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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역사 기본 22. 프랑코 사후 전환기(Transición)와 입헌군주국 수립
프랑시스코 프랑코의 사망 이후 스페인은 독재 체제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는 '전환기(Transición)'로 불리며, 스페인이 폐쇄적 독재 국가에서 현대적 민주주의 국가로 평화롭게 변모한 특별한 사례로 세계사에 기록되고 있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내전이나 혁명 없이 이루어진 것은 정치적 지도자들의 타협과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프랑코 사후 초기 상황과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등극
1975년 11월 20일, 36년간 스페인을 통치했던 프랑시스코 프랑코가 사망했다. 프랑코는 생전에 후안 카를로스 왕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고, 이에 따라 프랑코 사망 이틀 후인 11월 22일 후안 카를로스는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했다.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가 독재 체제를 지속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왕은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즉위 직후부터 스페인의 민주화를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모든 스페인 국민의 왕"이 되겠다고 선언하며 화합과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 당시 스페인 사회는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고, 국제적으로도 스페인의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아리아스 나바로와 초기 개혁 시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했을 당시 스페인의 총리는 프랑코가 임명한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Carlos Arias Navarro)였다. 아리아스 나바로는 프랑코 체제의 핵심 인물로, 제한적인 정치 개혁만을 추진했다. 그의 '아리아스 정신(Espíritu de Arias)'으로 불리는 개혁안은 실질적인 민주화보다는 프랑코 체제의 연속성에 무게를 두었다.
이러한 제한적 개혁에 반대하는 시위와 파업이 전국적으로 발생했고, 특히 바스크 지방에서는 분리주의 단체 ETA의 테러 활동이 격화되었다. 아리아스 나바로 정부는 이러한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강경책을 사용했고, 이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아리아스 나바로의 개혁 의지가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1976년 7월 그를 해임했다. 이는 왕이 민주화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결정이었다.
아돌포 수아레스와 민주화의 가속화
아리아스 나바로의 후임으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아돌포 수아레스(Adolfo Suárez)를 총리로 임명했다. 이 임명은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주었는데, 수아레스가 프랑코 체제에서 요직을 역임했지만 상대적으로 젊고(44세) 개혁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아레스는 취임 직후부터 과감한 민주화 조치를 시행했다. 1976년 9월, 그는 '정치 개혁을 위한 법률(Ley para la Reforma Política)'을 제안했다. 이 법안은 프랑코 체제의 핵심 기관인 코르테스(Cortes, 의회)에서 통과되어야 했는데, 놀랍게도 프랑코 체제 하에서 임명된 의원들이 425명 중 425명의 찬성으로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프랑코 체제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해체하는 '해라키리(harakiri)'로 불렸다.
이 법안은 1976년 12월 국민투표에서 94%의 찬성으로 승인되었고, 이로써 스페인은 양원제 의회와 비례대표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시작했다.
수아레스는 또한 1977년 2월 정치범 사면, 노동조합 합법화, 언론 자유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는 1939년 이후 불법화되었던 스페인 공산당(PCE)의 합법화였다. 이 결정은 군부와 극우 세력의 강한 반발을 샀지만, 수아레스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모든 정치 세력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7년 총선과 몬클로아 협약
1977년 6월 15일, 프랑코 체제 이후 첫 민주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수아레스가 이끄는 중도민주연합(UCD)이 승리했고, 펠리페 곤살레스의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이 제2당이 되었다. 공산당과 극우 세력은 예상보다 적은 표를 얻었다. 이 선거는 스페인 국민들이 극단적인 이념보다 온건한 개혁을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선거 이후 수아레스 정부는 민주적 헌법 제정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동시에 석유 파동으로 인한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는데, 인플레이션이 26%에 달하고 실업률이 급증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주요 정당들은 1977년 10월 '몬클로아 협약(Pactos de la Moncloa)'을 체결했다.
이 협약은 경제 안정화와 정치 개혁에 관한 광범위한 합의를 담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임금 인상 억제, 재정 긴축, 통화 정책 개혁 등의 내용을 포함했고, 정치적으로는 언론, 형법, 집회 자유 등에 관한 민주적 개혁을 약속했다. 몬클로아 협약은 정부, 기업, 노동조합 간의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민주화를 진전시키는 모델로 평가받았다.
1978년 헌법 제정과 입헌군주제 확립
민주화 과정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1978년 스페인 헌법의 제정이었다. 헌법 초안 작성은 주요 정당들의 대표 7인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담당했다. 이들은 좌우 이념을 초월하여 모든 스페인 국민이 수용할 수 있는 헌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1978년 헌법은 다음과 같은 핵심 내용을 포함했다:
- 스페인을 사회적·민주적 법치국가로 규정
- 입헌군주제 채택, 국왕은 국가 원수이자 군 최고 사령관이지만 실질적 권한은 제한됨
- 양원제 의회(하원인 국민의회와 상원) 구성
- 자치지역(Comunidades Autónomas) 제도 도입, 지방 분권화 인정
- 기본권과 자유 보장
- 삼권분립 원칙 확립
이 헌법은 1978년 12월 6일 국민투표에서 88%의 찬성으로 승인되었고, 12월 29일 공포되었다. 새 헌법은 프랑코 시대의 중앙집권적·권위주의적 국가에서 민주적·다원적·분권적 국가로의 전환을 상징했다.
자치지역 체제의 수립
1978년 헌법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지방 자치를 인정한 것이었다. 이는 프랑코 시대의 강력한 중앙집권화에 대한 반발로, 특히 바스크와 카탈루냐 같은 역사적·문화적 특수성을 가진 지역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였다.
헌법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한 자치권 획득을 규정했다. 제143조는 일반적인 자치권 획득 과정을, 제151조는 보다 신속하고 광범위한 자치권 획득 과정을 규정했다. 바스크와 카탈루냐는 '역사적 민족(nacionalidades históricas)'으로 인정받아 신속히 광범위한 자치권을 얻었고, 점차 다른 지역들도 자치권을 획득했다.
1983년까지 스페인은 17개의 자치지역(Comunidades Autónomas)과 2개의 자치시(Ceuta와 Melilla)로 구성된 '자치지역 국가(Estado de las Autonomías)'가 되었다. 각 자치지역은 자체 의회와 정부를 가지고 교육, 보건, 문화, 도시 계획 등의 영역에서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했다.
이 체제는 연방제는 아니지만 상당한, 스페인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국가 통합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자치권의 범위와 한계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민주화 과정의 위기: 군부 쿠데타 시도
민주화 과정이 순탄하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군부와 극우 세력 일부는 프랑코 체제의 해체와 특히 바스크·카탈루냐에 대한 자치권 부여에 강하게 반발했다. 또한 ETA의 지속적인 테러 활동(1978-1980년 사이에만 250명 이상이 사망)은 민주화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켰다.
1981년 2월 23일, 안토니오 테헤로(Antonio Tejero) 중령이 이끄는 무장 민간경비대가 하원 본회의장을 점거하는 쿠데타를 시도했다. 수아레스의 후임 총리 지명을 위한 투표가 진행 중이던 의회에 테헤로와 200여 명의 무장 경비대가 난입해 의원들을 인질로 잡았다. 동시에 발렌시아에서는 밀란스 델 보스크(Jaime Milans del Bosch) 장군이 전차를 동원해 도시를 점령했다.
이 위기 상황에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왕은 군복을 입고 TV에 출연해 쿠데타를 규탄하고 헌법 수호를 천명했으며, 군 수뇌부에 직접 전화해 쿠데타 지지를 거부하도록 설득했다. 결국 쿠데타는 18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고,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당 체제의 재편과 사회당 정권의 등장
1982년 10월 총선에서 펠리페 곤살레스가 이끄는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프랑코 사망 7년 만에 좌파 정당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곤살레스는 1982년부터 1996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하며 스페인의 현대화와 유럽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수아레스의 중도민주연합(UCD)은 내부 갈등으로 와해되었고, 마누엘 프라가(Manuel Fraga)가 이끄는 국민동맹(Alianza Popular, 후에 국민당 Partido Popular로 발전)이 주요 보수 정당으로 부상했다. 이로써 사회당과 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양당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전환기의 특징과 평가
스페인의 전환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 개혁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Consenso): 정치 엘리트들은 이념적 차이를 넘어 민주화를 위해 협력했다.
- 점진적 변화: 혁명이나 급진적 단절 없이 법적·제도적 경로를 통해 변화가 이루어졌다.
- 과거사 청산의 유보: 내전과 프랑코 시대의 책임 규명보다는 미래 지향적 화해를 우선시하는 '망각의 협약(Pacto del Olvido)'이 암묵적으로 성립했다.
- 시민사회의 성숙: 스페인 시민들은 극단적 이념보다 민주주의와 안정을 선택했다.
- 군주제의 역할: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민주화의 조정자이자 보증인 역할을 했다.
스페인의 전환기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평화적 이행 모델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프랑코 체제와의 급진적 단절 없이 이루어진 점, 과거사 청산이 불충분했던 점 등을 비판하기도 한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역사적 기억(Memoria Histórica)' 운동이 등장하면서 내전과 독재 시기의 과거사 정리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전환기 이후의 스페인
1986년 스페인은 유럽공동체(현 유럽연합)에 가입했고, 같은 해 국민투표를 통해 NATO 잔류를 결정했다. 이로써 스페인은 국제 사회에 완전히 통합되었고, 민주주의 체제도 공고화되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세비야 엑스포는 민주화와 현대화에 성공한 새로운 스페인의 모습을 세계에 보여주는 무대가 되었다. 스페인 경제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강한 성장세를 보였고, 문화적으로도 '모비다(Movida)' 운동으로 상징되는 창조적 르네상스를 경험했다.
그러나 지역 자치와 국가 통합 사이의 균형, 과거사 청산, 경제적 불평등 문제 등 전환기에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은 오늘날까지 스페인 사회의 중요한 쟁점으로 남아있다.
스페인의 '전환기'는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보편적 과제를 평화적·점진적으로 해결한 사례로, 그 성과와 한계는 유사한 이행을 경험하는 다른 국가들에게 중요한 참고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