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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거부하는 조직, 길을 잃은 리더들: 인사조직론 최신 트렌드 진단

오늘날 인사조직 분야는 단순한 관리의 기술이 아닌, 조직 생존의 철학을 요구받고 있다. 고성과 문화를 만드는 핵심은 ‘사람’이며, 이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성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통찰이 곧 조직 전략의 핵심 축이 된다. 최근 몇 가지 주요 흐름은 기존의 정답 중심 인사관리에서 벗어나, ‘신뢰’, ‘분산 지식’, ‘실험적 성과관리’라는 새로운 키워드로 수렴되고 있다. 1. 스타벅스가 말하는 리더십: 섬김의 힘 전통적인 리더십 모델은 여전히 ‘지시’와 ‘통제’의 틀에 갇혀 있다. 하지만 스타벅스가 보여준 서번트 리더십은 정반대의 길을 택한다. 리더는 위에서 아래를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라, 구성원의 성장을 돕는 서포터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철학은 스타벅스의 바리스타 문화, 내부 커뮤니케이션, 교육 방식에 그대로 녹아 있다. 직원 한 명 한 명을 ‘파트너’로 존중하고, 고객 경험 이전에 내부 경험(Internal Experience)을 우선시하는 시스템은 결국 외부 충성도(Brand Loyalty)로 이어진다. 섬김의 리더십은 더 이상 이상이 아닌, 검증된 성과 전략이다. 2. ‘지식은 힘’의 종말: 나누는 조직이 이긴다 지식을 개인의 경쟁력으로 여기는 시대는 끝났다. 오늘날의 고성과 조직은 지식의 흐름이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따라 성과의 수준이 달라진다. 지식을 숨기는 조직은 반복된 실수를 학습하지 못하고, 조직 전체가 '개별의 반복'에 갇히는 비효율을 겪는다. 반면, 지식을 나누는 조직은 실패 경험도 자산이 된다. 구글, 넷플릭스, 에어비앤비와 같은 테크 기업들은 실패와 학습, 지식의 투명한 순환을 통해 집단지성을 실현하고 있다. 이는 단지 사내 위키나 협업툴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을 만드는 문화 설계의 문제다. 3. OKR vs KPI, 목적 없는 성과관리의 함정 많은 조직이 OKR(Objectives and Key Results) 도입을 시도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기존 KPI와의 혼용으로 방...

프랑스 역사 기본 23. 퐁피두·지스카르·미테랑 시대(1969~1995)


퐁피두 시대(1969-1974): 드골주의의 계승과 변화

드 골의 퇴진 후 실시된 1969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조르주 퐁피두가 승리한다. 퐁피두는 1962-1968년 드 골 정부의 총리로 일했던 인물로, 기본적으로 드골주의를 계승하면서도 경제·사회·외교 정책에서 일정한 변화를 추구한다.

퐁피두는 보다 실용적인 경제 정책을 추진한다. '신산업 사회'를 표방하며 경제 근대화와 산업 발전에 중점을 둔다. 프랑스 기업의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업 합병과 구조조정을 장려하고, 첨단산업 분야(원자력, 항공우주, 전자, 정보통신)에 대한 투자를 확대한다.

기업 친화적 정책을 펼치면서도 사회 개혁도 추진한다. 최저임금 인상, 실업수당 확대, 직업훈련 강화 등 사회복지 제도를 확충한다. 특히 1970년 직업훈련 개혁과 1971년 '7월 16일 법'을 통해 노사 관계의 제도화와 노동자 권리 강화를 꾀한다.

유럽 통합 정책에서는 드 골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1969년 12월 헤이그 정상회담에서 유럽경제공동체(EEC) 심화와 확대에 동의하고, 영국의 EEC 가입을 더 이상 반대하지 않는다. 1972년 4월에는 '유럽통화협력'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해 68.3%의 찬성을 얻는다.

미국과의 관계도 개선한다. 드 골 시대의 대립 노선에서 벗어나 대화와 협력을 강화하지만, 동시에 프랑스의 독자노선도 유지한다. 1970년에는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소련과도 경제협력을 확대한다.

그러나 퐁피두 시대는 1973년 제1차 석유위기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다. 석유 가격 급등으로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고 경제성장이 둔화된다. 이는 전후 '영광의 30년'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경제 환경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퐁피두는 재임 중이던 1974년 4월 2일 암으로 사망한다. 그의 짧은 재임 기간(5년)은 드골주의의 현대적 적응과 프랑스 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시작된 시기로 평가된다.

지스카르 데스탱 시대(1974-1981): 중도 개혁과 경제 위기

1974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우파 지도자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을 근소한 차이(50.8% 대 49.2%)로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지스카르는 드골주의자가 아닌 최초의 제5공화정 대통령으로, 48세의 젊은 나이에 취임한다.

지스카르는 '평온한 사회'(société apaisée)와 '진보적 중도'를 표방하며 일련의 사회 개혁을 추진한다. 선거 연령을 21세에서 18세로 낮추고, 이혼법 간소화, 낙태 합법화(베이유 법, 1975년), 장애인 권리 보장 등 진보적 개혁을 실행한다. 특히 시몬 베이유가 주도한 낙태권 보장은 여성의 권리 측면에서 중요한 진전이었다.

국가 현대화와 경제 자유화도 추진한다. 통신, 고속철도(TGV), 핵발전 등 인프라 투자를 확대하고, 산업 구조조정과 기술 혁신을 장려한다. 특히 핵발전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하여 프랑스의 에너지 자립도를 높인다.

그러나 지스카르 정부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한다. 제1차(1973년)와 제2차(1979년) 석유위기로 인해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동시에 증가하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난다. 1974-1976년 레이몽 바르 총리의 긴축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은 어느 정도 통제되지만, 실업률은 계속 상승한다.

외교 정책에서는 유럽 통합을 적극 추진한다. 1974년 12월 파리 정상회담에서 유럽이사회(European Council) 정례화를 제안하고, 1979년에는 최초로 직선으로 유럽의회 선거가 실시된다. 또한 서독 총리 헬무트 슈미트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독-불 관계를 강화한다.

대외적으로는 '데탕트'(긴장완화) 정책을 계속하면서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년) 이후에는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한다.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신식민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적극적인 개입 정책을 펼친다.

지스카르 정부는 후반기에 정치적 어려움에 처한다. 경제 위기 지속, '다이아몬드 스캔들'(중앙아프리카 보카사 황제에게서 다이아몬드를 받은 사건), 측근 자살 사건(로베르 부랭 사망) 등으로 지지율이 하락한다. 197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간신히 우파 다수를 유지하지만, 좌파의 결집과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노동계의 반발로 정치적 지지 기반이 약화된다.

1981년 대통령 선거에서 지스카르는 미테랑에게 패배(48.2% 대 51.8%)하며 7년 임기를 마친다. 그의 재임 기간은 프랑스의 사회적 개방과 경제적 구조조정이 시작되었으나, 경제 위기로 인해 개혁의 동력이 약화된 시기로 평가된다.

미테랑의 첫 임기(1981-1988): "단절"과 좌파 개혁

1981년 5월 10일, 사회당 지도자 프랑수아 미테랑이 제5공화정 역사상 최초의 좌파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프랑스인의 일상생활을 변화시키자"라는 슬로건 아래, 미테랑은 이전 우파 정부와의 "단절"(rupture)을 선언하고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개혁을 시작한다.

미테랑은 즉시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실시된 총선에서 사회당이 압승(전체 의석의 58%)을 거두어 강력한 개혁 동력을 확보한다. 피에르 모루아를 총리로 임명하고, 공산당도 정부에 참여시켜(1981-1984) 좌파 연정을 구성한다.

경제 정책에서는 케인스주의적 접근을 취한다. 대규모 국유화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36개 은행과 주요 산업 기업들(탈레스, 생고뱅, 론풀랑, 페시네 등)을 국유화한다. 최저임금을 10% 인상하고, 주 39시간 노동제, 5주 유급휴가제, 퇴직연령 인하(65세→60세) 등 친노동 정책을 추진한다.

지방분권화 개혁은 미테랑 정부의 중요한 업적이다. 1982년 '지방분권화법'(데페르 법)을 통해 중앙정부 권한의 상당 부분을 지방정부로 이양한다. 22개 레지옹(광역지역)이 지방자치단체로 승격되고, 데파르트망과 코뮌의 권한도 강화된다.

교육과 문화 분야에서도 개혁이 이루어진다. 교육 예산을 대폭 증액하고, 대학 개혁(1984년 사바리 법)을 통해 고등교육의 민주화를 추진한다. 문화부 장관 자크 랑의 주도로 문화 예산이 두 배로 증액되고, 그랑 프로제(Grand Projets, 루브르 피라미드, 바스티유 오페라 등)가 추진된다.

그러나 1982-1983년, 미테랑 정부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한다. 케인스주의 경제 정책으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급증하고,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된다. 프랑 화의 세 차례 평가절하에도 불구하고 경제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다.

1983년 3월, 미테랑은 중대한 정책 전환을 결정한다. "엄격한 관리" 정책으로 불리는 긴축 재정을 채택하고, 물가와 임금을 통제하며, 국가 지출을 감축한다. 이는 사실상 사회주의 프로그램의 포기를 의미했다.

1984년 7월 모루아 총리가 사임하고 로랑 파비우스가 새 총리가 되면서, 정부는 더욱 중도적인 경제 노선을 채택한다. 공산당이 연정에서 탈퇴하고, 국유화된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시작되며, 시장 원리가 강조된다.

외교 정책에서 미테랑은 처음에는 "제3세계주의"와 독자노선을 강조하지만, 점차 서방 동맹과 유럽 통합 강화로 방향을 전환한다. 1983년 독일의 핵미사일 배치를 지지하면서 대소련 강경 노선을 취하고, 유럽 통합을 "프랑스의 운명"으로 규정한다.

1986년 총선에서 우파가 승리하면서 미테랑은 자크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해야 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제5공화정 역사상 최초의 "동거 정부"(cohabitation) 시기(1986-1988)를 경험한다. 미테랑은 외교·국방 분야에서 주도권을 유지하는 한편, 국내 정책은 시라크 정부에 맡긴다.

미테랑의 두 번째 임기(1988-1995): 유럽 통합과 제3의 길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미테랑은 "프랑스 통합"(France unie)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시라크를 54.0% 대 46.0%로 이기고 재선에 성공한다. 두 번째 임기에서 미테랑은 좌파 이데올로기보다 실용주의적 접근을 취하고, 유럽 통합에 역점을 둔다.

첫 임기의 급진적 개혁 대신, 미테랑은 보다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채택한다. 미셸 로카르(1988-1991), 에디트 크레송(1991-1992, 프랑스 최초의 여성 총리), 피에르 베레고부아(1992-1993) 등 중도 좌파 성향의 총리들을 기용한다.

1988-1993년 사회당 정부는 몇 가지 중요한 개혁을 추진한다. 최저소득보장제(RMI) 도입, 부유세(ISF) 재도입, 노동 조건 개선, 의료보험 확대 등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첫 임기의 혁신적 개혁에 비해 보다 제한적인 성과를 거둔다.

유럽 통합은 미테랑의 핵심 프로젝트가 된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 과정에서 미테랑은 헬무트 콜 독일 총리와 긴밀히 협력하여 독일의 유럽 내 통합을 추진한다. 1991년 마스트리히트 조약 협상을 주도하여 유럽연합(EU) 창설과 단일통화(유로) 도입의 기반을 마련한다.

그러나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프랑스 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1992년 9월 국민투표에서 조약이 아슬아슬하게 승인(찬성 51.05%)되면서, 유럽 통합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분열이 드러난다.

19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참패하면서(577석 중 70석만 획득) 미테랑은 두 번째 "동거 정부"를 경험한다. 에두아르 발라뒤르가 총리가 되어 1993-1995년 보수 정부를 이끈다. 이 시기 프랑스는 민영화 추진, 이민 제한, 노동시장 유연화 등 우파 정책으로 선회한다.

미테랑의 후반기는 개인적, 정치적 어려움으로 점철된다. 1981년부터 앓았던 전립선암이 악화되고, 비시 정부 시절 과거(1942-1944년 비시 정부에서 일한 이력), 불법도청 스캔들, 측근들의 부패 의혹 등으로 이미지가 실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테랑은 "모든 프랑스인의 대통령"으로서 국가 통합을 강조하고,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 제고에 큰 역할을 한다. 특히 독일 통일 과정에서 유럽 통합을 강화함으로써 프랑스-독일 관계의 새로운 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5년 5월 임기를 마치고 은퇴한 미테랑은 같은 해 1월 8일 사망한다. 그의 14년 재임 기간은 프랑스 좌파의 집권 경험, 경제의 구조적 변화, 유럽 통합의 심화, 그리고 세계화 시대 국민국가의 도전이라는 복합적 과정을 포함한다.

복지국가의 확대와 경제적 도전

퐁피두에서 미테랑까지의 시기는 프랑스 복지국가가 확대되는 동시에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는 모순적 상황이 전개된다.

1970년대 초까지 프랑스는 '영광의 30년'의 고성장을 바탕으로 복지제도를 확충한다. 연금, 의료보험, 가족수당 등 사회보장제도가 강화되고, 최저임금 인상, 노동조건 개선, 주택 정책 등 사회 안전망이 확대된다.

1981년 미테랑 집권 이후에는 복지국가가 더욱 확대된다. 미테랑 정부는 최저소득보장제(RMI), 주거권(DALO), 보편적 의료보험(CMU) 등 새로운 사회권을 도입하고, 사회보장 혜택을 확대한다.

그러나 석유위기 이후 경제 환경이 급변하면서 복지국가의 재정적 지속가능성이 도전받는다. 저성장, 대량실업, 재정적자, 사회보장 비용 증가라는 악순환이 나타난다. 1974년 1.7%였던 실업률은 1985년 10%로 급증하고, 국가부채도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이에 대응하여 정부는 다양한 경제 정책을 시도한다. 지스카르 정부의 산업 구조조정, 미테랑 초기의 케인스주의적 확장 정책, 1983년 이후의 '엄격한 관리' 정책, 1986-1988년 시라크 정부의 자유화 정책 등이 번갈아 시행된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점차 '제3의 길' 또는 '경쟁적 디스인플레이션' 정책이 주류가 된다. 이는 통화 안정, 경쟁력 강화, 시장 개방, 선별적 산업 정책을 결합한 접근법으로, 프랑스 경제의 유럽화와 세계화에 대응하는 전략이었다.

경제구조도 크게 변화한다. 전통적 제조업이 쇠퇴하고, 서비스 산업과 첨단기술 산업이 성장한다. 1970년대 26%였던 산업 부문 고용 비중은 1990년대 18%로 감소하는 반면, 서비스 부문은 56%에서 70%로 증가한다.

금융 부문의 자유화도 진행된다. 1984년 은행법 개정, 1986년 파리 증권거래소 개혁, 1990년 자본 이동 자유화 등을 통해 프랑스 금융 시스템이 국제화된다. 이러한 변화는 미테랑의 두 번째 임기와 발라뒤르 정부에서 가속화된다.

그러나 경제 구조조정 과정에서 사회적 불평등과 배제 문제가 심화된다. 장기실업, 도시 빈곤, 이민자 차별 등의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한다. 이에 대응하여 사회통합 정책이 강화되지만, 근본적 해결에는 한계를 보인다.

유럽통합과 탈냉전 시대의 국제관계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유럽 통합이 심화되고 냉전이 종식되는 국제질서의 대변동기였다. 이 시기 프랑스는 유럽 통합의 주도국으로서, 그리고 독자적 외교노선을 추구하는 강대국으로서 복합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유럽 통합은 지속적으로 진전된다. 1973년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의 EEC 가입, 1979년 유럽통화제도(EMS) 출범과 최초의 직접선거에 의한 유럽의회 구성, 1986년 단일유럽의정서 체결과 스페인·포르투갈 가입,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한 유럽연합(EU) 창설 등 통합이 심화·확대된다.

프랑스는 이 과정에서 독일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한다. 특히 미테랑-콜 관계는 유럽 통합의 원동력이 된다. 프랑스는 독일 통일을 유럽 통합 심화의 기회로 활용하여, 단일통화 도입을 통해 독일의 경제력을 유럽 차원에서 통제하고자 한다.

냉전 종식과 소련 붕괴는 프랑스 외교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한다. 미테랑은 처음에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지지하고 동서 화해를 추진하지만, 동유럽 민주화와 독일 통일 과정에서는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1990-1991년 걸프전에서 프랑스는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에 참여하지만, 동시에 독자적 역할을 모색한다. 냉전 이후 프랑스는 다극화된 세계질서를 지향하며,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의 지위를 활용한 다자주의 외교를 강화한다.

핵심 전략 분야에서는 독자성을 유지한다. 핵억제력을 지속적으로 현대화하고, 1966년 이후 유지해온 NATO 군사기구 불참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1991년 걸프전, 1994년 르완다 개입 등에서 나타나듯이 군사적 역량과 정치적 영향력 사이의 간극이 드러나기도 한다.

프랑스어권(Francophonie) 외교는 문화적, 언어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이 된다. 1986년 프랑스어권 정상회담이 시작되고, 아프리카, 중동, 인도차이나 등 전 식민지 지역과의 특별 관계가 유지된다.

이 시기 프랑스 외교의 과제는 유럽 통합 심화와 프랑스의 국가적 이익 조화,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과의 관계 설정, 독일 통일 이후 유럽 내 세력 균형 유지, 그리고 세계화 속에서 프랑스의 정체성과 영향력 보존이었다.

사회문화적 변동과 정체성 문제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프랑스 사회는 급속한 변화를 경험한다. 전통적 가치와 생활방식이 도전받고, 새로운 사회운동과 문화적 다양성이 부상한다.

가족 구조와 젠더 관계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이혼율 증가, 혼외 출산 증가, 다양한 가족 형태 등장,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이 두드러진다. 낙태권 합법화(1975년), 이혼법 개정(1975년), 가족법 개혁, 성폭력 처벌 강화, 직장 내 성평등 촉진 등의 법적 변화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다.

이민과 다문화주의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한다. 1974년 이후 노동 이민이 제한되지만, 가족 재결합과 난민 유입은 계속된다. 특히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이 증가하면서 프랑스 사회의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이 확대된다.

1980년대부터 이민 2세대(베르)의 정체성 문제와 통합 정책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가 된다. 1983년 '베르 행진'으로 상징되는 반인종차별 운동이 전개되고, 미테랑 정부는 다양한 통합 정책을 시행한다. 그러나 1989년 '스카프 사건'에서 드러나듯 세속주의(라이시테)와 종교적 표현의 자유 사이의 긴장도 나타난다.

문화정책은 '문화민주화'에서 '문화적 민주주의'로 변화한다. 드골-퐁피두 시대의 엘리트 중심 문화정책에서 벗어나, 지스카르 시대부터 지방 문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지원이 확대된다. 특히 미테랑-랑 시대(1981-1986, 1988-1993)에는 문화예산이 대폭 증액되고, 지방분권화와 연계된 문화 정책이 추진된다.

미디어 환경도 급변한다. 1982년 방송 독점이 폐지되고, 민영 TV 채널(Canal+, La 5, M6 등)이 등장한다. 1980-90년대에는 케이블TV, 위성방송이 확산되며, 1990년대 중반부터는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정보 접근의 민주화와 함께 문화적 세계화의 가속화를 가져온다.

교육 시스템도 변화한다. 1980년대부터 고등교육이 대중화되어 대학생 수가 급증한다(1980년 80만 명에서 1995년 210만 명). 1989년 조시팽 교육법은 "2000년까지 고등학교 학년의 80%가 바칼로레아에 합격하도록 한다"는 목표를 설정한다. 그러나 교육 확대가 모든 사회계층에 균등한 혜택을 가져오지는 못한다.

이 시기 프랑스 사회는 정체성과 통합에 관한 근본적 질문을 마주한다. "공화주의적 통합 모델"이 다문화사회의 현실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세계화 시대에 프랑스의 문화적 예외성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유럽 통합 심화와 국민국가의 주권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등의 문제가 제기된다.

퐁피두-지스카르-미테랑 시대의 의미와 유산

1969년부터 1995년까지의 시기는 프랑스가 후기 산업사회로 전환하고, 유럽 통합이 심화되며, 세계화의 도전에 직면하는 복합적 변화의 시대였다. 세 대통령은 각자의 스타일과 정책 방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프랑스의 현대화와 적응이라는 공통의 과제에 직면했다.

퐁피두는 드골주의를 계승하면서도 실용적으로 재해석했다. 그의 짧은 재임 기간은 산업 근대화와 유럽 통합 재개의 시기로, 프랑스가 '영광의 30년'에서 경제 위기로 전환하는 과도기였다.

지스카르는 프랑스 사회의 현대화와 개방을 추진했다. 그의 진보적 중도주의는 프랑스 사회의 자유화를 앞당겼으나, 경제 위기와 정치적 고립으로 개혁 동력이 약화되었다.

미테랑은 가장 오래 재임한 대통령(14년)으로, 좌파의 집권 경험과 유럽 통합의 심화를 이끌었다. "단절"을 표방한 첫 임기와 통합을 강조한 두 번째 임기의 대비는 이념에서 실용으로 전환하는 프랑스 좌파의 변화를 반영한다.

이 시기에 프랑스 정치 지형에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전통적인 좌우 대립구도가 유지되는 가운데, 민족전선(FN)의 등장(1984년 유럽의회 선거 11% 득표), 녹색당의 부상, 극좌파와 반세계화 운동의 성장 등 정치적 다원화가 진행된다.

제5공화정의 제도적 틀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만, 운영 방식에는 변화가 있었다. 특히 1986-1988년과 1993-1995년의 "동거 정부" 경험은 대통령과 총리 간 권한 분담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미테랑은 이 시기에 "공화국의 조정자" 역할을 강조하며 제도적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경제적으로는 "혼합경제" 모델에서 "경쟁적 시장경제"로의 점진적 전환이 이루어진다. 1983년 미테랑의 정책 전환, 1986년 시라크 정부의 자유화 정책, 1993년 발라뒤르 정부의 민영화는 이러한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프랑스 모델은 여전히 강한 사회안전망과 국가 개입을 특징으로 한다.

1995년 자크 시라크의 당선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시라크는 "사회적 균열"(fracture sociale)을 치유하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되지만, 곧 세계화와 유럽 통합이라는 구조적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미테랑 시대의 유산은 정치적 다원주의, 유럽 통합의 심화, 문화적 개방과 다양성의 확대, 그리고 세계화에 대응하는 "프랑스 예외주의"의 재정의로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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