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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역사 기본 23.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전간기 영국
1.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영국의 참전
전쟁 이전 유럽의 국제 정세
20세기 초 유럽은 복잡한 동맹 체제와 군비 경쟁으로 전쟁의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었다. 독일 제국의 부상과 함께 세력 균형이 흔들리고 있었으며, 두 개의 적대적 동맹이 형성되었다. 한쪽에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의 삼국동맹(Triple Alliance)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삼국협상(Triple Entente)이 있었다.
영국은 19세기 대부분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 정책을 유지했으나, 통일 독일의 경제적·군사적 부상에 위협을 느끼며 점차 동맹 외교로 전환했다. 1904년 프랑스와 '협상(Entente Cordiale)'을 맺었고, 1907년 러시아와도 협약을 체결하여 삼국협상이 완성되었다.
군비 경쟁, 특히 해군 경쟁은 긴장을 고조시켰다. 1906년 영국의 드레드노트(HMS Dreadnought) 전함 배치 이후, 영국과 독일은 더 많은 전함을 건조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 영국이 해군력 우위를 유지했지만, 독일의 해군력 증강은 영국에 심각한 불안을 야기했다.
제국주의 경쟁도 갈등 요인이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유럽 강대국들은 식민지와 영향력을 두고 충돌했다. 모로코 위기(1905년, 1911년)와 같은 제국주의 갈등은 유럽 강대국 간 전쟁 가능성을 높였다.
발칸 반도는 특히 불안정한 지역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쇠퇴로 발생한 권력 공백을 두고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신생 발칸 국가들이 경쟁했다. 1912-13년 발칸 전쟁들은 지역 불안정을 더욱 심화시켰다.
사라예보 사건과 전쟁의 확산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대공과 그의 부인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던 중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 '검은 손(Black Hand)'의 일원인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가 암살에 관여했다고 믿었고, 독일의 지지를 받아 7월 23일 세르비아에 매우 가혹한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가 일부 조건만 수용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이후 동맹 체제로 인해 전쟁은 급속히 확산되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동원령을 내렸고,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에, 8월 3일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독일군은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했다.
영국은 처음에는 개입을 망설였다. 자유당의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Herbert Henry Asquith) 내각은 분열되어 있었으며, 에드워드 그레이(Edward Grey) 외무장관은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다. 그러나 독일의 벨기에 침공은 상황을 바꿨다. 영국은 1839년 조약으로 벨기에 중립을 보장하고 있었으며, 벨기에와 프랑스 해안에 대한 독일의 통제는 영국 안보에 직접적 위협이었다. 8월 4일,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애스퀴스 정부의 결정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보수당은 전쟁을 적극 지지했으며, 자유당 내 대다수와 노동당도 결국 독일의 '작은 국가에 대한 침략'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영국의 참전은 해외 자치령들(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과 식민지들의 전쟁 참여도 의미했다.
영국의 초기 전투와 서부전선 형성
영국의 첫 군사적 기여는 영국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 BEF)의 파견이었다. 약 16만 명으로 구성된 이 전문적인 직업군인 부대는 8월 중순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BEF는 당시 전체 전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였지만, 우수한 훈련과 화력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8월 말과 9월 초의 첫 전투들에서 연합군은 후퇴를 강요받았다.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에 따라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 북부로 신속히 진격하여 파리를 포위하려 했다. 8월 23-24일 몽스(Mons) 전투에서 BEF는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켰으나, 프랑스군의 후퇴로 인해 자신들도 철수해야 했다.
9월 5-12일 '마른(Marne) 전투'는 전쟁 초기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프랑스와 영국군이 반격하여 파리를 향한 독일의 진격을 막았다. 이후 양측은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이어지는 참호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0월과 11월, 이프르(Ypres) 전투에서 BEF는 큰 손실을 입었으나 독일군의 해안 돌파를 저지했다.
영국 함대는 개전 초기부터 북해를 통제했다. 8월 말 헬리골란트 만(Heligoland Bight) 해전에서 승리한 영국은 독일 해군을 북해 항구에 가두는 원거리 해상 봉쇄를 시행했다. 이로써 독일의 해상 무역이 크게 제한되었다.
그러나 해전에서 영국도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의 잠수함(U-boat)은 새로운 위협이었으며, 1914년 9월 22일 독일 잠수함 U-9이 세 척의 영국 순양함을 침몰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12월에는 독일 순양함들이 영국 북동부 해안을 폭격하기도 했다.
1914년 말까지, 양측 모두 신속한 승리를 기대했으나 서부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동전(war of movement)은 참호전(trench warfare)으로 전환되었고, 영국은 장기전에 대비해야 했다.
2. 총력전 체제와 전시 영국 사회
국가 총동원과 전시 경제
제1차 세계대전은 전례 없는 규모의 국가 자원 동원을 요구하는 '총력전(total war)'이었다. 영국은 전쟁 수행을 위해 경제, 산업, 인적 자원을 총동원해야 했다.
병력 모집은 초기에 자원제로 이루어졌다. 허버트 키치너(Herbert Kitchener) 육군장관은 대규모 지원군 모집 캠페인을 시작했다. 유명한 "당신의 나라가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Your Country Needs You)"라는 포스터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수많은 영국 남성들이 애국심에 고무되어 지원했으며, '키치너의 군대(Kitchener's Army)' 또는 '신군(New Army)'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자원병 제도는 한계가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고 사상자가 증가하면서 지원자 수가 감소했다. 1916년 1월, 정부는 마침내 징병제(conscription)를 도입했다. '병역법(Military Service Act)'은 18-41세 미혼 남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했으며, 5월에는 기혼 남성까지 확대되었다. 종교적·윤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는 '양심적 병역 거부(conscientious objection)' 자격이 주어졌으나, 많은 이들이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전쟁 경제 관리를 위해 국가 개입이 크게 확대되었다. 1915년 5월, 정치적 위기 이후 애스퀴스는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새로운 '군수부(Ministry of Munitions)'가 설립되어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군수부는 무기 생산을 조직하고 노동 배치, 원자재 분배, 공장 건설을 관리했다.
1916년 12월, 로이드 조지가 수상이 되면서 정부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전시내각(War Cabinet)'이 전략적 결정을 내렸고, 새로운 부처들이 식량, 선박, 노동력 등을 관리했다. 1917년 '국가서비스부(Ministry of National Service)'는 인력 배치를 조정했으며, '식량통제부(Food Controller)'는 배급제를 감독했다.
전쟁은 영국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 수출 산업은 쇠퇴했고, 군수 산업이 급성장했다. 전쟁 비용은 막대했다. 일일 전쟁 비용은 1914년 약 200만 파운드에서 1918년 700만 파운드로 증가했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정부는 증세, 국내외 차관, 전쟁 채권 발행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국가 부채가 급증했으며, 영국은 순채권국에서 순채무국으로 전환되었다.
여성의 역할 변화와 사회적 영향
전쟁은 영국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에 중요한,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변화를 가져왔다. 수백만 남성이 군대에 징집되면서 노동력 공백이 발생했고, 여성들이 이전에는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직업에 대거 진출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산업 부문에서 일어났다. 여성들은 공장, 특히 군수 공장에서 대규모로 일하게 되었다. '군수품 소녀들(munitionettes)'은 폭발물, 총탄, 무기 등을 생산했으며, 종종 위험한 조건에서 작업했다. 1918년까지 약 90만 명의 여성이 군수 산업에 종사했다.
여성들은 또한 운송, 농업, 행정, 상업 부문에서도 일했다. 여성 버스 차장, 우체국 직원, 경찰, 소방관 등이 등장했다. '여성 토지군(Women's Land Army)'은 약 23,000명의 여성을 농업 노동에 배치했다. 정부와 은행과 같은 기관에서도 여성 고용이 크게 증가했다.
여성들은 간호사로서 전쟁에 직접 참여했다. 군간호단(Queen Alexandra's Imperial Military Nursing Service)과 적십자 간호사들은 프랑스, 벨기에 등 전선 근처에서 부상자들을 돌봤다. 1917-18년에는 여성들이 비전투 군사 조직(여성육군보조단(WAAC), 여성해군부대(WRNS), 여성공군대(WRAF))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여성의 사회적 이미지와 자기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 여성들은 새로운 독립성, 자신감, 경제적 자율성을 경험했다. 복장도 변화했다. 실용적인 이유로 짧은 치마, 바지, 짧은 머리가 더 흔해졌다.
전쟁 기간 동안 여성 참정권 운동은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와 같은 지도자들은 애국적 노력에 집중했다. 그러나 전쟁 중 여성들의 기여는 궁극적으로 참정권 획득에 도움이 되었다. 1918년 '국민대표법(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ct)'은 30세 이상 여성(특정 자격 요건 충족 시)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전쟁 후 많은 여성들은 일자리에서 쫓겨났다. 1919-20년 '복원법(Restoration of Pre-War Practices Act)'은 많은 산업에서 전쟁 전 성별 분업으로의 복귀를 의무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노동 참여와 사회적 기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변화가 시작되었다.
전쟁 선전과 대중 의식
전쟁은 정부와 대중 간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변화시켰다. 처음으로 국가는 체계적인 선전 캠페인을 통해 공공 여론을 모으고 유지하려 했다.
1914년 8월, 찰스 마스터맨(Charles Masterman)은 '전쟁선전국(War Propaganda Bureau)'을 설립했다. 이후 '정보부(Department of Information)', 마지막으로 1918년 '정보부처(Ministry of Information)'로 발전했다. 이들 기관은 포스터, 팜플렛, 신문 기사, 사진, 영화 등을 통해 영국의 대의와 적국(특히 독일)의 잔혹함을 선전했다.
선전은 몇 가지 주요 주제에 집중했다. '침략자' 독일에 맞서 '작은 벨기에'를 방어하는 영국의 의로운 역할, 독일군의 잔혹 행위에 대한 (때로는 과장된) 이야기, 전쟁을 '문명 대 야만'의 싸움으로 묘사하는 것 등이다. 유명한 포스터들에는 "당신의 나라가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아빠, 전쟁 중에 뭐 했어요?"와 같은 구호가 사용되었다.
언론 통제와 검열도 증가했다. 1914년 '국방령(Defence of the Realm Act, DORA)'은 정부에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으며, 전쟁에 관한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 것을 불법화했다. 신문들은 공격 계획, 선박 이동, 사상자 수 등에 관한 정보를 보도하는 데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의 검열은, 특히 전쟁 초기에는, 다른 교전국에 비해 덜 엄격했다.
전쟁 시작 시 영국인들 사이에 광범위한 애국적 열의가 있었다. 전쟁은 "크리스마스까지 끝날" 짧은 모험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많았다. 그러나 참호전의 현실, 특히 1916년 솜 전투와 같은 대규모 인명 손실은 초기의 낙관론을 무너뜨렸다.
1917-18년에는 전쟁 피로와 고통이 증가했다. 식량 부족, 물가 상승, 노동 불안이 심화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일부 노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영국에서도 파업이 증가했다. 정부는 배급제 도입, 임금 인상, 노동 조건 개선으로 대응했다.
전반적으로, 영국 사회는 다른 교전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단결력을 유지했다. 전쟁은 일시적으로 계급 간 연대감을 강화했으나, 장기적으로는 기존 사회 질서에 도전하는 변화의 씨앗도 심었다.
3. 주요 전투와 전쟁의 전개
서부전선의 소모전: 솜(Somme)과 파스헨달(Passchendaele)
1916년 중반까지, 영국은 주로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작은 군대에서 대규모 시민군으로 전환되었다. '키치너의 군대'가 훈련을 마치고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 신병들은 곧 서부전선의 잔혹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1916년 7월 1일, 영국군은 프랑스군과 함께 솜 강 지역에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솜 전투는 독일군의 베르됭(Verdun) 공격에서 프랑스군의 압력을 덜어주고, 적군을 소모시키며, 교착 상태를 깨려는 목적으로 계획되었다. 작전에 앞서 7일간의 포격이 있었으나, 이는 독일군에게 공격 경고가 되었고 많은 독일 참호와의 방어물을 파괴하는 데 실패했다.
첫날, 영국군은 역사상 최악의 날 중 하나를 겪었다. 약 6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 중 약 20,000명이 사망했다. 많은 부대, 특히 '동료 대대(Pals Battalions)'라 불리는, 같은 지역이나 직업에서 온 친구들로 구성된 부대들이 완전히 전멸했다. 이후 몇 달간 전투는 계속되었고, 11월까지 총 120만 명의 연합군과 독일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영국은 약 420,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영토 이득은 미미했다.
1917년, 또 다른 대규모 공세가 벨기에 이프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파스헨달 전투' 또는 '제3차 이프르 전투'로 알려진 이 작전은 독일 잠수함 기지가 있는 벨기에 해안을 차지하려는 목표를 가졌다. 7월 31일 시작된 공세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비로 인해 전장이 진흙 바다로 변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11월까지 계속된 파스헨달 전투는 또 하나의 비참한 소모전이 되었다. 영국과 제국군은 약 275,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독일은 약 220,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영토 이득은 다시 미미했다. 더글러스 헤이그(Douglas Haig) 영국군 총사령관은 이 전투를 계속한 결정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솜과 파스헨달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의 가장 트라우마적인 기억이 되었다. 이 전투들은 참호전의 잔혹함, 대규모 인명 손실, 영토 이득을 위한 끝없는 투쟁을 상징했다. 그러나 군사 역사가들은 이 전투들이 독일군을 소모시키고, 영국군이 새로운 전술을 배우며, 궁극적으로 1918년 승리에 기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른 전선들: 갈리폴리,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서부전선의 교착 상태를 깨기 위해, 영국은 다른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이 중 가장 야심찬 것은 갈리폴리 캠페인이었다.
1915년 초,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을 포함한 일부 영국 지도자들은 오스만 제국(터키)을 상대로 한 작전을 제안했다. 그들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이스탄불을 위협하고, 러시아에 보급로를 열며, 발칸 반도에 새로운 전선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1915년 4월, 영국,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군이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했다. 그러나 이들은 격렬한 터키 저항에 직면했다. 지형은 험난했고, 계획은 부실했으며, 지휘는 혼란스러웠다. 여름과 가을 동안 교착 상태가 계속되었고, 질병이 창궐했다. 결국 1915년 12월부터 1916년 1월, 연합군은 철수했다. 약 250,000명의 연합군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터키 측에서도 비슷한 수준의 손실이 있었다.
갈리폴리 패배는 영국 국내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처칠은 해군 제1경(First Lord of the Admiralty) 직을 사임해야 했으며, 애스퀴스 정부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었다. 이 작전은 군사적 실패였으나, 호주와 뉴질랜드에게는 국가적 신화의 일부가 되었다. 상륙지인 '안작 코브(Anzac Cove)'는 이 두 나라의 중요한 기념장소가 되었다.
메소포타미아(현 이라크)에서, 영국은 오스만 제국과 싸우고 석유 자원과 인도로 가는 육로를 보호하기 위해 인도군을 파견했다. 초기 성공 후, 영국군은 바그다드를 향해 북진했다. 그러나 1915년 11월, 쿠트알아마라(Kut al-Amara)에서 터키군에 포위되어 1916년 4월 항복했다. 이는 영국 역사상 최대 항복 중 하나였다.
이후 영국은 메소포타미아에 더 많은 군대를 파견하고 물류를 개선했다. 1917년 3월, 영국은 바그다드를 점령했으며, 1918년 말까지 대부분의 현 이라크 지역을 장악했다.
팔레스타인과 시나이 반도에서, 영국은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집트를 보호하고 아랍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군은 에드먼드 앨런비(Edmund Allenby) 장군의 지휘 하에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T.E. 로렌스(T.E. Lawrence,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아랍 부족들의 반란을 조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앨런비는 1917년 11월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1918년 9월 메기도(Megiddo)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오스만 제국은 10월 30일 항복했다. 이러한 승리는 전쟁 후 중동 지역의 영국 영향력 확대에 기여했다.
해전과 잠수함 전쟁
개전 시 영국 해군은 세계 최강이었으며, 대서양과 북해에서 독일 해군을 압도했다. 영국의 주요 전략은 먼 거리에서 독일을 봉쇄하여 해상 무역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효과적이었으나, 중립국들과의 외교적 갈등을 야기했다.
양측 간 예상되었던 대규모 해전은 거의 없었다. 유일한 대규모 교전인 유틀란트 해전(Battle of Jutland)이 1916년 5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북해에서 벌어졌다. 영국 대함대(Grand Fleet)와 독일 공해함대(High Seas Fleet)가 충돌한 이 전투에서 영국은 더 많은 함선(14척 대 11척)과 인명(6,000명 이상 대 2,500명)을 잃었다. 그러나 전략적 승리는 영국이 거두었다. 독일 함대는 기지로 도주했으며, 이후 전쟁 내내 영국에 도전하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해상 위협은 독일의 잠수함(U-boat) 전쟁이었다. 초기에 독일 잠수함들은 '순양함 규칙(cruiser rules)'에 따라 상선을 정지시키고 승무원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후 침몰시켰다. 그러나 1915년 2월, 독일은 영국 주변 해역을 '전쟁 지역'으로 선포하고 무차별 공격을 시작했다.
1915년 5월 7일, 독일 잠수함이 여객선 루시타니아(RMS Lusitania)를 침몰시켜 미국인 128명을 포함한 1,198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미국의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독일은 일시적으로 무제한 잠수함 전을 중단했다.
1917년 2월, 독일은 다시 무제한 잠수함 전을 시작했다. 이것이 미국의 전쟁 참여 결정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1917년 4월, 영국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독일 잠수함들이 한 달에 약 90만 톤의 선박을 침몰시켜 식량과 물자 부족을 야기했다.
영국은 여러 대책으로 대응했다. 호위 함대와 초계 항공기가 증가했고, Q-함(위장 상선)이 함정으로 사용되었다. 가장 효과적인 조치는 1917년 5월부터 도입된 호위 선단(convoy) 시스템이었다. 상선들이 군함 호위 하에 함께 항해하는 이 방식은 잠수함 공격에 대한 생존율을 크게 높였다. 1918년 중반까지 잠수함 위협은 상당히 감소했다.
잠수함 전쟁의 또 다른 측면은 해상 봉쇄를 통한 독일의 기아 작전이었다. 영국의 봉쇄로 독일은 식량 부족과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1917-18년 '순괴(swede) 겨울'은 독일 시민들에게 특히 가혹했으며, 이는 독일의 사기 저하와 1918년 항복에 기여했다.
결정적 시기: 1918년 독일 공세와 연합국의 승리
1917년 말까지 상황은 연합국에게 심각했다.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 후 전쟁에서 철수했고(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탈리아는 카포레토(Caporetto)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 프랑스군은 1917년 봄 실패한 니벨 공세 후 대규모 반란을 경험했다. 미국은 4월에 참전했으나, 미군이 대규모로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독일은 1918년 봄 서부전선에서 미군이 도착하기 전 결정적 승리를 거두려 했다. 3월 21일, '마이클 작전(Operation Michael)'이라 불리는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새로운 침투 전술, 폭풍 부대(Stormtroopers), 포격 집중 등을 활용했다.
독일 공세는 초기에 성공적이었다. 영국 제5군이 무너졌고, 독일군은 1914년 이후 최대 진격을 이뤘다. 다음 몇 달 동안 계속된 일련의 공세에서 독일은 마른강에 재접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공세들은 결국 실패했다. 독일군은 보급선이 늘어났고, 사상자가 급증했으며, 병력 부족을 겪었다.
3월 26일, 연합군은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 장군을 통합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더 효과적인 공조를 이뤘다. 공세가 지속되는 동안, 미군은 매달 약 25만 명씩 도착했다. 7월 중순, 독일의 마지막 공세인 '평화 공세(Peace Offensive)'가 실패했다.
8월 8일, 연합군은 아미앵(Amiens) 전투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영국군은 탱크, 항공기, 포병, 보병의 조화로운 협력을 통해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독일군 총사령관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는 이날을 "독일군의 검은 날"이라고 불렀다.
그 후 100일간, 연합군은 계속해서 독일군을 밀어붙였다. 영국군은 힌덴부르크 선(Hindenburg Line)으로 알려진 독일의 주요 방어선을 돌파했다. 9월 말, 불가리아가 항복했고, 10월 말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도 항복했다. 독일 내에서는 혁명이 발생하여 카이저 빌헬름 2세가 11월 9일 퇴위했다.
11월 11일 오전 11시, 독일은 랭스(Rethondes)의 숲에 있는 열차에서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영국과 제국군은 약 90만 명이 전사했고, 200만 명이 부상당했다. 전체적으로 전쟁은 약 1,000만 명의 군인과 수백만 명의 민간인 목숨을 앗아갔다.
4. 전쟁의 종결과 파리 강화회의
연합국의 승리와 휴전
1918년 가을, 독일과 그 동맹국들은 연이어 군사적 패배를 당했다. 9월 29일, 불가리아가 먼저 항복했다. 10월 30일, 오스만 제국이 뮤드로스(Mudros) 휴전에 서명했다. 11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항복했고, 제국은 곧 여러 민족 국가로 분열되었다.
독일 내부에서는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식량 부족, 전쟁 피로, 군사적 패배감이 혁명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10월 말, 킬(Kiel)에서 해군 반란이 시작되었고, 이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노동자와 군인 평의회가 도시들을 장악했다. 11월 9일,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같은 날, 사회민주당의 필립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이 공화국을 선포했다.
새로운 독일 정부는 즉시 휴전을 모색했다. 11월 11일 오전 5시, 독일 대표단은 파리 북동쪽 콩피에뉴(Compiègne) 숲의 열차 안에서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은 같은 날 오전 11시에 발효되었다.
영국에서 휴전 소식은 안도와 기쁨으로 맞이했다. 런던과 다른 도시들에서 자발적 거리 축하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축하 분위기는 상실감과 비통함이 뒤섞여 있었다. 거의 모든 가정이 사랑하는 이를 잃었고, 수십만 명의 부상자들이 고통받고 있었다.
휴전 조건은 독일에게 매우 가혹했다. 독일은 점령 지역에서 철수하고, 라인란트와 브리지헤드(bridgeheads)를 연합군에게 넘겨야 했다. 모든 잠수함, 대부분의 전함, 수천 대의 항공기, 대포, 기관총이 인도되었다. 또한 연합군의 경제 봉쇄는 계속되었다.
엄밀히 말해 휴전은 일시적 전투 중단이었으며, 공식 평화 협정은 파리 강화회의에서 이뤄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협정의 가혹한 조건은 독일 내에서 '등에 칼을 맞았다(Dolchstoßlegende)'는 신화의 발전을 촉진했다. 많은 독일인들은 군대가 전장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정치인들과 혁명가들에 의해 배신당했다고 믿게 되었다.
파리 강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
1919년 1월 18일, 파리 강화회의가 베르사유(Versailles) 궁전에서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32개국이 참여했으나, 실질적 결정은 주요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고, 특히 '빅 쓰리(Big Three)'라 불리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가 주도했다.
영국 대표단은 로이드 조지가 이끌었다. 그는 '비둘기'와 '매'들 사이에서 중간 입장을 취했다. 한편으로 그는 평화롭고 안정적인 유럽을 원했고, 독일에 대한 가혹한 조건이 복수심과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1918년 12월 총선에서 승리한 다음 "독일에게 짜도록 하라(squeeze Germany until the pips squeak)"는 수사를 사용한 국내 정치적 압력을 의식하고 있었다.
주요 논쟁점 중 하나는 식민지 문제였다. 영국은 독일 식민지(탄자니아, 나미비아, 카메룬, 토고의 일부, 남태평양 섬들)와 오스만 제국 영토(팔레스타인, 이라크, 트란스요르단) 중 상당 부분을 얻었다. 이 영토들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mandates)'이 되어, 영국이나 다른 강대국들이 '독립을 위한 준비' 상태로 관리하게 되었다.
영국은 또한 독일 해군과 상선대의 해체, 독일의 군비 제한, 그리고 전쟁 책임자들의 처벌에 관심이 있었다. 또한 중동 지역의 세력 균형, 특히 오스만 제국의 분할에 큰 관심을 가졌다.
1919년 6월 28일,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조약의 주요 조항은 다음과 같다:
- 독일은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을 프랑스에, 오이펜-말메디(Eupen-Malmedy)를 벨기에에, 북부 슐레스비히(North Schleswig)를 덴마크에, 포젠(Posen)과 서프로이센(West Prussia)을 폴란드에 넘겨주어야 했다.
- 자르(Saar) 지역은 15년간 국제연맹이 관리하게 되었다.
- 라인란트(Rhineland)는 비무장화되었다.
- 독일의 모든 식민지가 박탈되었다.
- 독일군은 10만 명으로 제한되었으며, 징병제, 탱크, 전투기, 잠수함이 금지되었다.
- 독일은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막대한 배상금(금액은 나중에 결정)을 지불해야 했다.
- 새로운 국제연맹이 설립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케이네스(John Maynard Keynes)와 같은 경제학자들을 포함한 영국의 많은 관찰자들에게 비판받았다. 케이네스의 『평화의 경제적 귀결(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1919)은 조약이 독일 경제에 미칠 파괴적 영향과 유럽 전체의 회복을 저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국내 여론과, 특히 프랑스의 안보 요구는 더 관대한 접근을 어렵게 만들었다.
독일 이외에도, 다른 중앙동맹국과의 별도 조약들이 체결되었다. 생제르맹 조약(Treaty of Saint-Germain)은 오스트리아와, 트리아농 조약(Treaty of Trianon)은 헝가리와, 뇌이 조약(Treaty of Neuilly)은 불가리아와, 세브르 조약(Treaty of Sèvres)은 오스만 제국(나중에 터키와의 로잔 조약으로 대체)과 체결되었다.
새로운 국제 질서와 영국의 역할
파리 강화회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형성했으며, 영국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은 공식적으로 승전국이자 세계 최대 제국이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약화되었고 미국과 같은 새로운 강대국의 부상에 직면했다.
새로운 국제 질서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창설이었다. 이는 윌슨 대통령의 비전에서 비롯되었으나, 영국도 적극 지지했다. 연맹은 국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집단 안보를 통해 무력 충돌을 방지하며, 식민지 문제(위임통치령 시스템을 통해)를 관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영국은 연맹의 설립 회원국이자 주요 지지국이었다. 국제연맹은, 후에 유엔으로 대체되지만, 국제 협력과 다자주의의 중요한 실험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불참(미 상원이 베르사유 조약 비준을 거부함)은 처음부터 연맹의 효과성을 제한했다.
강화회의는 또한 유럽의 새로운 지도를 그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 새로운 국가들이 생겨났다. 폴란드가 재건되었고, 발트 국가들과 핀란드가 러시아 제국에서 독립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윌슨의 '민족 자결(national self-determination)' 원칙에 부분적으로 기반했으나, 실제로는 전략적, 역사적 고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은 특히 중동 지역의 재편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 1916)에 따라 오스만 제국 영토를 분할했다. 영국은 이라크, 트란스요르단(현 요르단),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령으로 획득했다. 이 시기 영국은 또한 아랍인들에게 한 약속(후세인-맥마흔 서신, Hussein-McMahon Correspondence)과 유대인들에게 한 약속(발포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 사이의 모순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마지막으로, 전쟁은 영국 제국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자치령들(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의 지위가 상승했다. 그들의 전쟁 기여는 상당했으며, 이제 그들은 국제무대에서 더 많은 자율성과 인정을 요구했다. 1926년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과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Statute of Westminster)은 이러한 변화를 공식화했으며, 영국 제국을 자치령들의 자발적 연합인 영연방(Commonwealth)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시작했다.
5. 전간기 영국 사회와 정치
전후 경기 침체와 사회적 변화
전쟁이 끝난 직후, 영국은 짧은 경기 호황을 경험했다. 중단되었던 소비재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주택 건설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1920-21년, 심각한 경기 침체가 시작되었다.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 증가, 국제 무역 감소, 그리고 전쟁 전 시장 상실은 영국 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특히 석탄, 면직물, 조선, 철강과 같은 전통 수출 산업이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실업률이 급증했다. 전국 평균은 1921-22년 약 15%였으나, 특정 지역과 산업에서는 훨씬 높았다. 웨일스 남부, 북동 잉글랜드, 중부 스코틀랜드 등 석탄과 중공업에 의존하던 지역들이 특히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영국은 경제적으로 '두 국가(two nations)'로 분화되었다: 상대적으로 번영하는 남부와 동부(자동차, 전기, 화학 등 신산업 중심)와 침체된 북부와 웨일스(전통 산업 중심).
실업과 빈곤은 사회 문제를 야기했다. 1920년대 초기의 '게디스 도끼(Geddes Axe)'로 알려진 긴축 정책은 공공 지출과 복지를 삭감했다. 1926년, 제너럴 스트라이크(General Strike)가 발생했다. 이는 석탄 산업의 임금 및 조건 분쟁에서 시작되어 여러 산업으로 확산되었다. 9일간 지속된 파업은 실패로 끝났으나, 계급 분열을 심화시켰다.
1929년 월스트리트 붕괴 이후, 세계 대공황이 영국을 강타했다. 1932년까지 실업률은 22% 이상으로 증가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70%에 달했다. 1930년대 중반,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으나, 호황은 남부와 동부 지역에 집중되었다.
사회적으로는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전쟁은 계급 관계를 일부 변화시켰다. 전통적 귀족 계층의 권위와 부가 감소했으며, 대규모 토지 소유가 줄어들었다. 중산층은 성장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자신감을 잃었다.
여성의 지위도 변화했다. 1918년, 30세 이상(특정 자격 요건 충족)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고, 1928년에는 21세 이상 모든 여성에게 확대되었다. 직업적으로, 일부 전문직이 여성에게 개방되었으나, 결혼한 여성의 고용에 대한 '결혼 장벽(marriage bar)'은 지속되었다. 문화적으로, '플래퍼(flapper)' 스타일의 등장은 더 자유로운 여성상을 반영했다.
주택 개선도 있었다. '영웅들을 위한 집(Homes for Heroes)' 캠페인은 1919년 애디슨 법(Addison Act)으로 이어져 공공 주택 건설이 촉진되었다. 1920-30년대 광범위한 교외 개발이 이루어졌으며, 자가 소유가 증가했다.
라디오와 영화 같은 새로운 대중 매체가 발전했다. BBC(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가 1922년 설립되어 1927년 국영 법인이 되었다. 대중문화의 '미국화'에 대한 우려도 있었으나, 영국인들의 여가 생활은 점차 변화했다.
정당 정치와 노동당의 부상
전간기 영국 정치는 심각한 변화를 겪었다. 가장 중요한 발전은 노동당의 부상과 자유당의 쇠퇴였다.
전쟁 전, 정치는 보수당과 자유당의 경쟁이 특징이었다. 노동당은 작지만 성장하는 제3당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노동당의 위상이 강화되었다. 1918년 노동당은 사회주의적 강령을 채택하고 당 조직을 개편했다.
1918년 총선(쿠폰 선거(Coupon Election)로 알려짐)에서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연립정부가 압승했으나, 노동당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공식 야당이 되었다. 1922년, 보수당이 연립에서 탈퇴하여 로이드 조지 정부가 무너졌다. 10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했고, 노동당은 2위, 자유당은 3위였다.
1923년,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 보수당 수상은 보호무역 문제로 총선을 실시했다. 선거 결과 보수당은 다수당이 아니게 되었고, 노동당의 램지 맥도널드(Ramsay MacDonald)가 소수 내각을 구성했다. 이는 영국 최초의 노동당 정부였다.
맥도널드의 첫 내각은 9개월만 지속되었다. 그러나 노동당은 '책임감 있는 정당(party of responsibility)'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1924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압승했으며, 볼드윈이 다시 수상이 되었다.
1929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맥도널드는 제2차 노동당 정부를 구성했으나, 곧 1929년 세계 대공황에 직면했다. 1931년, 재정 위기와 예산 삭감 문제로 내각이 분열되었다. 맥도널드는 보수당과 일부 자유당 의원들과 함께 '국민정부(National Government)'를 구성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당은 그를 '배신자'로 여겼다.
1931년 총선에서 국민정부가 압승했다. 국민정부는 명목상으로는 연립이었으나, 사실상 보수당이 지배했다. 1935년 볼드윈이 다시 수상이 되었고, 1937년에는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이 그 뒤를 이었다.
이 기간 동안 자유당은 계속해서 쇠퇴했다. 1924년 총선에서 40석으로 감소했고, 1929년에는 59석을 얻었으나, 1931년에는 다시 급감했다. 당은 '자유주의 산업 연구(Liberal Industrial Inquiry)'와 같은 이니셔티브를 통해 정책적 혁신을 시도했으나, 양당 체제에서 그 위치를 상실했다. 당내 분열, 명확한 정체성 부족, 노동당에 대한 진보적 유권자 유출 등이 그 원인이었다.
정치 문화도 변화했다. 1918년 국민대표법(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ct)으로 선거권이 크게 확대되어 모든 21세 이상 남성과 30세 이상 여성(일부 제한)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1928년에는 모든 21세 이상 남녀에게 평등한 투표권이 주어졌다. 이로 인해 계급 기반 정치가 강화되었고, 특히 노동계급 지역에서 노동당 지지가 증가했다.
여러 '제3정당'도 등장했다. 1920년대 초 아일랜드 자유국 설립으로 아일랜드 의원들이 웨스트민스터에서 철수했다(북아일랜드 제외). 공산당, 파시스트 연합(British Union of Fascists) 등 극단 정당들도 존재했으나, 소수에 머물렀다.
아일랜드 독립과 제국의 변화
아일랜드 문제는 전간기 영국 정치의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 홈룰(자치)이 약속되었으나, 1916년 부활절 봉기(Easter Rising)와 그 잔혹한 진압 이후 아일랜드 정서는 급진화되었다.
1918년 총선에서 신페인당(Sinn Féin)이 아일랜드 의석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웨스트민스터 참석을 거부하고 더블린에 자체 의회(Dáil Éireann)를 설립했다. 1919년 아일랜드 독립전쟁(또는 '불안(Troubles)')이 시작되었다. 영국군과 '블랙 앤 탠스(Black and Tans)'(특별 경찰)가 아일랜드 공화군(IRA)과 충돌했다.
1921년 7월 휴전이 합의되었고, 12월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26개 카운티로 구성된 '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이 영연방 내 자치령으로 설립되었다. 북부 6개 카운티(북아일랜드)는 영국 내에 남았다.
이 타협은 아일랜드 내전(1922-23)을 촉발했다.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가 이끄는 조약 지지자들과 에이먼 데 발레라(Éamon de Valera)가 이끄는 반대자들 간의 내전에서 자유국 정부가 승리했다. 그러나 분단은 오랜 비극의 씨앗을 심었다.
1930년대, 데 발레라가 권력을 잡고 영국과의 연결을 점차 약화시켰다. 1937년 새 헌법은 '에이레(Éire)'라는 더 독립적인 국가를 선언했다. 1949년, 아일랜드는 마침내 공화국이 되어 영연방에서 완전히 탈퇴했다.
더 넓은 제국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자치령(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아일랜드 자유국)은 전쟁 중 기여로 인해 더 큰 자율성을 요구했다. 1926년 밸푸어 보고서(Balfour Report)는 자치령들을 "자치적 공동체... 영국 제국의 일원"으로 정의했다.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은 이를 법적으로 성문화했다.
영국의 '비백인' 식민지에서도 민족주의가 부상했다. 인도에서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와 인도 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는 비폭력 저항 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잘리안왈라 바그(Jallianwala Bagh) 학살(아미차르에서 영국군이 무고한 시위대를 사살)은 분노를 증폭시켰다.
영국은 점진적 개혁으로 대응했다. 1919년 인도통치법(Government of India Act)은 제한적 자치권을 부여했고, 1935년 추가 법안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완전한 독립 요구는 계속되었다.
이집트에서는 1919년 혁명 이후 1922년 일방적 독립이 선언되었으나, 영국은 수에즈 운하, 국방, 외교 문제에 대한 통제를 유지했다. 1936년 영국-이집트 조약은 일부 주권을 양도했으나, 영국 군대는 수에즈 운하 지역에 남았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발포어 선언(1917)은 유대인 '민족 가정(national home)'을 약속했으나, 아랍인들도 독립을 기대했다. 1920-30년대 유대인 이민이 증가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고, 1936-39년 아랍 반란이 발생했다. 1939년 백서(White Paper)는 유대인 이민을 제한했으나, 양측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라크(1932)와 트란스요르단(1946)은 형식적 독립을 얻었으나, 영국의 영향력은 지속되었다. 영국은 전간기에 공식적으로 제국을 확장했으나(위임통치령 포함), 실제로는 다양한 독립 요구와 재정적 압박 사이에서 제국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경제 위기와 대공황의 영향
1920-30년대 영국 경제는 여러 구조적 문제에 직면했다. 영국은 더 이상 19세기의 지배적 산업 국가가 아니었다. 미국, 독일, 일본이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했으며, 공산품에 대한 세계 수요는 감소했다.
영국의 전통 기간산업(석탄, 면직물, 조선, 철강)이 특히 어려움을 겪었다. 이 산업들은 해외 경쟁, 기술 낙후, 관리 비효율성, 그리고 세계 시장 점유율 감소에 시달렸다. 1913년 영국은 세계 석탄 수출의 약 60%를 차지했으나, 1929년에는 37%로 감소했다.
1925년, 윈스턴 처칠 재무장관은 금본위제 복귀를 결정했다. 파운드는 전쟁 전 수준(1파운드=4.86달러)으로 고정되었는데, 이는 영국 통화를 과대평가해 수출을 저해했다. 이 결정은 특히 수출 산업에 해로웠으며, 1926년 총파업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29년 10월 월스트리트 주식시장 붕괴 이후, 세계 대공황이 영국을 강타했다. 세계 무역이 급감하고 금융 위기가 발생하면서 영국의 어려움이 심화되었다. 1932년까지 공식 실업률은 22.5%까지 치솟았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영국의 대응은 처음에는 전통적이었다. 램지 맥도널드의 제2차 노동당 정부(1929-31)는 실업 보험과 공공사업에 의존했다. 그러나 재정 위기가 심화되자 정부는 "시장의 힘"에 굴복했다. 1931년 금본위제는 결국 포기되었고, 파운드화 가치가 30% 하락했다.
1931년 위기 후, '국민정부(National Government)'는 수입 관세를 도입했다. 1932년 오타와 협정은 제국 내 특혜 무역 체계를 수립했다. 이러한 보호주의적 조치는 전통적 자유무역 정책의 포기를 의미했으나, 일부 산업 부문에는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 정부는 또한 산업 합리화와 구조조정을 장려했다. 1930년 석탄광산법(Coal Mines Act)은 강제 합병과 생산 쿼터를 도입했다. 유사한 조치들이 철강과 면직물 산업에도 적용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영국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저금리, 주택 붐, 신산업(자동차, 전기, 화학 등) 성장이 이를 이끌었다. 그러나 회복은 지역적으로 불균등했다. 잉글랜드 남동부, 미들랜드, 런던 주변 지역은 번영했으나,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잉글랜드의 산업 지역은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지역적 분화는 '북-남 격차(North-South divide)'라는 지속적 패턴을 형성했다.
복지 정책도 경제 위기에 영향을 받았다. 1920년대 초 '게디스 도끼'로 사회 지출이 삭감되었고, 1931년 위기 이후 실업 급여가 10% 삭감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 대처(neoconservative)적 조치들이 도입되었다. 1934년 실업법(Unemployment Act)은 실업부조위원회(Unemployment Assistance Board)를 설립했고, 주택 정책과 도시 재개발이 확대되었다.
전반적으로, 전간기 영국 경제는 구조적 문제와 정책적 혼란을 겪었다. 세계 시장에서의 입지 약화, 전통 산업의 쇠퇴, 그리고 금융 중심적 접근은 지속적인 도전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신산업 성장, 서비스 부문 확대, 내수 시장 발전과 같은 미래 발전의 씨앗도 심어졌다.
6. 파시즘의 위협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의 길
유럽의 파시즘 부상과 영국의 반응
1920-30년대 유럽에서 파시즘과 권위주의가 부상했다. 1922년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집권, 1933년 히틀러의 독일 나치당 집권이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스페인,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에서도 유사한 권위주의 체제가 등장했다.
영국에서도 소규모 파시스트 운동이 존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스왈드 모슬리(Oswald Mosley)가 1932년 설립한 영국파시스트연합(British Union of Fascists, BUF)이었다. 모슬리는 전 노동당 장관으로, 대공황 대응책으로 케인스주의적 공공사업과 경제 계획을 주장했다가 거부당한 후 극우로 전향했다.
BUF는 반유대주의, 민족주의, 기업주의를 주장했다. 1934년 올림피아(Olympia) 집회에서의 폭력 사태 이후 대중적 지지가 감소했으나, 1936-37년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잠시 세력을 확대했다. 1936년 케이블 스트리트 전투(Battle of Cable Street)에서는 반파시스트 시위대가 모슬리의 행진을 저지했다.
영국 정치 주류는 파시즘을 거부했다. 1936년 공공질서법(Public Order Act)은 정치적 유니폼 착용과 준군사적 조직을 금지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모슬리와 다른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구금되었다.
영국 여론은 전반적으로 반파시스트였으나, 국내 파시즘보다 해외 파시즘에 더 관심이 있었다. 1936-39년 스페인 내전은 영국 정치를 양극화했다. 좌파는 공화파를 지지했고, 약 2,500명의 자원자가 '국제여단(International Brigades)'에 참가했다. 영국 정부는 불간섭 정책을 채택했지만, 이는 프랑코 반란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일본의 만주(1931) 침공과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1935) 침공에 대한 영국의 미온적 대응은 국제연맹의 약점을 드러냈다. 평화주의와 집단 안보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었다.
유화정책과 그 비판자들
1930년대 영국의 대독일 정책은 '유화정책(appeasement)'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히틀러의 일부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전쟁을 피하려는, 주로 네빌 체임벌린 총리와 연관된 접근법이었다.
유화정책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먼저, 제1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영국인들은 그러한 대량 살상의 반복을 피하고자 했다. 둘째, 경제적 어려움으로 군비 지출 확대가 어려웠다. 셋째, 영연방 자치령들(특히 캐나다)이 유럽 문제 개입에 소극적이었다. 넷째, 제국의 글로벌 책임이 영국의 유럽 개입 능력을 제한했다. 다섯째, 소련에 대한 불신으로 히틀러에 대항하는 동맹 형성이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히틀러의 일부 요구(특히 베르사유 조약 수정)가 정당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유화정책은 단계적으로 발전했다. 1935년 영국-독일 해군 협정은 독일의 재무장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1936년 3월 히틀러가 라인란트를 재무장했을 때, 영국은 군사적 대응을 거부했다. 1938년 3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했을 때도 영국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1938년 9월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란트 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히틀러는 독일계가 많은 이 지역의 병합을 요구했다. 체임벌린은 세 차례 독일을 방문했고, 결국 뮌헨 협정(Munich Agreement)에 서명했다. 이 협정으로 수데텐란트는 독일에 양도되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체임벌린은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for our time)"를 가져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1939년 3월,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했다. 이는 뮌헨 협정 위반이었고, 영국 정책의 전환점이 되었다. 체임벌린은 폴란드에 안전 보장을 제공했고, 징병제를 도입했다.
유화정책에 대한 주요 비판자들도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윈스턴 처칠이었다. 그는 1930년대 내내 독일의 재무장에 대해 경고하고, 영국 방위력 강화를 촉구했다. 앤서니 이든(Anthony Eden)은 1938년 외무장관에서 사임하여 체임벌린의 정책에 항의했다. 영국 노동당은 뮌헨 협정에 반대했으며, 집단 안보와 국제연맹 강화를 지지했다.
군사적으로, 영국은 1930년대 후반까지 재무장에 충분히 투자하지 않았다. 그러나 RAF(Royal Air Force)의 전투기 생산, 특히 허리케인(Hurricane)과 스핏파이어(Spitfire) 생산이 증가했다. 레이더 방어 시스템 개발도 시작되었다. 이러한 준비는 나중에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화정책은 오랫동안 실패한 정책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역사학자들은 이 정책이 영국에 귀중한 재무장 시간을 벌어주었다고 지적한다. 체임벌린이 선택한 경로가 불가피했는지, 다른 접근법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을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전쟁의 발발과 영국의 참전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 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약)을 체결했다. 이 충격적인 합의는 동유럽 분할에 관한 비밀 의정서를 포함했다. 이제 독일은 서방의 개입 없이 폴란드를 공격할 수 있었다.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응답이 없자 전쟁을 선포했다. 체임벌린은 엄숙하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제 우리는 전쟁 중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참전 결정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처칠은 해군 제1경으로 내각에 복귀했고, 노동당은 정부를 지지했다(비록 연립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긴급 권한이 정부에 부여되었고, 전시 조치들이 신속히 도입되었다.
그러나 1939-40년 겨울, 서부전선에서는 거의 전투가 없었다(이른바 '가짜 전쟁(Phoney War)'). 폴란드는 9월 말까지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되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효과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해상에서는 즉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9월 3일, 독일 잠수함이 여객선 아테니아(SS Athenia)를 침몰시켜 112명이 사망했다. 영국은 해상 봉쇄를 시작했고, 독일은 잠수함전으로 대응했다.
1940년 4월 9일,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노르웨이에 원정군을 파견했으나 실패했다. 이 패배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촉발했다. 5월 7-8일 '노르웨이 토론(Norway Debate)' 중, 영국 하원에서 체임벌린에 대한 신임이 크게 감소했다.
5월 10일, 독일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같은 날, 체임벌린은 사임했고, 윈스턴 처칠이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노동당과 자유당이 참여한 이 정부는 진정한 '국민 연립(National Coalition)'이었다.
처칠의 첫 연설은 그의 결연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저는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 외에는 제공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정책은 무엇입니까? 전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빠르게 악화되었다.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영국은 덩케르크(Dunkirk)에서 약 338,000명의 영국과 프랑스 군인들을 철수시켰다('다이너모 작전(Operation Dynamo)'). 이는 군사적 패배였으나, 국내에서는 '덩케르크 정신(Dunkirk Spirit)'의 상징이 되었다.
6월 22일, 프랑스가 항복했다. 영국은 이제 유럽 대륙에서 홀로 나치 독일에 맞서야 했다. 처칠은 6월 4일 그의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를 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이며, 우리는 상륙지에서 싸울 것이며...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20년 만에, 영국은 다시 대규모 유럽 전쟁에 휘말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부터 위험이 더 컸다. 본토 침공 위협, 식민지와의 통신선 위험, 나치 독일의 이데올로기적 위협 등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결론: 전간기의 역사적 의미
제1차 세계대전의 장기적 교훈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 사회와 정치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전쟁이 끝난 지 20년도 되지 않아 영국은 또 다른 세계 대전에 휘말렸다. 두 전쟁 사이의 기간은 이제 '전간기(interwar period)'로 정의되며, 1914-1945년은 종종 '새로운 30년 전쟁'으로 묘사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첫 번째 유산은 인적 손실이었다. 약 75만 명의 영국인과 제국 시민들이 전사했고, 150만 명이 부상당했다. 이는 한 세대의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를 의미했다. 많은 지역사회, 특히 '동료 대대'를 구성했던 곳들은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입었다. 유럽 전역의 전쟁 기념비와 도시마다 세워진 '전쟁 기념비(war memorials)'는 이 슬픔의 가시적 표현이었다.
전쟁은 또한 심각한 경제적 결과를 가져왔다. 영국은 미국에 큰 빚을 지게 되었고, 많은 해외 자산을 팔아야 했다. 파운드의 국제적 지위가 약화되었고, 영국은 더 이상 세계 금융의 명백한 중심지가 아니었다.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시장 혼란은 전통 산업에도 타격을 입혔다.
사회적으로, 전쟁은 계급 관계를 변화시켰다. 여성의 역할이 확대되었고, 참정권 확대로 더 민주적인 정치 시스템이 발전했다. 국가가 경제와 일상생활에 더 많이 개입하게 되었다.
국제적으로, 베르사유 체제는 새로운 불안정성의 씨앗을 심었다. 독일의 분노, 동유럽의 불안정한 국경선, 중동의 인위적 분할 등이 미래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국제연맹은 강대국 협력을 위한 야심찬 실험이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전쟁은 영국인들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참호의 경험'은 문학, 예술, 기념 문화 등에 반영되었다. 윌프레드 오웬(Wilfred Owen), 시그프리드 사순(Siegfried Sassoon)과 같은 '전쟁 시인(war poets)'들의 작품은 전쟁의 잔혹함과 무의미함을 표현했다. 로버트 그레이브스(Robert Graves)의 『전쟁과의 작별(Goodbye to All That)』과 같은 회고록은 전쟁의 심리적 상흔을 기록했다.
전쟁의 기억은 정치적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감정이 1930년대 평화주의와 유화정책의 배경이 되었다. 솜과 파스헨달의 대학살을 기억하는 정치인들은 또 다른 전쟁을 피하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 전쟁 사이의 영국: 쇠퇴의 시작인가, 적응의 과정인가?
전간기 영국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다양하다. 전통적으로 이 시기는 '쇠퇴의 서사(narrative of decline)'로 묘사되어 왔다. 이 관점에서, 영국은 경제적 침체, 제국의 약화, 국제적 영향력 감소를 경험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완전한 쇠퇴로 이어지는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이러한 쇠퇴의 증거는 분명했다. 영국의 세계 제조업 점유율은 1913년 약 31%에서 1938년 15%로 감소했다. 파운드의 국제적 지위가 약화되었고, 미국 달러가 점차 주요 국제 통화로 부상했다. 자치령이 더 많은 자율성을 획득하면서 제국은 느슨해졌고, 인도와 같은 식민지에서는 독립 요구가 강화되었다.
국제 무대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미국과 소련 같은 새로운 강대국 사이에서 약화되었다. 유화정책은 종종 약점과 우유부단함의 상징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최근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단순한 쇠퇴보다 복잡한 적응과 전환의 과정으로 재해석한다. 영국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구조적 변화도 진행 중이었다. 전통 산업이 쇠퇴하는 동안, 자동차, 항공, 전기, 화학과 같은 새로운 산업이 성장했다. 서비스 부문, 특히 소매, 레저, 금융 서비스가 확대되었다.
제국은 변화했지만, 영연방의 발전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영향력이 유지되었다. 영국의 문화적, 상업적, 금융적 영향력은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중요했다.
국내적으로, 이 기간은 더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로의 진전을 보였다. 1918년과 1928년의 선거권 확대, 1919년의 주택법(Housing Act), 공공 교육의 점진적 확대 등이 있었다. 그러나 계급 불평등과 지역적 격차는 지속되었다.
이 양면적 해석은 전간기 영국의 복잡한 현실을 더 잘 반영한다. 영국은 쇠퇴하고 있었으나,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과 세계 질서 변화라는 도전에 적응하는 과정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의 불가피한 길?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의 경로가 불가피했는가? 이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중요한 논쟁 주제다.
결정론적 관점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의 결함, 특히 독일에 대한 가혹한 조건과 영토 재편이 미래 갈등의 씨앗을 심었다고 본다. 세계 경제 시스템의 불안정성과 1929년 대공황은 극단주의 정치를 촉진했다. 국제연맹의 약점은 집단 안보의 실패를 의미했다.
이러한 구조적 요인들이 중요했지만, 개인의 결정과 우연적 요소도 중요했다. 히틀러의 부상과 나치 독일의 팽창주의적 정책이 없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적어도 그 형태와 시기가 달랐을 것이다.
유화정책에 대한 평가도 분열되어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처칠의 견해를 따라 이를 심각한 실수로 보지만, 다른 이들은 영국이 재무장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었다고 주장한다. 뮌헨 협정이 없었다면, 영국은 1938년 전쟁에 더 취약했을 수 있다.
소련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은 히틀러에게 폴란드 침공의 자유를 주었다. 서방 국가들과 소련 간의 불신은 히틀러에 대한 공동 전선 형성을 방해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고립주의는 1930년대 국제 체제의 균형을 약화시켰다. 미국이 더 적극적인 국제적 역할을 담당했다면, 히틀러를 저지하는 것이 더 쉬웠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완전히 불가피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생긴 깊은 상처와 그에 따른 세계 질서의 불안정성은 분명 또 다른 갈등의 가능성을 높였다. 전간기 영국의 경험은 전쟁과 평화, 제국의 쇠퇴와 적응, 위기와 회복력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이 시기는 현대 영국과 세계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