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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거부하는 조직, 길을 잃은 리더들: 인사조직론 최신 트렌드 진단

오늘날 인사조직 분야는 단순한 관리의 기술이 아닌, 조직 생존의 철학을 요구받고 있다. 고성과 문화를 만드는 핵심은 ‘사람’이며, 이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성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통찰이 곧 조직 전략의 핵심 축이 된다. 최근 몇 가지 주요 흐름은 기존의 정답 중심 인사관리에서 벗어나, ‘신뢰’, ‘분산 지식’, ‘실험적 성과관리’라는 새로운 키워드로 수렴되고 있다. 1. 스타벅스가 말하는 리더십: 섬김의 힘 전통적인 리더십 모델은 여전히 ‘지시’와 ‘통제’의 틀에 갇혀 있다. 하지만 스타벅스가 보여준 서번트 리더십은 정반대의 길을 택한다. 리더는 위에서 아래를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라, 구성원의 성장을 돕는 서포터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철학은 스타벅스의 바리스타 문화, 내부 커뮤니케이션, 교육 방식에 그대로 녹아 있다. 직원 한 명 한 명을 ‘파트너’로 존중하고, 고객 경험 이전에 내부 경험(Internal Experience)을 우선시하는 시스템은 결국 외부 충성도(Brand Loyalty)로 이어진다. 섬김의 리더십은 더 이상 이상이 아닌, 검증된 성과 전략이다. 2. ‘지식은 힘’의 종말: 나누는 조직이 이긴다 지식을 개인의 경쟁력으로 여기는 시대는 끝났다. 오늘날의 고성과 조직은 지식의 흐름이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따라 성과의 수준이 달라진다. 지식을 숨기는 조직은 반복된 실수를 학습하지 못하고, 조직 전체가 '개별의 반복'에 갇히는 비효율을 겪는다. 반면, 지식을 나누는 조직은 실패 경험도 자산이 된다. 구글, 넷플릭스, 에어비앤비와 같은 테크 기업들은 실패와 학습, 지식의 투명한 순환을 통해 집단지성을 실현하고 있다. 이는 단지 사내 위키나 협업툴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을 만드는 문화 설계의 문제다. 3. OKR vs KPI, 목적 없는 성과관리의 함정 많은 조직이 OKR(Objectives and Key Results) 도입을 시도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기존 KPI와의 혼용으로 방...

영국 역사 기본 1. 선사 시대와 로마 브리타니아


영국 역사의 첫 걸음은 먼 선사시대로부터 시작된다. 오늘날 '영국'이라 부르는 나라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훨씬 이전, 브리튼 섬에 살았던 다양한 민족들과 그들이 남긴 흔적들을 통해 영국 역사의 가장 초기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신비로운 선사시대 영국

최초의 정착민들

영국 땅에 인간이 처음 발을 디딘 것은 약 8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퍽(Norfolk) 지역 크로머(Cromer) 근처에서 발견된 도구들은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Homo heidelbergensis)라는 인류의 조상이 이곳에 살았음을 보여준다. 이후 여러 차례 빙하기가 오고 갔으며, 약 4만 년 전에는 호모 사피엔스인 크로마뇽인이 이 지역에 정착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후인 약 1만 년 전부터 브리튼 섬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모습에 가까워졌다.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유럽 대륙과 분리되었고, 사람들은 수렵채집 생활을 하며 살았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스타 카(Star Carr) 유적지가 있는데, 여기서 발견된 사슴 뿔 머리장식은 당시 사람들의 의례적인 활동을 보여준다.

신석기 혁명과 농경의 시작

기원전 4000년경, 브리튼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중동과 유럽 대륙에서 시작된 농업 혁명이 바다를 건너 브리튼 섬에도 전해진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야생 동물을 사냥하는 대신 가축을 기르고, 자연에서 열매를 채집하는 대신 밀과 보리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사회는 더욱 복잡해졌다. 농경지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조상들을 위한 무덤이 만들어졌다. 윈드밀 힐(Windmill Hill) 문화로 알려진 이 시기의 사람들은 롱 배로우(Long Barrow)라 불리는 긴 덧널무덤을 만들었는데, 웨스트 케넷(West Kennet)이나 웨일랜즈 스미시(Wayland's Smithy) 같은 무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스톤헨지와 거석 문화

기원전 3000년경부터 2000년경까지는 브리튼 신석기 문화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에는 거대한 석조 기념물들이 건설되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스톤헨지다.

스톤헨지는 한 번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약 1500년에 걸쳐 여러 단계로 건설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토축 구조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정교한 석조 건축물로 발전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일부 돌(블루스톤)이 웨일즈 프레셀리 힐스(Preseli Hills)에서 약 240km를 운반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바퀴도 없던 시대에 무게가 4톤에 달하는 돌을 어떻게 그렇게 먼 거리에서 운반했는지는 아직도 완전히 해명되지 않은 수수께끼다.

스톤헨지의 정확한 용도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천문학적인 관측소이자 종교적 의식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하지(夏至)와 동지(冬至) 때 해가 특정 돌과 정확히 일직선상에 놓이는 현상은 당시 사람들이 계절의 변화를 정확히 예측하고 농사 시기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스톤헨지 외에도 에이브버리(Avebury)의 거석 환(巨石環), 우드헨지(Woodhenge), 더링턴 월스(Durrington Walls) 등 많은 의식용 구조물들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이들 유적지는 당시 사회가 단순한 수렵채집 집단이 아닌, 복잡한 종교 의식과 사회 구조를 가진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청동기 시대로의 전환

기원전 2500년경부터는 새로운 기술이 브리튼에 도입되었다.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만드는 청동 기술이 그것이다. 청동은 석기보다 내구성이 좋고 다양한 형태로 제작할 수 있어, 도구와 무기 제작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 시기에는 또한 비커(Beaker) 문화라고 불리는 새로운 문화가 유럽 대륙에서 유입되었다. 특징적인 종 모양의 도자기를 사용했던 이들은 개인 무덤을 만들고 죽은 자와 함께 도자기, 무기, 장신구 등을 매장했다. 이는 이전 시대의 공동 매장과는 다른 관습으로, 사회 구조의 변화를 보여준다.

청동기 시대 브리튼의 사람들은 라운드 배로우(Round Barrow)라고 불리는 원형 덧널무덤을 만들었으며, 다양한 형태의 청동 도끼, 검, 창 등을 제작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돌로 만든 원형 주거지인 라운드하우스(Roundhouse)가 등장했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더 많은 땅이 농경지로 개간되었다.

철기 시대와 켈트족의 등장

기원전 800년경부터 브리튼에는 철기 기술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철은 청동보다 단단하고 원료 획득이 쉬워 더욱 실용적인 도구와 무기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브리튼과 아일랜드에 정착한 사람들을 우리는 켈트족이라고 부른다. 사실 '켈트'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북부 유럽의 여러 부족을 통칭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로, 이들이 스스로를 하나의 민족으로 인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언어적, 문화적으로 유사한 특징을 공유했던 것은 분명하다.

켈트족은 뛰어난 금속 세공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특한 소용돌이 무늬와 동물 문양을 특징으로 하는 예술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각자의 영토를 다스렸는데, 주요 부족으로는 아이세니(Iceni), 트리노반테스(Trinovantes), 칸티(Cantii), 아트레바테스(Atrebates), 두로트리게스(Durotriges), 두무노니(Dumnonii), 코리타니(Coritani), 코리타비(Coritavi), 브리간테스(Brigantes), 카투벨라우니(Catuvellauni) 등이 있었다.

켈트족은 요새화된 정착지인 힐포트(Hillfort)를 건설했다. 이는 주로 언덕 위에 위치한 방어용 구조물로, 마이든 캐슬(Maiden Castle)이나 올드 사럼(Old Sarum) 같은 유적지들이 유명하다. 이 요새들은 부족 간 전쟁이 빈번했음을 시사한다.

켈트족의 종교는 드루이드교라고 불리며, 사제계급인 드루이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자연을 숭배했고, 신성한 장소로 여겨지는 숲과 샘에서 의식을 거행했다. 켈트족의 종교에는 인신공양의 증거도 있으나, 이에 대한 기록은 주로 로마인들에 의한 것이어서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2. 로마의 브리타니아 정복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원정

로마인들이 처음으로 브리튼에 발을 디딘 것은 기원전 55년과 5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두 차례 원정 때였다. 당시 로마는 이미 갈리아(현재의 프랑스)를 정복한 상태였고, 카이사르는 갈리아 반란군들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브리튼을 공격했다.

첫 번째 원정은 준비 부족과 악천후로 인해 성공적이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소규모 병력만을 상륙시켰고, 켄트 해안에서 약간의 전투를 벌인 후 곧 갈리아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기원전 54년, 카이사르는 더 큰 규모의 원정대를 이끌고 다시 브리튼에 왔다. 이번에는 템스강을 건너 현재의 하트퍼드셔(Hertfordshire)까지 진격했으며, 카시벨라우누스(Cassivellaunus)라는 부족장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카이사르는 일부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조공을 받기로 한 뒤 다시 철수했다.

카이사르의 원정은 영구적인 정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로마와 브리튼 사이의 교역을 증가시켰고, 로마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정복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후 약 100년 동안 로마는 브리튼 정복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후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4개 군단, 약 4만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대규모 원정대를 파견했다. 이 원정의 사령관은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Aulus Plautius)였다.

로마군은 켄트 해안에 상륙하여 메드웨이(Medway) 강에서 카툴라우니(Catuvellauni) 부족과 첫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로마군은 템스강을 따라 진격해 카툴라우니족의 수도인 케임울로두눔(Camulodunum, 현재의 콜체스터)을 함락시켰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직접 브리타니아를 방문하여 정복을 축하했고, 귀국 후 "브리타니쿠스(Britannicus)"라는 칭호를 받았다. 승리 이후에도 로마군은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남서부의 두로트리게스(Durotriges)족, 서부의 실루레스(Silures)족, 북부의 브리간테스(Brigantes)족 등 여러 부족들이 저항했지만, 로마의 우수한 군사력과 조직력 앞에 하나둘씩 정복되었다.

기원후 47년경에는 현재의 런던(당시 이름은 런디니움, Londinium)이 로마의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템스강의 첫 번째 도하지점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무역과 교통의 요충지로 빠르게 성장했다.

부디카의 반란

로마의 정복이 순탄하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가장 유명한 저항은 기원후 60-61년에 일어난 이케니(Iceni)족 여왕 부디카(Boudicca)의 반란이다.

이케니족은 원래 로마의 동맹국이었으나, 이케니족의 왕 프라스타구스(Prasutagus)가 사망한 후 상황이 급변했다. 프라스타구스는 그의 재산을 로마 황제와 두 딸에게 공동으로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로마 관리들은 이를 무시하고 이케니 왕국 전체를 몰수했다. 뿐만 아니라 부디카는 채찍질당하고 그녀의 딸들은 강간당하는 등 심각한 모욕을 당했다.

이에 격분한 부디카는 인근의 트리노반테스(Trinovantes)족과 연합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녀가 이끄는 반란군은 켐울로두눔(콜체스터), 베룰라미움(세인트 올번스), 런디니움(런던)을 차례로 공격하여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의 로마인과 그들에 협력한 브리튼인들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결국 로마 총독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Gaius Suetonius Paulinus)가 이끄는 군대가 미들랜드 어딘가에서 부디카의 반란군과 결전을 벌였다. 그 전투에서 로마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술과 규율로 승리를 거두었다. 부디카는 패배 후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부디카의 반란은 실패했지만, 로마인들에게 강력한 경고가 되었다. 이후 로마는 브리타니아 통치 방식을 개선하고, 현지 부족들과의 관계를 더 신중하게 관리하게 되었다.

북부 경계선과 하드리아누스 방벽

로마는 브리튼 남부를 비교적 빠르게 정복했지만, 북부 지역 정복은 더 어려웠다. 특히 현재의 스코틀랜드 지역에 살던 칼레도니(Caledonii)족과 그 이웃 부족들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기원후 78-84년, 총독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Gnaeus Julius Agricola)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스코틀랜드 중부까지 정복했다. 그는 몬스 그라우피우스(Mons Graupius) 전투에서 칼레도니족에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 지역을 영구적으로 점령하지는 못했다.

이후 여러 차례 스코틀랜드 정복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기원후 122년부터 브리타니아의 북쪽 경계선을 방어하기 위한 대규모 방벽 건설을 명령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하드리아누스 방벽(Hadrian's Wall)이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현재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경계 부근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약 117km 길이의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벽돌과 돌로 만들어진 이 방벽은 높이 4.5m, 너비 3m에 달했으며, 약 1km마다 요새(밀레 캐슬, milecastle)가 있었고, 그 사이에 두 개의 관측탑이 있었다. 또한 주요 지점에는 더 큰 규모의 요새(포트, fort)가 건설되었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주요 목적은 군사적 방어뿐만 아니라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통제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방벽의 상당 부분이 남아있어 영국 북부의 주요 관광 명소가 되었으며, 198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기원후 142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더 북쪽에 또 다른 방벽(안토니누스 방벽, Antonine Wall)을 건설했으나, 이 방벽은 약 20년 후 포기되었고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다시 북방 경계선이 되었다.

3. 로마화(Romanization)와 그 영향

로마식 도시와 기반 시설

로마는 정복지에 자신들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전파하는 '로마화(Romanization)' 정책을 펼쳤다. 이는 브리타니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마는 브리타니아 전역에 계획도시들을 건설했다. 이러한 도시들은 보통 격자형 도로 체계와 포럼(forum, 중심 광장), 신전, 목욕탕, 원형극장 등 전형적인 로마식 건물들을 갖추고 있었다. 주요 로마 도시로는 런디니움(Londinium, 런던), 에보라쿰(Eboracum, 요크), 글레붐 네르비엔시스(Glevum Nervensis, 글로스터), 데바 빅트릭스(Deva Victrix, 체스터), 아쿠아이 술리스(Aquae Sulis, 바스) 등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또한 브리타니아 전역에 약 10,000km에 달하는 도로망을 건설했다. '로마 도로'로 알려진 이 도로들은 군사적 이동과 상업 교류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영국의 주요 도로로 사용되고 있다. 포스 웨이(Fosse Way), 와틀링 스트리트(Watling Street), 어민 스트리트(Ermine Street) 등이 대표적인 로마 도로다.

로마인들은 목욕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브리타니아의 여러 도시에 공중목욕탕을 건설했다. 특히 아쿠아이 술리스(현재의 바스)는 온천 위에 지어진 대규모 목욕 시설로 유명했다. 이곳에서는 로마인들이 목욕을 하고 사교 활동을 즐겼다.

이 외에도 로마인들은 수도시설, 하수도, 난방시설(하이포코스트, hypocaust) 등 선진 기술을 브리타니아에 도입했다. 이러한 기반 시설들은 도시 생활의 편의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경제와 사회 변화

로마의 지배는 브리타니아의 경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로마는 화폐 경제를 도입했고, 금, 은, 구리로 만든 동전들이 브리타니아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이로 인해 지역 간 교역이 활성화되었고, 전문 기술자와 상인 계층이 등장했다.

로마는 브리타니아의 풍부한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웨일즈와 콘월의 금, 은, 납, 주석 광산, 중부 잉글랜드의 철광석 등이 개발되었다. 특히 멘딥 힐스(Mendip Hills)의 납 광산은 로마 제국 전체에서 중요한 공급원이었다.

농업도 발전했다. 로마인들은 효율적인 농업 기술을 도입했고, 넓은 농장인 빌라(villa)가 브리타니아 남부와 동부에 많이 건설되었다. 빌라는 단순한 농장이 아니라 모자이크, 벽화, 목욕 시설 등을 갖춘 호화로운 주택인 경우가 많았다. 피시본(Fishbourne)이나 브레딩(Brading) 빌라의 유적은 당시 부유층의 생활 수준을 보여준다.

사회적으로는 계층화가 더욱 뚜렷해졌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엘리트 계층, 평범한 자유민, 노예 등으로 구분되는 사회 구조가 형성되었다. 토착 브리튼 귀족들 중 많은 이들이 로마 문화와 생활방식을 받아들이고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종교와 문화

로마인들은 정복지의 신들을 자신들의 신과 동일시하는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펼쳤다. 예를 들어, 브리튼의 수리스(Sulis) 여신은 로마의 미네르바(Minerva) 여신과 동일시되어 '수리스 미네르바'로 숭배되었다.

로마식 신전들이 주요 도시에 건설되었고, 황제 숭배 의식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켈트 전통의 종교적 관습도 일부 지역에서는 계속 유지되었다.

기원후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이후에는 브리타니아에서도 크리스트교가 확산되었다. 고고학적 증거로는 4세기의 크리스트교 모자이크와 벽화, 영국 최초의 크리스트교 순교자로 알려진 성 알반(St. Alban)의 이야기 등이 있다.

문화적으로는 라틴어가 도시와 엘리트 계층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지만, 시골 지역에서는 여전히 켈트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로마 예술 양식(모자이크, 벽화 등)이 도입되었으나, 이 역시 켈트 전통과 혼합되어 독특한 로마-켈트 양식이 발전했다.

교육은 주로 엘리트 계층에게만 제공되었지만, 로마 문학, 철학, 법률 등을 가르치는 학교들이 주요 도시에 설립되었다. 이를 통해 브리타니아의 엘리트들은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 엘리트들과 문화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의 쇠퇴와 브리타니아 철수

4세기 후반부터 로마 제국은 여러 위기에 직면했다. 내부적 분열, 경제적 어려움, 게르만족의 침입 등 다양한 문제들이 제국을 약화시켰다.

브리타니아에서는 4세기 내내 스코틀랜드의 픽트족(Picts), 아일랜드의 스코티족(Scots), 그리고 게르만계 해적들의 공격이 증가했다. 로마는 해안 방어를 위해 '색슨 해안(Saxon Shore)'이라 불리는 요새들을 건설했지만, 침입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367년에는 '바바리안의 공모(Barbarian Conspiracy)'라 불리는 대규모 공격이 있었는데, 픽트족, 스코티족, 아틀랜드족, 색슨족이 동시에 브리타니아를 공격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무너지고 많은 로마 정착지가 파괴되었다.

5세기 초, 로마 제국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410년, 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브리타니아에서 마지막 로마군을 철수시키고, 브리튼인들에게 "자신의 방어는 스스로 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약 400년간 지속된 로마의 브리타니아 통치는 막을 내렸다.

로마군의 철수 이후, 브리타니아의 많은 도시들은 쇠퇴했다. 화폐 유통이 중단되고, 대규모 건축 활동이 중지되었으며, 일부 기술(예: 벽돌 제조, 유리 생산)이 잃어버렸다. 특히 도시 생활의 쇠퇴가 두드러졌는데, 사람들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도시 기반 시설을 떠나 시골로 이주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로마의 유산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로마가 건설한 도로는 여전히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었고, 일부 빌라와 농장은 계속 운영되었다. 무엇보다 로마-브리튼 엘리트 계층은 한동안 로마식 생활방식과 라틴어 사용을 유지했다. 또한 크리스트교는 로마 철수 이후에도 브리타니아에 남아 중요한 문화적 연속성을 제공했다.

로마가 떠난 권력의 공백은 새로운 침입자들, 즉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 등 게르만계 부족들에 의해 채워지게 된다. 이들의 이주와 정착으로 브리튼은 새로운 시대, 앵글로색슨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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