 전투에서 몽포르는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에 의해 패배했고, 전장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무참히 훼손되어 각 부위가 잉글랜드 곳곳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몽포르를 따르던 많은 귀족들은 토지를 몰수당하고 '디스인헤리티드(Disinherited, 상속권 박탈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몽포르의 죽음으로 개혁 운동은 일시적으로 좌절되었지만, 그의 정치적 유산은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의회에 평민 대표를 소환한 그의 혁신은 후대 영국 의회 발전에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켄워스 재결과 내전의 종식
내전 종식을 위해 교황 특사 오토보노는 중재에 나섰고, 1266년 10월 '켄워스 재결(Dictum of Kenilworth)'이 발표되었다. 이는 반란자들에게 일정 금액(보통 토지 가치의 5년치)을 지불하고 토지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일부 극단적인 반란자들은 이 조건을 거부하고 이스트 앵글리아의 일리 섬(Isle of Ely)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최종적으로 내전이 완전히 종식된 것은 1267년 7월, '몽고메리 평화 조약(Montgomery Peace Treaty)'이 체결되고 헨리 3세가 마지막 반란자들에게 사면을 베풀면서였다.
1267년 말레버그 법령(Statute of Marlborough)은 웨스트민스터 규정의 일부 개혁안을 법제화했는데, 이는 내전 이후에도 몽포르의 개혁 정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에드워드 1세와 제도적 혁신
에드워드 1세의 즉위와 초기 정책
1272년 11월 16일, 헨리 3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1세가 즉위했다. 당시 에드워드는 제9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 중이었기 때문에, 1274년 8월 19일에야 귀국하여 정식 대관식을 올렸다.
에드워드 1세는 강력하고 능력 있는 통치자였다. 그는 신장이 6피트 2인치(약 188cm)로 매우 큰 체격을 가졌기 때문에 '롱생크스(Longshanks, 긴 다리)'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또한 그의 법 제정 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에 '잉글리쉬 저스티니안(English Justinian)'이라고도 불렸다.
에드워드는 즉위 초기부터 왕국의 상태를 파악하고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1274년, 그는 '백 롤 조사(Hundred Rolls Inquiry)'라는 대규모 조사를 실시했다. 이는 윌리엄 1세의 '둠스데이 북(Domesday Book)'에 버금가는 규모의 조사로, 토지 소유 현황, 지방 관리들의 권한 남용, 왕실 재산의 침해 등을 조사했다.
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에드워드는 법제도와 행정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부패한 관리들을 숙청하고, 왕실 재산 관리를 강화했으며, 일련의 중요한 법령을 제정했다.
중요 법령과 법제도의 발전
에드워드 1세 시기에 제정된 주요 법령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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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웨스트민스터 법령(First Statute of Westminster, 1275): 에드워드의 첫 번째 주요 법령으로, 사법 행정, 무역, 범죄 처벌 등 다양한 분야를 규정했다. 특히 지방 관리들의 권한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조항들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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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 엠프토레스(Quo Emptores, 1290): 이 법령은 토지 양도와 관련된 규정으로, 봉건적 토지 체계를 안정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토지를 매매할 경우 새 소유자는 원래 영주에게 봉건적 의무를 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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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법(Statute of Merchants, 1285): 상업 거래와 부채 회수에 관한 법령으로, 채무자가 빚을 갚지 않을 경우 채권자가 채무자의 재산을 압류할 수 있게 했다. 이는 상업 발전을 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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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체스터 법령(Statute of Winchester, 1285): 지역 사회의 치안 유지를 위한 법령으로, 모든 마을은 야간 순찰대를 조직해야 하며, 범죄가 발생하면 '휴 앤드 크라이(hue and cry, 추격령)'를 발동하여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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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웨스트민스터 법령(Second Statute of Westminster, 1285): 부동산 상속과 관련된 '드 도니스(De Donis)' 조항을 포함하여 다양한 법적 개혁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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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트메인 법령(Statute of Mortmain, 1279): 교회의 토지 취득을 제한하는 법령으로, 교회나 수도원에 토지를 기부할 때 왕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이는 교회가 세금을 내지 않는 '죽은 손(mortmain)'에 토지가 너무 많이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에드워드 1세는 또한 유대인 정책에 있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초기에는 유대인들에게 고리대금업 대신 일반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할 것을 장려했으나, 1290년에는 결국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약 2,000명의 유대인들이 잉글랜드를 떠나야 했고, 이들이 다시 합법적으로 잉글랜드에 정착하게 된 것은 360년 후인 올리버 크롬웰 시대였다.
영토 확장과 통일 정책
웨일즈 정복
에드워드 1세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성과 중 하나는 웨일즈 정복이었다. 웨일즈는 오랫동안 잉글랜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을 유지하려 했던 지역이다.
1276년, 웨일즈의 군주 루웰린 아프 그리피드(Llywelyn ap Gruffudd)가 에드워드 1세에게 봉신 서약을 거부하자 에드워드는 이를 명분으로 원정을 시작했다. 1277년, 첫 번째 전쟁에서 에드워드는 승리를 거두었고 루웰린은 굴복하여 트리티 오브 어버콘웨이(Treaty of Aberconwy)를 체결했다.
그러나 1282년, 루웰린의 동생 다비드(Dafydd)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2차 웨일즈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루웰린은 사망했고, 다비드는 1283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로써 웨일즈의 독립은 종말을 고했다.
에드워드는 웨일즈를 완전히 정복한 후, 이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철의 고리(Iron Ring)'라 불리는 성채 네트워크를 건설했다. 콘웨이(Conwy), 카나번(Caernarfon), 하를레크(Harlech), 보마리스(Beaumaris) 등의 성은 당대 최첨단 요새로, 오늘날까지도 웨일즈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남아있다.
1284년, '루들란 법령(Statute of Rhuddlan)'을 통해 에드워드는 웨일즈를 잉글랜드 왕국에 통합했다. 이 법령은 웨일즈에 잉글랜드식 행정·사법 제도를 도입했지만, 일부 웨일즈 관습법도 인정했다. 또한 1301년, 그는 자신의 아들(후의 에드워드 2세)에게 '웨일즈의 왕자(Prince of Wales)' 칭호를 부여했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영국 왕위 계승자의 전통적인 칭호로 이어지고 있다.
스코틀랜드 문제와 전쟁
에드워드 1세는 또한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려 했다. 1286년,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3세가 사망하고 그의 외손녀인 노르웨이의 마가렛(일명 '노르웨이의 소녀')이 계승자가 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마가렛과 자신의 아들 사이의 혼인을 추진했으나, 1290년 마가렛이 스코틀랜드로 오는 도중 사망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마가렛의 죽음으로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고, 여러 후보자들이 경쟁했다. 에드워드 1세는 중재자로 나서서 계승 분쟁을 해결하기로 했으나, 그 대가로 스코틀랜드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했다.
1292년, 에드워드는 존 베일리얼(John Balliol)을 스코틀랜드의 새 왕으로 선택했다. 베일리얼은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에드워드가 스코틀랜드 내정에 지나치게 간섭하자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반발했다. 1295년, 베일리얼은 프랑스와 '옛 동맹(Auld Alliance)'을 맺고 에드워드에 대항했다.
이에 격분한 에드워드는 1296년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단시에 정복하고, 베일리얼을 폐위시켰다. 그는 스코틀랜드 왕들의 대관식에 사용되던 '스콘의 돌(Stone of Scone)' 또는 '운명의 돌(Stone of Destiny)'을 빼앗아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가져갔다. 이 돌은 이후 700년 동안 잉글랜드 왕들의 대관식에 사용되었다(1996년에야 스코틀랜드로 반환됨).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1297년, 윌리엄 월러스(William Wallace)가 이끄는 반란군은 스털링 다리(Stirling Bridge)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했다. 에드워드는 1298년 팰커크(Falkirk) 전투에서 월러스를 물리쳤지만,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
월러스는 1305년 체포되어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나, 로버트 브루스(Robert Bruce)가 새로운 저항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1306년, 브루스는 스코틀랜드 왕(로버트 1세)으로 즉위하고 잉글랜드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에드워드 1세는 1307년, 마지막 스코틀랜드 원정 중에 병으로 사망했다. 죽기 전 그는 자신의 뼈를 끓여 그 유골을 군대 앞에 들고 가라고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2세는 이 명령을 무시하고 아버지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었다. 에드워드 1세의 사망으로 스코틀랜드 정복 계획은 미완의 과업으로 남았다.
모범 의회와 입헌주의의 진전
재정 확보와 의회 소집
에드워드 1세의 웨일즈·스코틀랜드 정복 전쟁과 프랑스와의 갈등은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했다. 그는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관세 인상, 강제 차관(forced loan), 유대인 과세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재원은 의회의 동의를 얻어 징수하는 세금이었다.
에드워드는 재정 확보를 위해 자주 의회를 소집했다. 1275년부터 1307년까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약 46회의 의회가 소집되었는데, 이는 평균적으로 8개월마다 한 번꼴이었다. 이러한 빈번한 의회 소집은 결과적으로 의회 제도의 발전과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에드워드가 세금 징수를 위해 의회의 동의를 구했다는 점이다. "모두에게 관련된 일은 모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What touches all should be approved by all)"라는 로마법 원칙을 그는 실제 정치에 적용했다. 이는 왕이 일방적으로 과세할 수 없으며, 국민의 대표기구인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원칙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모범 의회(Model Parliament)와 그 구성
에드워드 1세의 의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295년 11월에 소집된 '모범 의회(Model Parliament)'이다. 이 이름은 18세기 역사가들이 붙인 것으로, 이 의회가 영국 의회제도의 모델이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모범 의회의 특징은 그 구성원의 다양성이었다. 참석자는 다음과 같았다:
-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 고위 성직자
- 백작, 남작 등 귀족
- 각 주(shire)에서 선출된 2명의 기사
- 각 시(city)와 자치도시(borough)에서 선출된 2명의 시민
- 하급 성직자 대표들
이러한 구성은 시몽 드 몽포르가 1265년 소집한 의회의 선례를 따른 것이지만, 더욱 체계적이고 포괄적이었다. 특히 "무엇이 모두에게 관련되는가는 모두가 승인해야 한다"라는 소집장의 문구는 의회의 대표성을 강조했다.
모범 의회는 프랑스와의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에드워드는 고위 성직자와 귀족에게는 1/10세, 일반인에게는 1/6세의 세금을 요구했다. 의회는 이 요구를 수용했지만, 이후의 과세에 대해서는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원칙이 점차 확립되었다.
의회의 양원제 발전
에드워드 1세 시기에 의회는 점차 두 개의 원(House)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명확한 분리 시점은 불분명하지만, 14세기 초반까지는 상원(House of Lords)과 하원(House of Commons)의 구분이 뚜렷해졌다.
상원은 귀족(Lords Temporal)과 고위 성직자(Lords Spiritual)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국왕이 개별적으로 소집장을 보내 참석을 요청받는 특권층이었다. 상원은 왕의 자문 기구이자 최고 법원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하원은 기사와 시민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단순히 세금 동의를 위해 소집되었지만, 점차 청원을 통해 입법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하원 의원들은 자신의 지역구 주민들을 대표하여 그들의 불만을 전달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양원제의 발전은 영국 의회 제도의 특징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당시의 의회는 현대적 의미의 입법부와는 달랐다. 입법권은 여전히 왕에게 있었고, 의회는 주로 왕에게 조언을 제공하고 세금에 동의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 시기의 의회는 국정에서 더 큰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영국 입헌주의 발전의 중요한 단계였다.
에드워드 1세의 통치 말기와 위기
제국적 야망과 현실적 한계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그리고 프랑스 내 영토(가스코뉴)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꿈꿨다. 그러나 이러한 제국적 야망은 현실적 한계에 부딪혔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끈질긴 저항과 프랑스와의 갈등은 그의 제국 건설을 어렵게 했다.
1294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가스코뉴를 몰수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에드워드는 네덜란드, 독일 등 다른 유럽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압박하려 했으나, 이는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했다.
동시에 웨일즈에서는 1294-95년에 마두그 아프 루웰린(Madog ap Llywelyn)이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계속해서 저항이 이어졌다. 이러한 다중 전선은 에드워드의 군사력과 재정을 크게 압박했다.
귀족들과의 갈등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워드는 더 많은 세금을 필요로 했고, 이는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1297년, 에드워드가 프랑스 원정을 위해 추가 세금을 요구하자 귀족들이 반발했다. 특히 노퍽 백작(Earl of Norfolk)과 헤리퍼드 백작(Earl of Hereford)이 이끄는 귀족들은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에 저항했다.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에드워드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1297년 '삼림 헌장 확인(Confirmatio Cartarum)'을 통해 그는 마그나 카르타와 삼림 헌장을 재확인하고, 의회의 동의 없이는 과세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동의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라는 영국 헌정주의의 중요한 원칙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나중에 교황으로부터 이 약속에서 면제받는 교서를 얻어내는 등 약속을 회피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러한 행동은 귀족들의 불신을 샀지만, 전반적으로 그의 통치 말기에는 귀족들과의 관계가 안정을 되찾았다.
에드워드 1세의 사망과 유산
1307년 7월 7일,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원정 도중 솔웨이 피어스(Solway Firth) 근처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으로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배권 확립 계획은 중단되었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의 유지를 계승하지 못했다.
에드워드 1세의 통치는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법제도를 정비하고, 행정을 효율화했으며, 웨일즈를 정복하여 영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의 '모범 의회'는 영국 의회제도 발전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특히 에드워드 시기에 확립된 몇 가지 중요한 원칙들은 영국 헌정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동의 없이 과세 없다"는 원칙과 의회의 역할 강화는 후대 영국의 정치 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물론 에드워드 1세의 통치가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제국주의적 야망은 지속적인 전쟁과 재정 위기를 초래했고, 스코틀랜드에 대한 강경책은 양국 간 장기적인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또한 1290년 유대인 추방령과 같은 일부 정책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비판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1세는 중세 영국의 가장 중요한 왕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통치는 영국이 중세 봉건국가에서 근대 국민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의 중요한 단계였다.
헨리 3세와 에드워드 1세 시대의 사회와 문화
사회 변화와 도시의 발전
13세기 영국 사회는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가 발전하며, 상업이 활성화되었다. 런던은 이미 2-3만 명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였으며, 요크, 브리스톨, 노리치 등도 중요한 도시로 성장했다.
도시의 발전과 함께 길드(Guild) 조직도 발달했다. 길드는 특정 직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연합체로, 회원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품질을 관리했다. 상인 길드(Merchant Guild)와 수공업 길드(Craft Guild)가 대표적이었다.
농촌에서는 장원(Manor) 체제가 여전히 주된 사회 구조였지만, 점차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농노(Villein)들 중 일부는 자유를 얻거나 도시로 이주했으며, 현금 지대(cash rent)가 노동 의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종교와 교육
종교는 여전히 사회의 중심 축이었다. 교회는 영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병원, 빈민 구제소, 학교 등을 운영하며 사회 서비스도 제공했다. 이 시기에는 또한 프란체스코회, 도미니크회 등 탁발 수도회(Mendicant Orders)가 영국에 도입되어 도시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교육 분야에서는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1209년에 옥스퍼드 대학교가, 1231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들 대학은 파리, 볼로냐 등 유럽 대륙의 대학들과 교류하며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법학, 의학, 신학 등의 분야에서 학문적 성과가 나타났으며, 로버트 그로스테스트(Robert Grosseteste), 로저 베이컨(Roger Bacon) 등 저명한 학자들이 활동했다. 특히 베이컨은 과학적 방법론의 중요성을 강조한 선구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건축과 예술
이 시기 영국에서는 고딕 건축이 크게 발전했다. 헨리 3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을 재건축하는 데 많은 자원을 투입했으며, 이는 영국 고딕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솔즈베리 대성당(Salisbury Cathedral), 링컨 대성당(Lincoln Cathedral) 등도 이 시기에 건설된 중요한 고딕 건축물이다. 특히 솔즈베리 대성당은 영국 고딕 양식의 특징인 '장식적 고딕(Decorated Gothic)' 스타일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에드워드 1세 시기에는 웨일즈 정복을 위한 성(Castle) 건축이 활발했다. 콘웨이, 카나번, 하를레크, 보마리스 등의 성은 당대 군사 건축의 최고 기술을 보여주며, 오늘날에도 웨일즈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남아있다.
예술 분야에서는 필사본 삽화(Manuscript illumination)가 발달했다. 이 시기의 필사본들은 정교한 채색과 섬세한 그림으로 장식되었으며, 중세 영국 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또한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 기술도 발전하여 대성당의 창문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헨리 3세와 에드워드 1세 시대의 역사적 의의
이 시기는 영국 헌정사에서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진 때였다. 헨리 3세 시기의 정치적 갈등은 시몽 드 몽포르의 개혁으로 이어졌고, 에드워드 1세의 '모범 의회'는 영국 의회 제도의 기초를 다졌다. 특히 "동의 없이 과세 없다"는 원칙은 이후 영국 정치의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영국의 영토적 통합이 진전된 때이기도 했다. 에드워드 1세의 웨일즈 정복으로 웨일즈는 잉글랜드에 편입되었고, 비록 스코틀랜드 정복은 실패했지만 브리튼 섬 내에서 잉글랜드의 패권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법과 제도 면에서도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에드워드 1세의 다양한 법령들은 영국 법체계를 정비하고 체계화했으며, 이는 영국 커먼로(Common Law)의 발전에 기여했다.
결론적으로, 헨리 3세와 에드워드 1세 시대는 영국이 중세 봉건국가에서 근대적 국민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정치 제도와 법체계의 많은 부분이 오늘날까지 영국의 정치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의회 제도의 발전은 영국이 후에 입헌 민주주의의 선구자가 되는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