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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역사 기본 2. 로마 제국의 히스파니아(Hispania)
이베리아 반도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히스파니아(Hispania)'라고 불리게 된 이 시기는 현대 스페인의 문화적, 언어적, 사회적 기반이 형성된 중요한 시대였다. 로마는 약 600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며 깊은 영향을 남겼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스페인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로마의 히스파니아 정복
로마의 이베리아 반도 정복은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1년)에서의 승리로 시작되었다. 카르타고를 물리친 로마는 이베리아 반도 남동부 지역을 장악했으나, 반도 전체를 완전히 통제하기까지는 약 200년이 더 걸렸다.
로마는 이베리아 반도를 초기에 두 개의 주(provincia)로 나누어 관리했다:
- 히스파니아 시테리오르(Hispania Citerior): '가까운 히스파니아'라는 뜻으로, 동부와 북동부 지역을 포함
-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Hispania Ulterior): '먼 히스파니아'라는 뜻으로, 남부와 서부 지역을 포함
그러나 토착 부족들, 특히 북부와 중부의 켈트-이베리아 부족들은 강력히 저항했다. 누만티아(Numantia) 전투는 이러한 저항의 상징적인 사례다. 기원전 133년, 로마 장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가 누만티아 도시를 포위하여 정복했지만, 주민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보다 집단 자살을 선택했다고 전해진다.
북부 지역의 칸타브리(Cantabri)와 아스투레스(Astures) 부족들은 특히 로마에 대한 저항이 격렬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기원전 29-19년에 직접 칸타브리아 전쟁(Cantabrian Wars)을 지휘했고, 이 전쟁의 승리로 마침내 이베리아 반도 전체가 로마의 통제 아래 들어오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히스파니아는 세 개의 주로 재편되었다:
-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Hispania Tarraconensis): 북부와 동부 지역
- 히스파니아 바에티카(Hispania Baetica): 과달키비르(당시 바에티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
- 루시타니아(Lusitania): 현재의 포르투갈과 스페인 서부 지역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3세기 말)에는 행정 구역이 더 세분화되어 히스파니아와 모리타니아 틴기타나(북아프리카 일부)를 포함한 '히스파니아 교구(Diocesis Hispaniarum)'가 형성되었다.
로마화(Romanization) 과정
히스파니아의 로마화는 단순한 군사적 정복을 넘어 광범위한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수반했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은 여러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도시 건설과 인프라
로마는 히스파니아 전역에 계획도시들을 건설했다. 대표적인 로마 도시로는:
- 타라코(Tarraco, 현재의 타라고나):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의 수도
- 코르두바(Corduba, 현재의 코르도바): 히스파니아 바에티카의 수도
- 에메리타 아우구스타(Emerita Augusta, 현재의 메리다): 루시타니아의 수도
- 카이사라우구스타(Caesaraugusta, 현재의 사라고사)
- 발렌티아(Valentia, 현재의 발렌시아)
- 바르키노(Barcino, 현재의 바르셀로나)
이러한 도시들은 로마식 도시 계획에 따라 건설되었으며, 포럼(forum, 광장), 신전, 원형 경기장(amphitheatre), 극장, 공중목욕탕(thermae) 등의 공공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로마는 또한 놀라운 토목 기술로 히스파니아 전역에 인프라를 구축했다:
- 도로망: 총 연장 3만 킬로미터가 넘는 도로가 건설되어 제국 전체를 연결했다. 메리다의 "은의 길(Via de la Plata)"이나 타라고나에서 카디스까지 이어지는 "아우구스타 길(Via Augusta)" 같은 주요 도로들은 오늘날까지도 흔적이 남아있다.
- 교량: 세고비아의 수도교, 알칸타라 다리 등 뛰어난 내구성을 자랑하는 교량들이 건설되었다.
- 상하수도 시스템: 세고비아 수도교와 같은 대규모 수도교를 통해 도시에 깨끗한 물을 공급했다.
언어와 법
로마화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는 라틴어의 보급이었다. 처음에는 행정과 상업 언어로 도입된 라틴어는 점차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토착 언어들은 점차 사라지고, 구어 라틴어(Vulgar Latin)가 널리 퍼졌다. 이 구어 라틴어는 후에 스페인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포르투갈어 등 이베리아 반도의 로망스어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로마법 또한 히스파니아에 도입되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로마법의 보호를 받았으며, 카라칼라 황제의 212년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 이후에는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로마법의 원칙들은 훗날 스페인 법체계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경제와 무역
히스파니아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경제적 자원이었다. 광물 자원(금, 은, 구리, 주석, 납 등)이 풍부했고, 특히 리오틴토(Rio Tinto) 광산은 제국의 주요 은 공급원이었다. 농업 생산물로는 올리브 오일, 와인, 곡물, 가룸(garum, 생선 소스)이 제국 전역으로 수출되었다.
바에티카 지방의 올리브 오일은 특히 유명했으며, 로마까지 대량으로 수출되었다. 고고학자들은 로마의 테스타초(Testaccio) 언덕에서 히스파니아에서 온 수많은 앰포라(amphora, 도자기 용기) 조각들을 발견했는데, 이는 당시 무역의 규모를 보여준다.
해안 도시들(가데스, 카르타게나, 타라코 등)은 지중해 무역망에 통합되어 번창했다. 히스파니아 상인들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 활동했으며, 히스파니아 제품들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사회와 문화
로마 시대의 히스파니아 사회는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상층부에는 로마에서 파견된 관리들과 현지 엘리트들이 있었고, 농촌 지역에는 소작농들과 노예들이 있었다. 도시에는 활발한 상공업자 계층이 형성되었다.
문화적으로는 로마의 영향이 강했지만, 토착 요소들과의 혼합도 이루어졌다. 종교적으로는 로마의 신들(주피터, 유노, 미네르바 등)이 숭배되었으나, 현지 신들과 동일시되거나 함께 숭배되는 경우가 많았다. 2세기부터는 동방 신비 종교들(미트라교, 이시스 숭배 등)도 전파되었고, 3세기부터는 기독교가 점차 퍼지기 시작했다.
교육 면에서는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이 그라마티쿠스(grammaticus)나 레토르(rhetor)에게 수학하며 고전 문학, 수사학, 철학 등을 배웠다. 코르두바, 타라코 등 주요 도시들은 문화의 중심지로 도서관과 학교들이 있었다.
히스파니아 출신 저명 인물들
로마 시대 히스파니아는 많은 저명 인물들을 배출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로마 제국의 정치, 문화,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철학자와 작가들
-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경-서기 65년): 코르두바 출신의 스토아 철학자이자 비극 작가.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으며, 로마 스토아 철학의 주요 인물이다. 그의 저서들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루카누스(Marcus Annaeus Lucanus, 39-65년): 세네카의 조카로, 코르두바 출신의 시인. "파르살리아(Pharsalia)"라는 서사시를 통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내전을 묘사했다.
- 마르티알리스(Marcus Valerius Martialis, 38-102년경): 빌빌리스(현재의 칼라타유드 근처) 출신의 시인. 에피그램(짧은 풍자시)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 콜루멜라(Lucius Junius Moderatus Columella, 4-70년경): 가데스(현재의 카디스) 출신으로, "농업론(De Re Rustica)"을 통해 로마의 농업 기술을 상세히 기록했다.
- 퀸틸리아누스(Marcus Fabius Quintilianus, 35-100년경): 칼라구리스(현재의 칼라오라) 출신의 수사학자. "수사학 교육(Institutio Oratoria)"은 수사학과 교육에 관한 중요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황제들
- 트라야누스(Marcus Ulpius Traianus, 53-117년): 이탈리카(현재의 산티폰세) 출신으로, 98-117년 재위. 로마 제국이 최대 영토에 이른 시기를 이끌었으며, "최선의 군주(Optimus Princeps)"로 불렸다.
-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 76-138년): 트라야누스의 친척으로 이탈리카 출신. 117-138년 재위. 문화와 예술을 장려했으며, 제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국경을 강화하고 행정을 개혁했다.
- 테오도시우스 1세(Flavius Theodosius, 347-395년): 가우케 출신. 379-395년 재위.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식화한 마지막 로마 제국의 통일 황제였다.
이러한 인물들의 활약은 히스파니아가 단순한 로마의 변방이 아니라, 제국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에 깊이 통합되었음을 보여준다.
위기와 변화의 시기 (3-5세기)
3세기에 접어들면서 로마 제국은 내외부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 시기는 '3세기 위기'로 알려져 있으며, 히스파니아 역시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60년대에는 프랑크족과 알라만니족의 침입이 있었고, 도시들이 약탈당하면서 성벽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경제적으로도 무역이 감소하고 도시 생활이 위축되는 경향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년 재위)와 콘스탄티누스(306-337년 재위) 황제의 개혁으로 제국이 일시적으로 안정을 되찾았지만, 사회 구조에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 기독교는 히스파니아에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4세기 히스파니아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를 보냈으나, 5세기 초반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409년,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히스파니아로 침입했다. 이들은 초기에 약탈을 일삼다가 점차 정착하기 시작했다:
- 수에비족: 갈라에키아(현재의 갈리시아와 북포르투갈) 지역에 정착
- 반달족: 바에티카에 잠시 정착했다가 429년 북아프리카로 이동
- 알란족: 루시타니아와 카르타기넨시스 지역에 정착
이에 로마 제국은 서고트족(Visigoths)과 동맹을 맺고 이들을 견제하려 했다. 418년, 서고트족은 로마의 동맹군으로서 히스파니아에 진입했고, 점차 반달족과 알란족을 몰아내고 수에비족을 갈라에키아 지역으로 한정시켰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후, 서고트족은 이베리아 반도의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로마의 문화적, 법적, 행정적 유산은 서고트 왕국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로마 시대 히스파니아의 유산
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에는 로마 시대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 메리다(고대 에메리타 아우구스타)의 로마 극장, 원형경기장, 다이애나 신전
- 세고비아의 수도교
- 타라고나(고대 타라코)의 원형경기장, 극장, 성벽
- 이탈리카의 원형경기장과 로마 도시 유적
- 알칸타라 다리
- 루고의 로마 성벽(UNESCO 세계문화유산)
로마의 문화적 영향은 언어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스페인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등 이베리아 반도의 주요 언어들은 모두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 로마의 법체계 역시 스페인 법의 기초가 되었으며, 가톨릭교회의 행정 구역은 로마 시대의 행정 구역을 기반으로 했다.
로마식 도시 계획의 영향으로 많은 스페인 도시들은 중심부에 광장(plaza mayor, 고대 포럼에 해당)을 갖고 있으며, 그리드 형태의 도로 배치를 보인다. 농업에서는 올리브, 포도 재배 기술과 관개 시스템이 로마의 유산으로 남아있다.
로마 시대 히스파니아의 역사적 의미
로마 시대는 이베리아 반도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로마는 이전에 분열되어 있던 이베리아 반도를 하나의 행정 단위로 통합했고, 공통의 언어, 법, 문화를 도입했다. 이러한 통합성은 비록 중세에 이슬람 정복과 기독교 왕국들의 분열로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지만, 현대 스페인의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또한 로마 시대에 형성된 도시 네트워크는 오늘날 스페인의 주요 도시들의 기원이 되었으며, 로마가 건설한 도로망은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이베리아 반도의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로마는 히스파니아를 지중해 세계와 긴밀히 연결시킴으로써, 이 지역이 유럽 문명의 중요한 일부가 되게 했다. 이러한 유산은 후에 스페인이 유럽과 신세계를 연결하는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히스파니아의 로마화는 단순한 정복이 아닌 상호 작용의 과정이었다. 로마는 히스파니아에 문명을 전파했지만, 동시에 히스파니아 출신 인물들은 로마 제국의 정치, 철학, 문학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러한 문화적 교류의 전통은 이후 스페인 역사에서도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