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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사 기본 19.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전간기(戰間期)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프랑스의 참전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의 긴장이 고조되고,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각국의 동맹 관계로 인해 전쟁은 빠르게 확산된다.
프랑스는 삼국협상(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일원으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등 동맹국과 대립한다. 1871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 이후 프랑스에게 독일은 숙적이었고, 알자스-로렌 지역 회복은 국가적 열망이었다.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선전포고한다. 독일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해 프랑스 북부로 진격한다. 벨기에 침공은 영국의 참전 명분이 된다.
프랑스는 총동원령을 발표하고 '신성한 연합'(Union sacrée)을 형성한다. 좌우 정치세력, 노동조합, 가톨릭 교회 등 평소 대립하던 세력들이 국가 방어를 위해 단결한다. 심지어 1905년 교회-국가 분리법으로 추방되었던 성직자들도 군대에 합류한다.
전쟁 초기 프랑스는 "제17번 작전계획"에 따라 알자스-로렌 지역으로 공격을 감행하지만 큰 손실을 입고 후퇴한다. 독일군은 파리 근처까지 진격하나, 9월 5일부터 12일까지의 마른 전투에서 조프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한다. 이 승리로 단기전 계획이 무산된 독일은 장기전에 돌입한다.
서부전선과 참호전
마른 전투 이후 양측은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이어지는 참호를 구축하며 교착 상태에 들어간다. 서부전선에서는 4년 동안 극히 제한된 영토만 오가는 소모적 전투가 계속된다.
1915년 샹파뉴와 아르투아 전투,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지속된 베르됭 전투가 대표적인 대규모 전투다. 특히 베르됭 전투는 프랑스군 37만 명, 독일군 33만 명의 사상자를 낸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 중 하나다. 베르됭 방어를 지휘한 페탱 장군은 "그들은 지나가지 못한다"(Ils ne passeront pas)라는 결의를 보여주며 국민적 영웅이 된다.
1916년 7월부터 11월의 솜 전투는 영국과 프랑스의 공세였으나 큰 성과 없이 막대한 인명 손실만 초래한다. 1917년 4월 니벨 공세는 프랑스군의 대규모 반란을 촉발한다. 무의미한 공격과 열악한 조건에 지친 병사들이 집단적으로 명령 수행을 거부한 것이다. 페탱 장군이 총사령관이 되어 병사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무모한 공격을 중단함으로써 사태를 수습한다.
참호전은 새로운 전쟁 양상을 보여준다. 기관총, 독가스, 화염방사기, 전차 등 새로운 무기가 등장하고, 항공기가 정찰과 폭격에 활용된다. 병사들은 진흙, 쥐, 이, 질병과 함께 생활하며 엄청난 심리적 외상을 경험한다.
총력전과 내부 전선
제1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이었다. 전체 국가 자원이 동원되고 전선과 후방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프랑스는 경제, 산업, 인력을 모두 전쟁에 집중한다.
여성의 역할이 확대된다. 남성들이 전선에 나가자 여성들이 공장, 농장, 사무실 등에서 그 자리를 대체한다. 이는 전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전시 경제는 국가 통제가 강화된다. 식량과 원자재의 배급제가 실시되고, 군수 산업이 대대적으로 확장된다. 특히 르노와 같은 자동차 회사들이 전차와 항공기 생산으로 전환한다.
프로파간다가 본격화된다. 신문, 포스터, 영화 등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고 독일에 대한 혐오를 선동한다. 검열이 강화되어 패배주의적 견해는 억압된다.
1917년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러시아 혁명으로 동맹국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하고,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변화한다. 미국의 병력과 물자 지원은 협상국에 결정적 이점을 제공한다.
종전과 승리의 대가
1918년 3월, 러시아와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후 독일은 서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해 최후의 공세를 감행한다. 그러나 7월 이후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8월 8일 아미앵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한다(독일의 '검은 날').
9월부터 연합군의 '백일 공세'가 전개되고, 패색이 짙어진 독일에서는 11월 혁명이 일어나 카이저가 퇴위한다. 11월 11일 오전 11시, 독일 대표단은 콩피에뉴 숲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전쟁은 종결된다.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손실은 막대했다. 136만 명의 군인이 사망하고(동원된 인구의 약 27%), 400만 명이 부상당한다. 경제적으로 북동부 지역의 산업 지대가 파괴되고 국가 부채가 급증한다.
인구학적 영향도 심각했다. 청년 세대의 대규모 손실(젊은 남성 35-40% 사망)로 인해 "잃어버린 세대"가 발생하고, 이후 출산율 감소와 인구 고령화로 이어진다.
심리적 충격도 크다. 전쟁 신경증(shell shock),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많은 제대 군인들이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 전쟁으로 인한 집단적 트라우마는 프랑스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베르사유 조약과 전후 질서
1919년 1월 18일, 파리 외곽 베르사유궁에서 강화회의가 개막된다. 회의에는 27개국이 참여하지만, 중요 결정은 '빅 포'(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내린다. 독일과 러시아는 초대받지 못한다.
프랑스 측 대표인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는 독일에 대한 강경파였다. 그는 독일의 영구적 약화와 프랑스 안보 보장을 위해 라인강 좌안 영구 점령, 막대한 배상금 등을 요구한다.
그러나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는 보다 온건한 입장을 취한다.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은 민족 자결주의와 국제 협력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를 추구했고, 독일의 완전한 약화는 유럽의 균형을 해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결국 1919년 6월 28일 서명된 베르사유 조약은 타협의 산물이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알자스-로렌이 프랑스로 반환된다.
- 자르 지역이 15년간 국제연맹 관리 하에 들어가고 그 동안의 석탄 채굴권은 프랑스가 갖는다.
- 라인란트는 비무장 지대가 되고 15년간 연합군이 점령한다.
- 독일 식민지가 주로 영국과 프랑스에 위임통치령으로 분배된다(프랑스는 토고와 카메룬 일부 획득).
- 독일의 군사력이 제한된다(10만 명 이하의 지원병 육군, 해군 축소, 잠수함과 공군 금지).
- 독일이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액수는 미정, 후에 결정).
-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Anschluss)이 금지된다.
- 국제연맹이 창설된다.
프랑스의 관점에서 베르사유 조약은 충분히 강력하지 않았다. 클레망소는 국내에서 "너무 가혹하여 이행될 수 없는 동시에, 독일을 제대로 약화시키기에는 불충분한" 조약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전간기 프랑스: 루브르 시대(1919-1924)
전쟁 직후 프랑스 정치는 우익 성향의 '국민 블록'(Bloc National)이 주도한다. 1919년 11월 선거에서 승리한 이들은 애국주의와 전통적 가치를 강조하며 "루브르 시대"를 연다.
주요 관심사는 전쟁 피해 복구와 안보 확립이었다. 북동부 산업 지대 재건, 주택과 인프라 복구에 막대한 비용이 투입된다. 안보를 위해 동유럽 국가들(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과 동맹을 맺어 독일 봉쇄를 시도한다.
독일 배상금 문제가 심각한 갈등을 일으킨다. 1921년 런던 회의에서 배상금을 1,320억 금마르크(약 330억 달러)로 확정하지만, 독일은 지불 능력 부족을 주장한다. 1922년 말 독일의 지불 불이행으로 1923년 1월 프랑스와 벨기에는 루르 공업 지대를 점령하는 강경책을 취한다.
루르 점령은 국제적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을 가져온다. 독일은 소극적 저항으로 대응하고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의 행동에 반대하며, 결국 1924년 도즈 계획을 통해 타협이 이루어진다.
국내적으로는 사회 갈등이 고조된다. 1919-20년 대규모 파업과 노동 운동이 일어나고, 1920년 프랑스 공산당(PCF)이 창당된다. 이민자(주로 이탈리아, 폴란드, 스페인 출신)가 증가하며 외국인 혐오도 나타난다.
좌파 연합과 경제 위기(1924-1929)
1924년 총선에서 급진당, 사회당, 좌파 연합인 '좌파 카르텔'(Cartel des gauches)이 승리한다. 에두아르 에리오가 이끄는 좌파 정부는 화해와 사회 개혁을 약속한다.
대외적으로는 독일과의 화해 정책을 추진한다. 1925년 로카르노 조약을 통해 독일-프랑스-벨기에 국경을 확정하고 라인란트 비무장화를 재확인한다. 이는 프랑스 외무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평화 외교의 성과였다.
그러나 국내 경제 문제가 심각했다. 전쟁 부채, 프랑화 가치 하락, 인플레이션 등으로 재정이 악화된다. 좌파 정부는 부유층 증세를 시도하지만 자본 도피와 강한 반발로 실패한다.
1926년 6월 프랑화 위기가 절정에 달하면서 좌파 카르텔 정부는 붕괴한다. 레몽 푸앵카레가 이끄는 국민연합 정부가 들어서고, 강력한 긴축 정책과 프랑화 평가절하(80%)를 단행해 재정 안정을 이룬다.
1926-29년은 경제적 번영기였다. 푸앵카레의 재정 안정화 조치, 세계 경제 호황, 미국 자본 유입 등으로 경제가 성장한다. 자동차, 항공, 전기, 화학 산업이 발전하고, 파리는 다시 국제적 문화 중심지로 부상한다.
대공황과 정치적 위기(1929-1936)
1929년 10월 미국 주식시장 붕괴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프랑스에 지연되어 영향을 미친다. 1931년부터 수출 감소, 생산 축소, 실업 증가가 나타나고, 1932-36년이 최악의 시기였다.
프랑스 경제의 상대적인 자급자족성으로 인해 충격이 다소 완화되었으나, 금본위제 고수와 긴축 재정이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특히 농업과 중소기업 부문이 큰 타격을 입는다.
정치적으로는 극심한 불안정이 계속된다. 1932-34년 사이에만 6개 내각이 교체되고, 스타비스키 스캔들(1934)은 정치권의 부패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
1934년 2월 6일, 극우단체들이 주도한 폭력 시위가 파리에서 발생한다. 의회 건물(콩코드 광장)을 향한 시위대와 경찰 충돌로 15명이 사망하고 1,500명이 부상당한다. 이는 프랑스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된다.
극우 단체와 파시즘의 위협에 맞서 좌파 세력이 단결한다. 1934년 7월 공산당과 사회당 간 통일 전선이 형성되고, 1935년 급진당까지 합류해 '인민전선'이 결성된다.
이 시기 프랑스의 외교 정책은 점차 수세적이 된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 집권(1933),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1935), 라인란트 재무장(1936) 등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소련과 동맹(1935)을 맺지만, 집단 안보 체제는 영국의 소극적 태도로 한계를 보인다.
인민전선 정부(1936-1938)
1936년 4-5월 총선에서 사회당, 공산당, 급진당으로 구성된 인민전선이 승리한다. 사회당 당수 레옹 블룸이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사회당 총리이자 유태인 총리가 된다.
블룸 정부는 대공황에 대응하고 노동자 권리를 개선하는 개혁을 추진한다. 총선 직후 자발적인 공장 점거 파업(약 200만 노동자 참여)이 발생하자, 정부는 노동자와 사용자 대표를 마티뇽 궁으로 초청해 협상을 중재한다.
마티뇽 협약(1936년 6월)과 이후 법률을 통해 다음과 같은 개혁이 이루어진다:
- 주 40시간 노동제 도입
- 유급휴가 2주 보장(이로 인해 처음으로 노동자 가족의 휴가 여행이 가능해짐)
- 단체협약 의무화
- 임금 10-15% 인상
- 프랑스 은행 개혁과 군수산업 국유화
- 의무교육 연령 연장(13세→14세)
- 라디오 방송의 정부 통제
이러한 개혁은 노동자 계층의 삶을 개선했으나, 사업주와 중산층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블룸은 백만장자보다 유태인이라는 것이 더 용서할 수 없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반유대주의와 결합된 반대가 심했다.
경제적으로는 단기적인 소비 진작 효과가 있었으나, 프랑 평가절하(1936년 9월, 30%)에도 불구하고 자본 도피, 생산 비용 증가 등의 문제가 나타난다. 1937년 블룸은 "일시 휴지기"를 선언하고 개혁을 중단한다.
대외적으로는 스페인 내전(1936-39)이 큰 쟁점이었다. 블룸은 처음에 스페인 공화정부를 지원하려 했으나, 국내 우파와 영국의 반대로 "불간섭" 정책을 채택한다. 이로 인해 프랑코의 반란군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승리하게 된다.
1937년 6월 블룸 정부가 사임하고, 이후 급진당의 카미유 쇼탕과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이끄는 정부가 들어선다. 인민전선은 형식적으로 유지되나 실질적으로 붕괴된다.
뮌헨 협정과 전쟁 전야(1938-1939)
1938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을 요구하며 위기를 조성한다. 프랑스는 체코와 방위 조약을 맺고 있었으나, 달라디에 총리와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타협을 선택한다.
9월 29-30일 뮌헨에서 히틀러, 무솔리니, 체임벌린, 달라디에가 회담을 갖고,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는 배제한 채 수데텐 지역의 독일 할양에 합의한다. 다음 해 3월 히틀러는 약속을 어기고 체코슬로바키아 나머지 지역마저 점령한다.
뮌헨 협정은 당시 프랑스와 영국에서 전쟁 방지라는 명목으로 환영받았으나, 히틀러의 야망을 충족시키는 "유화 정책"의 실패로 역사에 기록된다. 특히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노선에 비견되던 요새와 무기 산업이 히틀러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전략적 손실도 컸다.
1939년 3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점령한 후, 프랑스와 영국은 정책을 전환해 폴란드에 대한 보장을 선언한다.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9월 3일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1939년 9월부터 1940년 5월까지 '가짜 전쟁'(Drôle de guerre, Phoney War) 시기가 이어진다. 프랑스는 마지노 선에 의존하며 수세적 태도를 취하고, 일상생활은 대체로 정상적으로 유지된다. 그러나 1940년 5월 10일 독일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6주 만에 프랑스는 패배하고 제3공화정은 종말을 맞는다.
전간기 프랑스 사회와 문화
전간기 프랑스는 전쟁의 상처와 새로운 변화가 공존했다. 전쟁 피해자에 대한 기념이 국가적 의례가 되고, 무명용사의 묘(개선문), 조소(戰沼) 기념물, 마을 기념비 등이 전국에 세워진다.
인구학적으로는 "잃어버린 세대"의 영향이 계속된다. 출산율이 감소하고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어 이민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1930년대 중반 프랑스 인구의 7%가 외국인이었다.
사회적으로는 여성의 역할 변화가 두드러진다. 전쟁 중 여성의 노동 참여가 확대되고, "새로운 여성"(flapper) 문화가 등장한다. 그러나 여성 참정권은 여전히 인정되지 않았다(1944년까지).
문화적으로는 다양한 흐름이 공존한다. 전쟁의 충격으로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같은 아방가르드 운동이 발전한다. 파리는 피카소,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스타인 등 국제적 예술가들의 중심지가 된다. 영화 산업이 발전하고, 르 코르뷔지에 같은 건축가들이 새로운 모더니즘 양식을 발전시킨다.
대중문화도 변화한다. 라디오 보급, 대중 여가의 확산(자전거, 영화, 카페), 스포츠의 인기(투르 드 프랑스, 축구) 등이 두드러진다. 1936년 인민전선의 유급휴가제 도입 이후 대중 관광이 시작된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전쟁과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다양한 이념이 충돌한다. 마르크스주의, 파시즘, 초현실주의, 실존주의, 인격주의 등 정치적, 철학적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전간기 프랑스는 승전국이었으나 내적으로는 깊은 불안과 분열을 겪었다. 경제적 어려움, 정치적 불안정, 인구 문제, 안보 위협 등 다양한 도전에 직면하며, 결국 1940년 프랑스는 독일에 굴복하고 비시 정부라는 새로운 암흑기를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