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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사 기본 18. 제3공화정(1870~1940)과 근대 프랑스의 발전
제3공화정의 어려운 출발(1870-1875)
제3공화정은 나폴레옹 3세의 스당 전투 패배와 포로 체포 직후인 1870년 9월 4일 파리에서 선포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가혹한 환경에 직면한다. 프로이센군은 계속 프랑스 영토를 점령하고 파리는 포위 상태에 놓인다. 임시정부(국방정부)는 전쟁을 계속하지만 1871년 1월 파리가 함락된다.
2월 8일 선거로 구성된 국민의회는 압도적으로 보수적 왕당파가 장악한다. 아돌프 티에르가 '행정권의 수장'으로 선출되어 사실상 대통령 역할을 한다. 티에르는 신속히 프로이센과 평화를 체결하여 프랑크푸르트 조약(1871년 5월)에 서명한다.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상실하고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
파리 코뮌 진압 이후, 정부는 아직 공화국의 최종적 형태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왕당파가 다수인 국민의회에서는 군주제 복원이 논의되지만, 왕위 계승자들 간의 갈등(부르봉파와 오를레앙파)과 앙리 5세(부르봉 백기파)의 고집으로 인해 결렬된다. 특히 앙리 5세가 삼색기(프랑스 국기) 대신 백색 왕가 깃발을 고집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왕정복고가 실패하자 공화파가 점차 세력을 확장한다. 1873년 5월 티에르가 물러나고 왕당파인 맥마옹 원수가 대통령이 되지만, 1875년 헌법 제정으로 공화정 체제가 확립된다. 이는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포함한 왈롱 수정안이 단 한 표 차이(353대 352)로 통과되면서 이루어진다.
1875년 헌법은 대통령(7년 임기), 상원, 하원(4년 임기)으로 구성된 의회 중심 체제를 규정한다. 대통령은 의회에 의해 선출되며 실질적 권한은 제한적이다. 제3공화정은 "원하지 않았던 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이는 왕당파들의 분열로 인해 차선책으로 선택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공화정의 공고화(1875-1914)
초기 제3공화정은 불안정했다. 맥마옹 대통령은 1877년 '5월 16일 위기'를 통해 보수적 쿠데타를 시도하나 실패한다. 이후 공화파가 선거에서 승리하며, 맥마옹은 1879년 사임하고 진보적 공화파인 쥘 그레비가 대통령이 된다.
1880년대에 공화정은 제도적으로 견고해진다. 쥘 페리 총리는 교육 개혁(무상, 의무, 세속적 초등교육)을 통해 공화주의 가치를 확산시킨다.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고, 7월 14일이 국경일로 제정되며, 라 마르세예즈가 국가로 채택된다.
부랑제 위기(1886-1889)는 공화정에 대한 도전이었다. 부랑제 장군은 애국주의와 권위주의적 개혁을 내세워 인기를 얻었으나, 정부의 압박으로 영국으로 도피하며 위기는 해소된다.
1890년대 초, 파나마 스캔들로 정치적 혼란이 발생한다. 부패와 금융 스캔들로 여러 정치인이 연루되어 공화정의 도덕성이 의심받는다. 이 시기에 가톨릭 교회와 공화파 사이의 화해 시도('랄리망')도 있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드레퓌스 사건(1894-1906)은 공화정의 가장 심각한 위기였다.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에 군사 기밀을 넘겼다는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이 사건은 프랑스 사회를 드레퓌스파(공화주의자, 반교권주의자)와 반드레퓌스파(민족주의자, 가톨릭 보수파)로 양분시킨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1898) 등의 지식인 운동과 재심 요구로 결국 1906년 드레퓌스는 완전히 복권된다.
드레퓌스 사건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 1899년 발데크-루소 내각이 출범해 "공화국 수호"를 위한 좌파 연합("좌파 블록")이 형성된다. 이들은 반교권주의 정책을 강화하여 1901년 결사법(수도회 규제), 1904년 수도회 교육 금지, 1905년 교회와 국가 분리법을 제정한다. 1905년 법은 오늘날까지 프랑스의 정교분리(라이시테) 원칙의 기초가 된다.
1900년대 초 정치적 안정이 확립되면서 조르주 클레망소(1906-1909), 아리스티드 브리앙 등 강력한 정치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공화정에 대한 위협은 줄어들고, 사회 개혁(주 6일 노동, 노동자 연금 등)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경제와 사회의 변화
제3공화정 시기 프랑스는 산업화가 진행되지만 영국이나 독일보다 느린 속도로 발전한다. 프랑스 경제는 여전히 소규모 농업, 수공업, 상업 중심의 구조를 유지한다.
그럼에도 산업 부문이 성장한다. 철강, 화학, 자동차(르노, 푸조), 항공기(블레리오) 산업이 발전하며, 파리-리옹-마르세유 산업축이 형성된다. 금융 부문도 강화되어 프랑스는 주요 국제 대출국이 된다.
인구학적으로는 정체 현상이 나타난다. 프랑스의 인구 증가율은 유럽에서 가장 낮았고, 이는 군사적, 경제적 우려를 낳는다. 도시화가 진행되어 파리, 리옹, 마르세유 등 대도시가 성장하고,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주가 계속된다.
교육의 확대로 문맹률이 크게 감소하고, 중등 및 고등교육 접근성이 향상된다. 특히 소르본 대학을 중심으로 한 파리 대학의 위상이 높아진다. 이 시기에 마리 퀴리 같은 여성 과학자가 활약하기도 한다.
노동 운동이 발전하여 1895년 노동총동맹(CGT)이 설립되고, 사회주의 정당들이 성장한다. 1905년에는 장 조레스의 주도로 통합 사회당(SFIO)이 결성된다. 여성운동도 활발해져 참정권 요구가 높아지나, 프랑스에서 여성 참정권은 1944년까지 부여되지 않는다.
식민지 제국의 확장
제3공화정은 공격적인 식민지 정책을 추진한다. 프랑스는 제2제국 시기부터 시작된, 그리고 비스마르크가 유럽 밖으로 관심을 돌리도록 장려한 식민지 확장을 가속화한다.
1881년 튀니지를 보호국화하고, 1880-90년대 서아프리카(세네갈, 말리, 니제르 등)와 중앙아프리카(차드, 가봉 등)로 진출한다. 1885년 베트남, 1887년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합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구성한다. 1912년에는 모로코를 보호국으로 삼는다.
마다가스카르(1896)와 콩고 지역도 식민지화되며, 1914년까지 프랑스는 세계 2위의 식민제국으로 성장한다.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문명화 사명"이라는 개념이 강조되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이익, 국제적 위신, 군사적 고려가 중요한 동기였다.
중요한 외교적 발전으로는 영국과의 화해(1904년 협상국)와 러시아와의 동맹(1894)이 있다. 이는 독일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적 전략이었다. 알자스-로렌 상실로 인한 복수심과 독일의 부상에 대한 우려가 외교 정책의 중심축이 된다.
벨 에포크(1900-1914): 문화적 황금기
1900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의 시기는 프랑스 문화의 황금기로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라 불린다. 파리는 세계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예술 분야에서는 다양한 혁신이 일어난다. 회화에서 인상주의(모네, 르누아르)와 후기 인상주의(세잔, 고갱, 반 고흐)가 발전하고, 20세기 초에는 야수파(마티스)와 입체파(피카소, 브라크)가 등장한다. 음악에서는 드뷔시와 라벨의 인상주의 음악이 주목받는다.
문학에서는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등이 중요하다.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발명되어 새로운 예술 형태로 발전한다.
과학 기술도 발전한다. 퀴리 부부의 방사능 연구, 루이 파스퇴르의 미생물학 등 과학적 성과가 이어진다. 에펠탑(1889)은 프랑스 기술력의 상징이 되고, 자동차와 비행기 산업이 시작된다.
파리는 도시 생활의 즐거움을 상징하는 곳이 된다. 카페, 캬바레(물랑 루즈, 폴리 베르제르), 백화점(봉 마르셰, 갤러리 라파예트) 등이 번영한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이 시대의 낙관주의와 자신감을 보여준 행사였다.
그러나 이 화려한 외관 아래에는 사회적 불평등, 노동자 계층의 고단한 삶, 식민지 착취 등의 그림자가 존재했다. 벨 에포크의 번영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급격히 종식된다.
제3공화정의 최후(1914-1940)
제1차 세계대전은 프랑스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는 거의 510만 명이 동원되어 그 중 130만 명이 사망하고 400만 명이 부상당한다. 북동부 지역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경제적 타격도 막대했다.
전후 프랑스는 베르사유 조약(1919)을 통해 알자스-로렌을 회복하고 독일에게 배상금을 요구한다.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는 독일에 대한 강경 입장을 취하지만, 미국과 영국의 반대로 원하는 만큼의 제재를 가하지 못한다.
1920년대 프랑스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다. 전쟁 부채, 인플레이션, 통화 가치 하락 등의 문제가 심각했다. 1926년 푸앵카레 총리의 긴축 정책으로 일시적 안정을 찾지만,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다시 어려워진다.
정치적으로는 1924-26년과 1932-34년에 좌파 연합인 '카르텔 데 고슈'가 집권하지만, 대체로 중도 우파 정부가 지배적이었다. 1934년 2월 6일 극우 단체들의 폭력 시위는 공화정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된다.
이에 대응해 1936년 사회당(레옹 블룸), 공산당, 급진당의 좌파 연합인 '인민전선'이 선거에서 승리한다. 블룸 정부는 40시간 노동제, 유급휴가(2주), 단체협약 의무화 등 진보적 노동 개혁을 단행한다. 그러나 인민전선은 내부 갈등과 외부 압력으로 1년 만에 무너진다.
1930년대 후반, 유럽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프랑스는 대외 정책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1936년 라인란트 재무장, 1938년 뮌헨 협정(체코슬로바키아 영토 할양 승인) 등에서 영국과 함께 히틀러에게 유화 정책을 취한다.
1939년 9월 3일, 프랑스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 후 영국과 함께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그러나 8개월간의 '가짜 전쟁' 이후, 1940년 5월 독일이 공격을 시작하자 프랑스 방어선은 6주 만에 무너진다. 참패의 원인은 군사 전략의 오류(마지노선에 의존), 지휘부의 무능, 정치적 분열 등이었다.
1940년 6월 16일 폴 레노 총리가 사임하고 필리프 페탱 원수가 새 총리가 된다. 페탱은 즉시 독일에 항복을 요청하고, 6월 22일 휴전 협정이 체결된다. 7월 10일, 의회는 페탱에게 전권을 부여하여 새 헌법을 제정할 권한을 준다.
페탱은 제3공화정을 종식시키고 '프랑스 국가'(비시 정부)라는 권위주의 체제를 수립한다. 공화국의 모토 "자유, 평등, 박애" 대신 "노동, 가족, 조국"을 새 가치로 내세운다. 이로써 70년간 지속된 제3공화정은 막을 내린다.
제3공화정의 평가와 유산
제3공화정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체제였으며, 많은 위기와 도전에도 불구하고 공화주의 전통을 공고히 했다. 국민 교육 체계의 확립, 정교분리 원칙 수립, 출판과 집회의 자유 보장 등 많은 공화주의적 가치와 제도가 이 시기에 정착된다.
그러나 정부 불안정(1870-1940년 사이 약 100개의 내각), 의회 중심주의의 약점, 사회적 계층화와 불평등 지속, 식민지 착취 등의 한계도 분명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점은 큰 약점이었다.
제3공화정의 비극적 종말은 단순히 군사적 패배 때문만이 아니라, 내부적 갈등과 분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 상실 등 복합적 요인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공화정의 유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4, 제5공화정으로 계승되어 현대 프랑스 민주주의의 기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