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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 개론 5. 제도주의(Institutionalism)와 신제도주의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국에서 형성된 경제사상으로, 신고전학파의 추상적·연역적 방법론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다. 제도주의자들은 경제행위가 사회적·역사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제도에 의해 형성되고 제약된다고 주장했다. 이번 강의에서는 구(舊)제도주의의 발전과 1970년대 이후 등장한 신제도주의의 주요 개념과 이론을 살펴본다.
제도주의의 등장 배경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국은 급속한 산업화, 독점기업의 등장, 노동문제의 심화, 소득불평등 증가 등 격변의 시기를 겪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제도주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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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학파의 한계: 합리적 개인과 완전경쟁시장 가정에 기초한 신고전학파 이론은 독점과 불평등이 심화되는 당시 현실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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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진화론 영향: 생물학적 진화론이 사회과학에 영향을 미치면서, 제도와 경제체제도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한다는 관점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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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역사학파의 영향: 역사적·귀납적 방법을 강조한 독일 역사학파의 영향으로, 추상적 이론보다 역사적 관찰과 구체적 맥락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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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그머티즘 철학의 영향: 존 듀이(John Dewey),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등 미국 프래그머티즘 철학자들의 실용주의적 접근법이 경제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초기 제도주의의 주요 인물과 개념
1. 소스턴 베블런(Thorstein Veblen, 1857-1929)
제도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베블런은 경제행위를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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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의 정의: 베블런은 제도를 "널리 퍼진 사고습관(widely prevalent habits of thought)"으로 정의하며, 경제행위자의 선호와 행동이 사회적 규범과 관습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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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1899)에서 베블런은 상류계급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비생산적이고 낭비적인 소비를 한다고 분석했다. 이는 '효용 극대화'라는 신고전학파의 단순한 가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소비행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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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제도의 이중성: 베블런은 진보적·혁신적 성격의 '기술(technology)'과 보수적·관성적 성격의 '제도(institution)' 사이의 긴장관계를 분석했다. 산업의 기술적 발전은 사회변화를 추동하지만, 기존 제도와 기득권은 이를 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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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과 영리의 이분법: 베블런은 생산적 '산업(industry)'과 투기적 '영리(business)'를 구분했다. 엔지니어와 같은 산업적 기술자들은 실용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반면, 금융가와 같은 영리적 인물들은 금전적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2. 존 R. 커먼스(John R. Commons, 1862-1945)
커먼스는 경제학에 법적·제도적 분석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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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행동(collective action): 커먼스는 경제활동이 개인행동이 아닌 '집합행동'이라고 주장했다. 개인은 항상 다양한 집단(노동조합, 기업, 정당 등)의 일원으로서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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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transaction): 신고전학파가 '상품 교환'에 초점을 맞췄다면, 커먼스는 '거래'를 경제분석의 기본 단위로 삼았다. 거래는 항상 법적 권리와 의무의 이전을 수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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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자본주의(reasonable capitalism): 커먼스는 노동-자본 갈등을 제도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노사관계법, 공공규제, 사회보장제도 등을 통해 자본주의를 개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3. 웨슬리 클레어 미첼(Wesley Clair Mitchell, 1874-1948)
미첼은 경제통계와 경기순환 연구에 제도적 접근법을 적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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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순환 연구: 미첼은 《경기순환(Business Cycles)》(1913)에서 경기변동을 화폐경제의 제도적 특성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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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적 방법론: 미첼은 국가경제연구소(NBER)를 설립하고 경제통계의 체계적 수집과 분석을 주도했다. 이는 추상적 이론보다 실증적 관찰을 중시하는 제도주의 방법론을 반영한다.
구제도주의의 쇠퇴와 신제도주의의 등장
1930-40년대 이후 구제도주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주류 경제학에서 주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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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체계성 부족: 제도주의는 풍부한 통찰을 제공했으나, 신고전학파나 케인즈주의처럼 체계적인 이론 틀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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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주의의 부상: 대공황에 대응한 케인즈의 거시경제학이 정책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제도주의의 입지가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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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량경제학의 발전: 수학적·통계적 방법이 경제학의 주류가 되면서, 역사적·제도적 접근법은 '비과학적'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신고전학파의 현실 설명력에 대한 회의가 커지면서, 제도의 중요성을 새롭게 강조하는 '신제도주의(New Institutionalism)'가 등장했다. 신제도주의는 구제도주의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도, 더 체계적인 이론과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신제도주의의 주요 유형과 개념
신제도주의는 크게 세 가지 접근법으로 나눌 수 있다:
1. 거래비용 경제학: 윌리엄슨과 코스
로널드 코스(Ronald Coase)와 올리버 윌리엄슨(Oliver Williamson)은 기업과 시장의 제도적 구조를 거래비용 관점에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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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의 기업이론: 코스는 《기업의 본질(The Nature of the Firm)》(1937)에서 왜 시장경제에서 '기업'이라는 위계적 조직이 존재하는지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시장 거래에는 정보 수집, 계약 협상, 이행 감시 등의 '거래비용'이 발생하며, 이 비용이 클 경우 거래를 기업 내부로 내재화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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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슨의 거래비용 경제학: 윌리엄슨은 《시장과 위계(Markets and Hierarchies)》(1975)에서 거래의 특성(자산 특정성, 불확실성, 빈도)에 따라 최적의 거버넌스 구조(시장, 위계, 하이브리드)가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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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의 불완전성: 거래비용 경제학은 현실의 계약이 항상 불완전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명시하는 '완전계약'은 불가능하므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거버넌스 메커니즘이 중요하다.
2. 경로의존성과 제도변화: 더글러스 노스
더글러스 노스(Douglass North)는 경제사와 제도변화의 역학을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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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의 정의: 노스는 제도를 "사회의 게임의 규칙, 또는 인간이 고안한 제약"으로 정의했다. 제도는 공식적 제도(법률, 규칙)와 비공식적 제도(규범, 관습)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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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비용과 제도: 노스는 제도의 주요 기능이 거래비용을 감소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효율적인 제도는 경제적 교환을 촉진하고 불확실성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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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 노스는 제도변화가 '경로의존적'이라고 주장했다. 과거에 형성된 제도는 후속 발전 경로를 제약하며, 비효율적 제도도 고착화될 수 있다. 이는 왜 국가마다 경제발전 경로가 다른지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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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변화의 동학: 노스는 제도변화가 상대가격 변화, 선호 변화, 이데올로기 변화 등에 의해 추동되지만, 기존 제도에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의 저항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3. 합리적 선택 제도주의
합리적 선택 제도주의는의회정치, 관료제, 국제관계 등 다양한 정치현상을 제도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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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와 개인 선택: 제도는 개인의 선택지와 전략적 상호작용의 구조를 형성함으로써 정치적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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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행동 문제와 제도: 매클린 올슨(Mancur Olson)은 《집합행동의 논리(The Logic of Collective Action)》(1965)에서 합리적 개인이 공공재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무임승차' 문제를 분석했다. 이러한 집합행동 문제는 적절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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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제도의 분석: 선거제도, 의회규칙, 정당구조 등 정치제도가 정책결정과 정치행위자의 전략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비교제도분석과 자본주의 다양성
제도주의적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단일한 모델이 아니라 다양한 제도적 배열의 조합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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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 피터 홀(Peter Hall)과 데이비드 소스키스(David Soskice)는 《자본주의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2001)에서 자유시장경제(LME)와 조정시장경제(CME)라는 두 가지 이념형을 제시했다. 미국과 영국 같은 LME는 시장 메커니즘과 경쟁에 의존하는 반면, 독일과 일본 같은 CME는 기업 간 조정과 장기적 관계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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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 상보성: 자본주의 체제의 다양한 요소(금융시스템, 노사관계, 복지국가, 교육훈련 등)는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한다. 하나의 제도를 변화시키려면 연관된 제도들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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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제도 우위: 각 국가는 자신의 제도적 구조에 부합하는 경제활동에 비교우위를 갖는다. LME는 급진적 혁신에, CME는 점진적 혁신과 고품질 제조업에 우위를 가진다.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의 현대적 의의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은 현대 경제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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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발전의 제도적 기반: 아세모글루(Daron Acemoglu)와 로빈슨(James Robinson)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2012)에서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가 장기적 경제발전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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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국가 역할: 제도주의는 세계화 시대에도 국민국가의 제도적 차이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본다. 세계화에 대한 대응도 각국의 제도적 맥락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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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와 제도적 취약성: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금융규제와 감독 제도의 실패로 이해될 수 있다. 제도주의는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이 적절한 제도적 틀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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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제와 공유재의 관리: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공유의 비극을 넘어(Governing the Commons)》(1990)에서 공유자원 관리를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분석했다. 이는 기후변화와 환경문제 해결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과 한계
제도주의 접근법에 대한 몇 가지 비판과 한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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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모호성: '제도'라는 개념이 때로는 너무 포괄적이어서 분석적 명확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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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관계의 복잡성: 제도와 경제성과 간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밝히기 어렵다. 제도가 경제성과를 결정하는지, 역으로 경제발전이 제도 발전을 이끄는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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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론적 다양성: 제도주의 내에 다양한 방법론적 접근이 공존하여 통합된 이론 체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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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관계 간과: 일부 신제도주의 접근법은 제도를 효율성 관점에서만 분석하여, 제도 형성과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관계와 계급갈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은 경제현상을 더 넓은 사회적·역사적·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로, 신고전학파의 추상적 모델을 보완하는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다음 강의에서는 20세기 거시경제정책의 두 대립적 패러다임인 케인즈주의와 통화주의를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