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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사 기본 24. 시라크·사르코지·올랑드 시대(1995~2017)
시라크의 첫 임기(1995-2002): 개혁 시도와 동거정부
1995년 5월 7일, 자크 시라크가 사회당 후보 리오넬 조스팽을 이기고(52.6% 대 47.4%) 제5공화정의 다섯 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드골주의자이면서도 "사회적 균열"(fracture sociale) 치유를 공약으로 내세운 시라크는 알랭 쥐페를 총리로 임명하고 개혁 정책을 추진한다.
초기 시라크 정부는 공공부문 개혁과 사회보장제도 정비에 중점을 둔다. 특히 쥐페 총리가 제안한 연금 및 사회보장 개혁안(쥐페 플랜)은 재정 안정화를 위해 공공부문 특혜를 축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1995년 11-12월 대규모 파업과 시위를 촉발한다. 철도, 지하철, 우체국 등 공공부문이 마비되고, 정부는 결국 개혁안 철회를 선언한다.
이 실패 이후 정부는 더 조심스러운 접근을 취한다. 1996년 국가채무 감축, 유로화 도입 준비, 35시간 노동제 점진적 도입 등의 정책을 추진하지만, 실업 문제(11% 이상)와 경기 침체는 계속된다.
1997년 4월, 시라크는 유로화 도입을 앞두고 의회 다수파를 확보하기 위해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사회당이 이끄는 좌파 연합(좌파다수파연합)이 승리하면서, 시라크는 라이벌 리오넬 조스팽을 총리로 임명해야 했다.
1997-2002년 세 번째 동거정부(cohabitation) 시기, 시라크는 외교·국방 분야에 집중하고 국내 정책은 조스팽 정부에 맡긴다. 조스팽 정부는 35시간 노동제 전면 도입, 보편적 의료보험(CMU) 확대, 청년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 등 좌파 정책을 추진한다. 이 시기 프랑스 경제는 회복세를 보이고 실업률도 감소한다.
외교 분야에서 시라크는 유럽 통합을 지지하면서도 프랑스의 독자적 입장을 유지한다. 1995년 핵실험 재개 결정으로 국제적 비난을 받지만, 1996년 핵실험 영구 중단을 선언한다. 이후 발칸 위기, 중동 문제 등에서 활발한 외교를 펼치며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를 모색한다.
국내적으로는 식민지 과거사 문제와 코르시카 자치 문제가 중요한 쟁점이 된다. 1995년 알제리 전쟁 중 프랑스군의 민간인 학살(1961년 파리)에 대한 공식 인정, 1999년 코르시카에 더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는 마티뇽 협정 등이 이루어진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은 성공적인 다문화 사회 통합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이민, 통합, 정체성 문제를 둘러싼 긴장이 계속된다. 특히 1999년 평등결혼법(PACS) 도입은 가족과 결혼에 관한 사회적 담론에 변화를 가져온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테러 이후 국제 정세가 변화하는 가운데, 프랑스는 아프가니스탄 개입에는 참여하지만 독자적인 대테러 정책을 추구한다. 이는 이후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과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시라크의 두 번째 임기(2002-2007): 이라크 전쟁 반대와 국내 개혁 침체
2002년 대통령 선거는 극우 민족전선(FN)의 장-마리 르펜이 결선에 진출하며 충격을 준다. 1차 투표에서 조스팽(16.2%)을 앞선 르펜(16.9%)은 시라크(19.9%)와 결선에 진출한다. 2차 투표에서는 좌파 유권자들도 "파시즘 저지"를 위해 시라크를 지지하면서, 시라크는 82.2%라는 전례 없는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다.
재선 이후 시라크는 쟝-피에르 라파랭을 총리로 임명하고 보수 정책을 추진한다. 범죄와의 전쟁, 연금 개혁, 지방분권화 촉진, 의료보험 개혁 등이 주요 정책으로 제시된다. 2003년 연금 개혁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어, 민간과 공공부문 간 형평성을 높이고 재정 부담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국제적 결정은 이라크 전쟁 반대였다. 2003년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이라크 침공에 프랑스는 강력히 반대하며,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 행사를 경고한다. 외무장관 도미니크 드 빌팽의 유엔 연설은 국제적 주목을 받으며, 프랑스의 독자적 외교 노선을 상징한다. 이로 인해 미국과의 관계가 냉각되고 "자유 감자튀김"(Freedom Fries) 같은 반프랑스 감정이 미국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유럽 통합과 관련해서는 혼합된 결과를 경험한다. 2004년 EU 확대(동유럽 10개국 가입)를 지지하지만, 2005년 5월 29일 실시된 유럽헌법조약(TCE) 국민투표에서 프랑스 국민은 이를 거부한다(반대 54.7%). 이는 시라크에게 큰 정치적 타격이며, EU 통합 과정에도 중대한 차질을 가져온다.
국내적으로는 2005년 10-11월 파리 교외 폭동이 중요한 위기였다. 경찰의 추격 중 사망한 아프리카계 청소년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폭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3주 동안 지속된다. 9,000대 이상의 차량이 방화되고, 비상사태가 선포되는 등 이민자 2-3세대의 사회적 소외와 차별 문제가 극적으로 드러난다.
2006년 초, 청년 고용촉진을 위한 "최초고용계약"(CPE) 도입이 대규모 학생과 노동자 시위에 부딪혀 철회된다. 이는 라파랭 총리의 사임으로 이어지고, 도미니크 드 빌팽이 새 총리로 임명된다.
시라크의 두 번째 임기는 점차 활력을 잃어간다. 건강 문제(2005년 뇌졸중)와 지지율 하락으로 리더십이 약화되고, 내무장관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가 점차 주도권을 장악한다. 2007년 3월, 시라크는 3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 은퇴를 준비한다.
사르코지 시대(2007-2012): 과감한 개혁과 경제위기
2007년 5월 6일, 니콜라 사르코지가 사회당 후보 세골렌 루아얄을 이기고(53.1% 대 46.9%) 대통령에 당선된다. "단절"(rupture)을 핵심 슬로건으로 내세운 사르코지는 프랑스 정치와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약속한다.
취임 직후 사르코지는 프랑수아 피용을 총리로 임명하고 신속한 개혁을 추진한다. 주요 공공부문 파업권 제한, 대학 자율성 확대, 특별퇴직제도 축소, 노동시장 유연화, 소득세 감면, 35시간 노동제 완화 등 개혁 조치들이 빠르게 이어진다.
외교 정책에서도 변화가 두드러진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 추진하여 2009년 프랑스의 NATO 군사기구 완전 복귀를 결정한다. 유럽 통합에서는 독일 메르켈 총리와 협력하여 리스본 조약(2007년)을 추진하고, 지중해연합(UPM) 창설을 주도한다.
그러나 사르코지의 개혁 추진력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크게 제약받는다. 프랑스 경제는 2009년 2.9% 수축하고, 실업률이 급증한다. 정부는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실시하고 유럽 차원의 위기 대응에 참여하지만, 이로 인해 재정적자와 공공부채가 급격히 증가한다.
2010-2011년에는 그리스를 시작으로 유로존 위기가 확산된다. 사르코지는 메르켈과 함께 위기 대응의 중심 역할을 하며, 유럽재정안정기금(EFSF)과 유럽안정화기구(ESM) 설립, 재정협약 체결 등을 주도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긴축 정책 중심의 접근은 많은 비판을 받는다.
국내적으로는 2010년 연금 개혁(정년 62세로 연장)이 대규모 시위와 파업에 직면하지만 최종 통과된다. 2008년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제한(이미 2000년 국민투표로 결정된 사항)하고, 대통령의 연속 재임을 2회로 제한하는 등 제도적 개혁도 이루어진다.
사르코지의 통치 스타일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초대통령제"(hyperprésidence)라 불리는 그의 적극적이고 때로는 과시적인 리더십은 기존 정치 관행과 차별화되었지만, 언론과의 갈등, 사생활 노출, 부적절한 언행 등으로 비판도 받는다.
이민과 국가 정체성 문제에 있어 사르코지는 강경한 입장을 취한다. 2007년 이민통합국가정체성부를 신설하고, 불법 이민 단속을 강화하며, 부르카 금지법(2010년)을 도입한다. 이는 지지층 결집에는 효과적이었으나, 사회 통합과 다문화주의 측면에서 논란을 일으킨다.
2011년 프랑스는 리비아 개입(카다피 정권 축출)을 주도하며 국제무대에서 적극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아랍의 봄" 이후 중동·북아프리카 정세 불안정과 테러 위협 증가는 새로운 안보 도전이 된다.
2012년 대선에서 사르코지는 경제 위기와 개인적 비호감도 문제로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패배한다(48.4% 대 51.6%). 그의 임기는 과감한 개혁 시도와 글로벌 위기 대응으로 특징지어지지만, 사회 분열과 경제적 어려움도 함께 남긴다.
올랑드 시대(2012-2017): "정상적" 대통령과 안보 위기
2012년 5월 6일,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가 현직 대통령 사르코지를 물리치고 제5공화정 역사상 두 번째 좌파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변화, 지금이다"(Le changement, c'est maintenant)라는 슬로건과 "정상적 대통령"(président normal)이 되겠다는 약속으로 사르코지의 과시적 스타일과 차별화를 시도한다.
올랑드는 장-마르크 에로를 총리로 임명하고 좌파 정책을 추진한다. 최고소득세율 75% 인상, 대기업과 은행에 대한 규제 강화, 퇴직 연령 62→60세 하향(일부 집단), 동성결혼 합법화, 학교 개혁 등이 초기 주요 정책이었다.
그러나 경제 상황은 계속 어려웠다. 1% 이하의 저성장, 10% 이상의 실업률, 증가하는 재정적자와 공공부채는 정부의 정책 옵션을 제한했다. 2014년 1월, 올랑드는 "책임협약"(Pacte de responsabilité)을 발표하며 친기업 정책으로 선회한다. 이는 기업의 사회보장 부담 감면과 규제 완화를 통해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유럽 정책에서 올랑드는 처음에 "성장과 일자리를 위한 유럽"을 내세우며 메르켈의 긴축 정책에 맞섰으나, 점차 독일의 입장에 수렴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EU 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약화되고, 유로존 위기 해결 과정에서 독일의 주도권이 강화된다.
올랑드 임기 중 가장 극적인 사건은 일련의 테러 공격이었다. 2015년 1월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테러, 2015년 11월 13일 파리 다중 테러(바타클랑 극장 등 130명 사망), 2016년 7월 14일 니스 테러(트럭 공격으로 86명 사망) 등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가 프랑스를 강타한다.
이에 대응해 올랑드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테러 작전("센티넬")을 강화하며, 시리아·이라크의 ISIS 타격을 위한 군사 작전을 확대한다. 또한 말리 북부 지하드 단체 토벌을 위한 "세르발 작전"(2013년 개시)을 지속한다. 이 시기 프랑스는 아프리카, 중동에서 매우 적극적인 군사 개입 정책을 펼친다.
2015년 12월 지방선거에서 극우 민족전선(FN)이 약진하고, 2016년 영국 브렉시트 국민투표 통과와 미국 트럼프 당선으로 포퓰리즘의 위협이 커진다. 프랑스 내에서도 반이민, 반EU, 반엘리트 정서가 확산된다.
올랑드 대통령의 인기는 계속 하락하여 2016년 지지율이 4%까지 떨어진다(역대 대통령 중 최저). 동성결혼 합법화(2013년 "모두를 위한 결혼"법)는 보수파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2016년 노동법 개정("엘 코므리 법")은 좌파와 노동계의 반발을 샀다. 사생활 스캔들과 측근들의 스캔들도 이미지에 타격을 입힌다.
2016년 12월 1일, 올랑드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린다.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재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낮은 지지율과 정치적 기반 약화를 인정한 결정이었다.
올랑드 임기는 테러와의 전쟁, 경제 침체, 사회적 분열이라는 삼중고 속에서 좌파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몇 가지 개혁(동성결혼 합법화, 사회보장제도 확충, 기후변화 대응 등)은 의미 있는 업적으로 평가된다.
사회경제적 도전과 정체성 논쟁
1995년부터 2017년까지의 시기는 프랑스가 세계화, 유럽 통합, 탈산업화라는 구조적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이었다. 세 대통령은 각기 다른 접근법을 시도했지만, 몇 가지 공통된 도전에 직면했다.
고질적인 실업 문제는 계속되었다. 1995년 10%, 2007년 8%, 2016년 10%로 높은 실업률이 유지되었고, 특히 청년 실업(20-25%)과 장기 실업이 심각했다. 이는 노동시장의 경직성, 교육과 일자리 미스매치, 경제성장 둔화 등 복합적 요인에 기인한다.
재정 문제도 악화되었다. 공공부채는 1995년 GDP의 55.8%에서 2017년 98.4%로 급증했다. 이는 저성장, 높은 사회지출, 세수 부족, 금융위기 대응 등의 결과였다. EU의 재정규율(GDP 대비 적자 3% 이내)을 지키기 위한 압박이 지속되었다.
사회 불평등 문제가 심화되었다. 소득·자산 불평등이 확대되고, 농촌과 도시 외곽 지역의 소외감이 증가했다. "소외된 프랑스"(La France périphérique)와 "두 개의 프랑스" 논의가 등장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이민과 통합 문제는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쟁점이 되었다. 다문화주의와 공화주의적 통합 모델 사이의 긴장, 이슬람 종교와 세속주의(라이시테) 원칙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교외 폭동(2005년), 헤드스카프 논쟁, 부르카 금지법(2010년) 등은 이러한 갈등의 표현이었다.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과 영향력 유지도 중요한 과제였다. EU 내에서 독일의 경제적 우위가 강화되고, 세계무대에서 미국, 중국 등 강대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프랑스는 "중견국 슬럼프"(malaise de la puissance moyenne)를 경험한다. 이에 대응해 유럽 통합 강화, 프랑스어권 협력, 다자주의 외교, 선별적 군사 개입 등 다양한 전략을 시도한다.
정치적으로는 전통적 정당 체제의 약화와 극단주의 성장이라는 변화가 나타난다. 좌우 양대 정당(사회당과 공화당/UMP)의 지지 기반이 약화되고, 극우 민족전선(FN)이 급성장한다. 2002년 대선에서 르펜의 결선 진출,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FN의 1위 등이 이러한 변화를 보여준다.
이 시기의 경제 정책은 대체로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을 유지하면서도 자유화·세계화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민영화(프랑스 텔레콤, 에어프랑스 등), 노동시장 유연화, 규제 완화 등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사회안전망은 기본적으로 유지되었다.
제도적 변화와 국제관계의 재편
제5공화정의 제도적 틀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2000년 국민투표로 대통령 임기가 7년에서 5년으로 단축되고, 의회 선거 일정이 대선 직후로 조정되면서 "다수파 논리"가 강화되었다. 이는 대통령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사법부 독립성 강화와 헌법재판소 역할 확대도 이루어졌다. 1995년 헌법 개정으로 고등사법위원회 구성이 변경되고, 2008년 개헌으로 "우선적 위헌법률심사"(QPC) 제도가 도입된다. 이는 기본권 보장과 법치주의 강화에 기여했다.
지방분권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2003년 헌법 개정은 "분권화된 공화국"을 명시하고, 레지옹과 데파르트망의 권한이 확대되었다. 2015-2016년에는 레지옹 통합(22개→13개)과 대도시권 개편이 이루어졌다.
국제 관계에서는 미국 일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의 전환이 진행되었다. 프랑스는 미국과의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독자적 입장을 강조했다. 이라크 전쟁 반대(2003년), NATO 군사기구 복귀(2009년) 등은 이러한 균형 추구를 보여준다.
유럽 통합은 확대와 심화를 거듭했다. 2004년과 2007년 동유럽 국가들의 EU 가입, 2002년 유로화 도입, 2007년 리스본 조약 등이 중요한 이정표였다. 그러나 2005년 헌법조약 국민투표 부결, 2008년 금융위기와 이어진 유로존 위기, 2016년 브렉시트 등은 통합 과정의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기후변화 대응에서 프랑스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 특히 2015년 파리기후협약(COP21) 타결은 올랑드 시기의 중요한 외교적 성과였다.
이 시기 프랑스는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적극적인 군사 개입 정책을 펼쳤다. 코소보(1999년), 아프가니스탄(2001-2014년), 코트디부아르(2002-2015년), 리비아(2011년), 말리(2013년-) 등에서의 군사 작전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영향권 유지와 테러 위협 대응이라는 목표를 반영했다.
테러와의 전쟁은 21세기 들어 프랑스 안보 정책의 핵심이 되었다. 2015-2016년 연속된 테러 공격 이후, 정보기관 강화, 국내 감시 확대, ISIS 타격을 위한 해외 작전 등이 추진되었다. 이는 프랑스 사회에 안보와 자유 사이의 균형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제기했다.
2017년 선거와 마크롱의 등장: 새로운 시대의 시작?
2017년 대통령 선거는 프랑스 정치 지형의 근본적 재편을 보여주었다. 예비선거에서 전통 정당의 후보들(공화당 피용, 사회당 아몽)이 몰락하고, 중도의 엠마뉘엘 마크롱, 극우의 마린 르펜, 극좌의 장-뤽 멜랑숑이 부상했다.
1차 투표(4월 23일)에서 마크롱(24.0%)과 르펜(21.3%)이 결선에 진출하고, 2차 투표(5월 7일)에서 마크롱이 66.1%의 득표율로 승리한다. 39세의 마크롱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이 되었으며, 전통 정당이 아닌 자신이 창당한 신생 정당 '앙 마르슈'(En Marche)를 기반으로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마크롱의 등장은 시라크, 사르코지, 올랑드로 이어지는 20년간의 정치에 대한 거부와 새로운 방향 모색을 의미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ni droite, ni gauche) 중도 개혁 노선, 친유럽·친기업 성향, 그리고 정치 신인으로서의 새로운 이미지가 기존 정치에 실망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6월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마크롱의 정당(이름을 '라 레퓌블리크 앙 마르슈'로 변경)이 압승을 거두어 안정적인 다수파를 확보한다. 이로써 마크롱은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마크롱은 어려운 상황을 물려받았다. 지속적인 경제 침체와 고실업, 테러 위협, 이민과 통합 문제, 유럽 프로젝트의 불확실성, 사회적 불평등 심화 등 프랑스가 직면한 구조적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
더구나 전통 정당의 쇠퇴는 정치 지형의 불안정성을 의미했다. 좌우 양극단(르펜의 국민연합과 멜랑숑의 불굴의 프랑스)의 강세, 중간층의 분열, 기존 엘리트에 대한 불신은 마크롱 시대의 도전 요소였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프랑스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과정에 있었다. 시라크, 사르코지, 올랑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러한 도전에 대응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마크롱의 등장은 새로운 접근법의 시도였으나, 그 결과는 아직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라크-사르코지-올랑드 시대의 의미와 유산
이 세 대통령이 이끈 22년의 시기는 프랑스가 20세기의 패러다임에서 21세기의 현실로 전환하는 과정이었다. 세계화, 유럽 통합, 디지털 혁명, 환경 위기, 테러리즘, 다문화주의 등 새로운 도전들이 전통적인 프랑스 모델에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시라크는 전통적인 드골주의와 시대적 변화 요구 사이에서 중도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을 경계하면서도 프랑스의 적응을 모색했고, 이라크 전쟁 반대를 통해 독자적 외교 노선을 강조했다. 그러나 국내 개혁에는 소극적이었고, 탈산업화와 교외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사르코지는 더 적극적인 변화와 개혁을 추진했다. 그의 역동적 리더십은 프랑스 정치 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NATO 복귀와 리비아 개입 등을 통해 국제무대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개인화된 통치 스타일과 글로벌 금융위기는 그의 업적을 제한했다.
올랑드는 경제 위기와 테러 위협 속에서 좌파의 가치와 현실적 제약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했다. 그의 "정상적" 접근은 초기에 환영받았으나 점차 우유부단함으로 인식되었고, 경제 성과 부진과 사회적 분열 심화로 인기가 급락했다. 그럼에도 동성결혼 합법화와 파리기후협약 등 일부 영역에서는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다.
세 대통령의 공통된 유산은 프랑스 모델의 점진적 변화였다. 프랑스는 여전히 강한 사회 안전망과 공공 서비스를 유지하면서도, 경제의 개방화와 유연화, 정부 역할의 재정의, 유럽 통합 심화를 추구했다. 이는 프랑스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세계화에 적응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한계도 분명했다. 고실업, 교외 소외, 사회 통합 실패, 공공부채 증가, 국제적 영향력 약화 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는 전통적 정치 엘리트에 대한 불신과 포퓰리즘 성장의 배경이 되었다.
2017년 대선은 이러한 누적된 문제들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반응이었다. 전통 정당을 거부하고 새로운 인물과 접근법을 선택한 것은 근본적 변화에 대한 열망을 반영했다. 마크롱의 등장으로 시라크-사르코지-올랑드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그들이 직면했던 도전들은 여전히 프랑스 사회의 핵심 과제로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