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가젯
스페인 역사 기본 18. 19세기 말 스페인-미국 전쟁(1898)과 제국의 종말
19세기 말, 한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던 스페인은 마지막 주요 해외 영토를 모두 상실하는 비극적 순간을 맞이했다.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은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을 잃었고, 이는 단순한 영토 상실을 넘어 국가적 정체성의 위기와 깊은 자기성찰로 이어졌다. 흔히 "재난"(El Desastre)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스페인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스페인 제국의 마지막 식민지
19세기 말 식민지 상황
19세기 중반까지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의 대부분 식민지를 이미 상실했다. 그러나 여전히 카리브해의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그리고 태평양의 필리핀, 괌,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팔라우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중요했던 식민지는 다음과 같다:
-
쿠바: "카리브해의 진주"라 불리던 쿠바는 스페인에게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다. 사탕수수, 담배, 커피 플랜테이션이 발달했으며, 특히 설탕 산업은 19세기 쿠바 경제의 중심이었다. 쿠바는 스페인과의 무역에서 높은 관세를 부과받았고, 스페인인들이 주요 관직과 사업을 독점했다.
-
푸에르토리코: 쿠바보다 작은 섬이지만 역시 농업 생산(사탕수수, 커피, 담배)이 중요했다. 쿠바에 비해 독립 움직임이 약했으며, 스페인 통치에 대한 저항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
필리핀: 마닐라를 중심으로 한 이 광대한 군도는 스페인의 아시아 무역 기지였다. 필리핀은 스페인-멕시코-중국 간의 무역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중반부터 필리핀에서는 개혁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일루스트라도'(Ilustrado, 계몽된 엘리트) 운동이 성장했다.
식민지 관리와 정책
19세기 후반 스페인의 식민지 정책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졌다:
-
정치적 통제: 스페인은 식민지에 총독(Capitán General)을 파견하여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게 했다. 현지인들의 정치 참여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
경제적 착취: 스페인은 식민지의 천연자원과 농산물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 활용했다. 식민지 무역은 스페인에 유리한 방식으로 규제되었다.
-
카탈루냐 이해관계: 특히 쿠바는 카탈루냐 섬유 산업의 주요 시장이었다. 카탈루냐의 상인과 제조업자들은 쿠바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무역 정책을 강력히 지지했다.
-
제한적 개혁: 1868년 혁명 이후, 특히 1차 쿠바 독립 전쟁(1868-1878) 종결 후 스페인은 일부 개혁을 시도했다. 1880년에는 쿠바 노예제가 점진적으로 폐지되기 시작했고, 제한적인 정치적 대표성도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식민지 주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독립 운동의 성장
19세기 후반 스페인의 주요 식민지들에서는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강화되었다:
-
쿠바:
- 1차 독립 전쟁(1868-1878, "십년 전쟁"):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éspedes)가 이끈 이 전쟁은 산혼 협정(Pacto de Zanjón)으로 종결되었다. 스페인은 일부 개혁을 약속했으나 완전한 독립은 인정하지 않았다.
- 호세 마르티(José Martí)의 활동: 쿠바 망명자들 사이에서 마르티는 쿠바 혁명당(Partido Revolucionario Cubano)을 조직하고 독립 운동을 준비했다.
- 2차 독립 전쟁(1895-1898): 마르티, 막시모 고메스(Máximo Gómez), 안토니오 마세오(Antonio Maceo)가 이끄는 반란이 발발했다. 반군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해 스페인군을 효과적으로 견제했다.
-
필리핀:
- 프로파간다 운동: 호세 리살(José Rizal), 마르셀로 델 필라르(Marcelo H. del Pilar) 등의 지식인들이 스페인에서 공부하며 필리핀 개혁을 위한 선전 활동을 펼쳤다.
- 카티푸난(Katipunan):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가 1892년 설립한 비밀 혁명 단체로,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했다.
- 필리핀 혁명(1896-1898): 1896년 봉기가 시작되었으며, 1897년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가 지도자로 부상했다.
스페인-미국 전쟁의 배경
미국의 개입 동기
19세기 말 미국이 스페인-쿠바 분쟁에 개입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
경제적 이해관계: 미국은 쿠바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었다. 특히 설탕 산업에 미국 자본이 많이 유입되어 있었고, 양국 간 무역도 활발했다. 쿠바 내전으로 인한 불안정은 이러한 경제적 이익을 위협했다.
-
전략적 관심: 미국은 카리브해와 중앙아메리카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쿠바와 푸에르토리코의 지리적 위치는 미국의 안보와 통상 이익에 중요했다.
-
팽창주의 이념: 이 시기 미국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과 함께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테오도어 루즈벨트, 헨리 캐벗 로지, 앨프리드 마한 등 영향력 있는 인물들은 미국의 해외 팽창을 지지했다.
-
인도주의적 우려: 스페인군의 "재집결 정책"(reconcentración)으로 인한 민간인 고통이 미국 언론에 의해 크게 보도되었다. 이는 미국 대중 사이에 스페인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
황색 저널리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조셉 퓰리처가 소유한 신문들은 스페인의 잔혹성에 대한 선정적인 보도를 통해 전쟁 여론을 조성했다.
외교적 위기와 갈등 고조
1896년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미국은 쿠바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처음에는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
자치 요구: 미국은 스페인에게 쿠바에 대한 자치권 부여를 촉구했다.
-
드 로메 서한 사건: 1898년 2월, 스페인 외교관 엔리케 듀푸이 데 로메(Enrique Dupuy de Lôme)가 매킨리 대통령을 비판한 개인 편지가 언론에 유출되어 외교적 위기가 발생했다.
-
쿠바 자치: 프라세데스 마테오 사가스타(Práxedes Mateo Sagasta) 총리가 이끄는 스페인 정부는 1897년 쿠바에 제한적 자치권을 부여했지만, 이미 독립을 원하던 반군이나 개입을 원하던 미국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USS 메인호 폭발 사건
1898년 2월 15일, 하바나 항구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USS 메인(Maine)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폭발로 미국 선원 266명이 사망했다.
폭발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았다. 미국 조사단은 외부 폭발(스페인의 수중 지뢰)에 의한 것이라 결론지었지만, 스페인은 내부 폭발(보일러 사고 또는 석탄 자연발화)이라고 주장했다(현대 연구들은 내부 폭발 가능성을 더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미국 언론은 이를 스페인의 공격으로 몰아갔고, "메인호를 기억하라!"(Remember the Maine!)는 구호가 전쟁 선동의 상징이 되었다. 미국 대중의 전쟁 여론이 급속히 높아졌고, 매킨리 대통령은 정치적 압박에 직면했다.
1898년 4월 11일, 매킨리 대통령은 쿠바에 대한 무력 개입을 요청하는 교서를 의회에 보냈다. 4월 20일, 미국 의회는 쿠바의 독립을 인정하고 스페인에게 쿠바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텔러 수정안 포함)을 통과시켰다. 4월 25일, 미국은 공식적으로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의 전개와 결과
필리핀과 카리브해에서의 해전
스페인-미국 전쟁은 주로 해전을 중심으로, 매우 짧은 기간(1898년 4월 25일 - 8월 12일) 동안 진행되었다:
-
마닐라 만 해전(Battle of Manila Bay, 5월 1일):
- 조지 듀이(George Dewey) 제독이 이끄는 미 아시아 함대는 스페인 함대를 기습 공격해 단 몇 시간 만에 격파했다.
- 미국은 어떤 함선도 잃지 않았고, 사망자도 없었던 반면, 스페인 함대는 전멸했다.
- 이 승리로 미국은 마닐라를 포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지상군이 도착할 때까지 점령은 연기되었다.
-
산티아고 해전(Battle of Santiago de Cuba, 7월 3일):
- 파스쿠알 세르베라(Pascual Cervera) 제독이 이끄는 스페인 함대가 산티아고 항구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윌리엄 샘슨(William T. Sampson)과 윈필드 슐레이(Winfield Scott Schley) 제독의 미 함대에 의해 모두 격파되었다.
- 이 패배로 스페인은 해상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쿠바의 스페인군은 고립되었다.
지상전 및 주요 전투
해전에서의 승리 후, 미국은 쿠바와 푸에르토리코에 원정군을 파견했다:
-
산후안 고지 전투(Battle of San Juan Hill, 7월 1일):
- 테오도어 루즈벨트가 이끄는 '러프 라이더스'(Rough Riders)를 포함한 미군이 산티아고 인근의 산후안 고지를 점령했다.
- 이 전투는 미국 내에서 크게 영웅시되었으며, 특히 루즈벨트의 정치적 이미지를 높였다.
-
산티아고 포위(Siege of Santiago, 7월 3-17일):
- 해군력을 상실하고 포위된 스페인군은 결국 산티아고를 항복했다.
-
푸에르토리코 전역(Puerto Rico Campaign, 7월 25일-8월 12일):
- 넬슨 마일스(Nelson A. Miles) 장군이 이끄는 미군은 푸에르토리코를 신속히 점령했다.
- 스페인군의 저항은 미미했고, 현지 주민들 중 일부는 미군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
마닐라 전투(Battle of Manila, 8월 13일):
- 미군과 필리핀 독립군이 마닐라를 포위한 상태에서, 스페인과 미국은 마닐라의 "명예로운 항복"을 위한 비밀 협상을 벌였다.
- 평화 의정서 서명 후 하루 뒤 마닐라가 함락되었으나, 미국은 필리핀 독립군이 도시에 입성하는 것을 막았다.
파리 조약과 식민지 처리
1898년 8월 12일, 미국과 스페인은 휴전 의정서에 서명했다. 이후 파리에서 평화 협상이 시작되어 12월 10일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이 체결되었다:
-
쿠바의 독립: 스페인은 쿠바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다(그러나 쿠바는 미국의 군사 점령 하에 들어갔고, 이후 플랫 수정안에 의해 미국의 개입권이 보장되었다).
-
푸에르토리코와 괌의 할양: 스페인은 푸에르토리코와 괌을 미국에 할양했다.
-
필리핀 매각: 스페인은 2천만 달러를 받고 필리핀을 미국에 매각했다.
-
전쟁 부채: 양국은 각자의 전쟁 부채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파리 조약은 1899년 2월 6일 미국 상원에서 비준되었으나, 필리핀 합병에 대한 반대가 강해 겨우 2표 차이로 통과되었다. 스페인은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팔라우를 1899년 독일에 매각했다. 이로써 스페인 제국은 오세아니아와 아메리카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아프리카의 작은 영토(스페인령 모로코, 적도 기니, 서사하라)만 남게 되었다.
동맹국과 국제적 반응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양측의 동맹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
스페인: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유럽 강대국들은 스페인에 동정적이었으나 실질적 지원은 제공하지 않았다.
-
미국: 공식적인 동맹국은 없었지만, 영국의 암묵적 지지를 받았다. 이는 미-영 관계 개선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국제사회의 반응은 다양했다:
- 유럽 강대국들: 미국의 식민 제국 등장을 우려했다.
- 라틴아메리카: 대체로 쿠바 독립을 지지했으나, 미국의 영향력 확대에는 경계심을 가졌다.
- 일본: 미국의 태평양 진출을 주목하며 새로운 경쟁자로 인식했다.
- 필리핀 독립운동: 미국을 처음에는 해방자로 환영했으나, 곧 새로운 식민 지배자로 인식하게 되어 미-필리핀 전쟁(1899-1902)이 이어졌다.
전쟁이 스페인에 미친 영향
"1898년의 재난"과 심리적 충격
스페인에게 1898년의 패배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를 넘어 국가적 트라우마였다. 이 "재난"(El Desastre)은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쳤다:
-
국가적 자존심 상처: 한때 세계 최강 제국이었던 스페인이 신흥 강국 미국에게 쉽게 패배한 것은 국가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
정체성 위기: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의 상실은 스페인의 제국적 정체성의 종말을 의미했다. 스페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세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다시 정의해야 했다.
-
역사적 회고: 이 패배는 스페인 쇠퇴의 최종적 확인으로 여겨졌고, 16세기 이래 스페인 제국의 점진적 몰락 과정의 마지막 장으로 인식되었다.
-
심리적 충격: 전쟁은 빠르게 끝나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스페인군 사망자 약 3,300명, 대부분 질병으로 인한 사망), 심리적 충격은 매우 컸다.
정치적 결과와 체제 위기
전쟁 패배는 스페인 내부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
복원 체제의 위기: 1875년 이후 유지되어 오던 안정적인 '복원 체제'(Restauración)의 정당성이 크게 약화되었다. 카노바스와 사가스타가 주도한 정치 시스템은 국가적 위기를 예방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
정치적 책임론: 군부는 패배의 책임을 정치인들에게 돌렸고, 정치인들은 군부의 무능함을 비판했다.
-
군부의 불만: 식민지 전쟁에서 돌아온 장교들은 불만과 굴욕감을 품고 있었으며, 이는 이후 군부의 정치 개입 강화로 이어졌다.
-
공화주의와 사회주의 강화: 왕정과 전통 정당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등 체제 외부 세력이 성장했다.
-
지역주의 운동 성장: 카탈루냐와 바스크 등에서는 중앙 정부의 실패를 자신들의 자치 또는 독립 주장의 근거로 삼았다.
경제적 영향
전쟁 패배 이후 스페인 경제에는 다음과 같은 변화가 있었다:
-
식민지 시장 상실: 쿠바, 푸에르토리코는 스페인 제품(특히 카탈루냐 섬유)의 주요 시장이었으며, 이들 시장을 상실한 것은 스페인 산업에 타격이었다.
-
자본 귀환: 식민지에서 사업을 하던 스페인인들('인디아노스', Indianos)이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가져온 자본은 일부 지역(특히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 카탈루냐)의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
국내 지향적 발전: 식민지를 잃은 스페인은 내부 시장 개발과 국내 산업화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
재정 문제: 전쟁 비용과 식민지 상실로 인한 세수 감소는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었다.
사회·문화적 반응: '98세대'
전쟁 패배는 스페인 지식인들 사이에 깊은 성찰과 자기비판의 물결을 일으켰다. 이 시기의 주요 작가와 지식인들은 '98세대'(Generación del 98)로 불린다:
-
주요 인물: 미겔 데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 아소린(Azorín), 피오 바로하(Pío Baroja), 안토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 라몬 델 바예-인클란(Ramón del Valle-Inclán) 등
-
주요 관심사:
- '스페인 문제'(Problema de España): 스페인의 쇠퇴 원인과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성찰
- 카스티야의 풍경과 정신: 스페인 중심부의 황량한 풍경에서 국가적 본질을 찾으려 함
- 유럽화와 전통 사이의 균형: 스페인이 근대 유럽의 일원이 되면서도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법 모색
- 비관주의와 실존적 고뇌: 국가적 위기를 개인적 실존 문제와 연결
-
문학적 특징: 전통적 현실주의에서 벗어나 인상주의, 상징주의 등 새로운 문학 기법을 도입했다.
'98세대'의 영향은 단순히 문학적 영역을 넘어 스페인의 지적, 문화적 재생과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재생운동(Regeneracionismo)
'재생운동'은 1898년 패배 이후 스페인 사회와 정치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지식인 운동이었다:
-
주요 인물: 호아킨 코스타(Joaquín Costa), 리카르도 마시아스 피카베아(Ricardo Macías Picavea), 루카스 마야다(Lucas Mallada)
-
핵심 주장:
- 교육 개혁: 문맹 퇴치와 기술 교육 강화
- 농업 개혁: 관개 시설 확충('수리 정책', política hidráulica)
- 부패한 정치 시스템(카시키스모) 철폐
- 행정 개혁과 근대화
-
영향: 재생운동은 이후 스페인의 교육 개혁(자유교육협회, Institución Libre de Enseñanza), 경제 정책, 정치 개혁에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초 스페인의 변화와 재정비
알폰소 13세의 통치 시작
1902년, 16세가 된 알폰소 13세(Alfonso XIII)는 성년이 되어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어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17년 섭정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
통치 스타일: 젊은 알폰소는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개혁에 관심을 보였으나, 동시에 보수적 성향과 군부에 대한 애착도 가지고 있었다.
-
초기 정책: 안토니오 마우라(Antonio Maura)와 같은 개혁 성향의 보수 정치인들이 "위로부터의 혁명"(revolución desde arriba)을 통한 체제 쇄신을 시도했다.
-
국제 관계: 알폰소 13세는 스페인의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1907년 카르타헤나 협정을 통해 영국, 프랑스와 지중해 관련 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스페인이 다시 유럽 외교 무대에 복귀했음을 의미했다.
-
군 개혁: 러시아-일본 전쟁(1904-1905)의 교훈을 토대로 스페인군의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추가 예산 확보의 어려움과 군부 내 저항으로 제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
사회 개혁: 노동자 보호법, 사회보험 시스템 도입 등 초기 사회 복지 정책이 시도되었다. 에두아르도 다토(Eduardo Dato)의 보수정부는 일요일 휴무제, 산업재해 보상 등을 도입했다.
모로코 문제와 해외 정책
스페인은 국내 문제와 함께 북아프리카, 특히 모로코에서의 식민지 확장에도 관심을 가졌다:
-
스페인령 모로코 설정: 1906년 알헤시라스 회의와 1912년 프랑스-스페인 조약으로 모로코 북부 지역(리프 지역)이 스페인의 보호령이 되었다.
-
리프 전쟁(1911-1927): 모로코 현지인들의 저항은 강력했다. 특히 1921년 안누알 전투(Battle of Annual)에서 스페인군은 압드 엘-크림(Abd el-Krim)이 이끄는 리프 부족에게 대패했다. 이 패배로 약 8,000-10,000명의 스페인 병사가 사망했으며, 이는 스페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
정치적 결과: 안누알 패배는 스페인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피카소 보고서'(Expediente Picasso)를 통한 책임 규명 과정에서 알폰소 13세의 책임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는 결국 1923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Miguel Primo de Rivera)의 쿠데타로 이어졌다.
사회·경제적 변화
20세기 초 스페인 사회와 경제는 다음과 같은 변화를 겪었다:
-
산업 발전: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기간 동안 스페인은 중립을 유지하면서 전쟁 특수를 누렸다. 유럽 교전국들에 물자를 공급함으로써 산업과 무역이 크게 성장했다.
-
도시화 가속: 산업 발전과 함께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빌바오 같은 도시로의 인구 유입이 증가했다. 1900년 스페인 인구의 약 30%가 도시에 거주했지만, 1930년에는 약 42%로 증가했다.
-
사회 계층 변화: 산업 노동자 계층이 증가했고, 도시 중산층도 성장했다. 이들은 정치적 권리와 사회적 개혁을 요구하는 주요 세력이 되었다.
-
노동 운동의 성장: 사회주의계 전국노동연합(UGT)과 아나키즘계 전국노동연맹(CNT)의 조직력과 영향력이 크게 증가했다.
-
지역 간 불균형: 카탈루냐, 바스크 지방, 마드리드 등은 산업화가 진행된 반면, 안달루시아, 에스트레마두라 등 남부와 서부 지역은 여전히 후진적인 농업 경제가 지배적이었다.
정치적 불안정과 위기
1898년 패배 이후 복원 체제는 점차 붕괴되어 갔다:
-
전통 정당의 분열: 보수당과 자유당은 각각 내부적으로 분열되었다. 마우라, 다토, 산체스 게라(Sánchez Guerra) 등 서로 다른 보수 분파와 로마노네스(Romanones), 가르시아 프리에토(García Prieto), 산티아고 알바(Santiago Alba) 등 자유주의 분파가 경쟁했다.
-
새로운 정치 세력: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지역주의자, 개혁주의자 등 체제 외부의 정치 세력이 성장했다. 1909년 알레한드로 레루(Alejandro Lerroux)의 공화파, 1910년 파블로 이글레시아스(Pablo Iglesias)의 사회주의자 등이 최초로 의회에 진출했다.
-
사회적 갈등: 노동 분쟁, 파업, 사회적 소요가 증가했다. 특히 1909년 바르셀로나의 '비극의 한 주'(Semana Trágica)는 모로코 파병에 반대하는 대규모 소요로 발전했고, 정부는 이를 강경하게 진압했다.
-
군부의 정치 개입: 군 장교들은 '국방 위원회'(Juntas de Defensa)를 조직하여 정치적 압력 단체로 활동했다. 특히 1917년 위기 당시 군 위원회들의 활동은 민간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
1917년 위기: 군 위원회, 의회 개혁 운동, 노동자 총파업이 겹치면서 복합적인 정치 위기가 발생했다. 이는 군주제의 향후 지속 가능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전후 위기와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시 호황이 끝나면서 스페인은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
경제 불황: 전후 유럽 시장이 정상화되면서 스페인 상품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고, 이는 산업 불황과 실업 증가로 이어졌다.
-
사회적 불안: 러시아 혁명(1917)의 영향으로 노동 운동이 급진화되었다. 1918-1920년 바르셀로나에서는 노사 갈등이 격화되어 '피스톨레리스모'(pistoleros, 고용주와 노동 지도자 간의 암살전)가 벌어졌다.
-
모로코 문제: 앞서 언급한 1921년 안누알 참사는 스페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책임 소재를 둘러싼 논쟁이 정치적 위기를 심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3년 9월 13일, 카탈루냐 지방 총독이었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알폰소 13세는 이 쿠데타를 묵인하고 프리모 데 리베라를 총리로 임명했다. 이로써 스페인은 1923년부터 1930년까지 군사 독재 체제로 들어갔다.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졌다:
-
정치적 억압: 의회가 해산되고, 정당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언론 검열이 강화되었다.
-
경제 정책: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이 추진되었다. 도로, 철도, 댐 등 인프라 구축에 큰 투자가 이루어졌다.
-
모로코 문제 해결: 프랑스와 협력하여 압드 엘-크림의 반란을 진압했다(1925-1926).
-
노동 정책: 노사 협력을 강조하는 코포라티즘(corporatism) 정책을 펼쳤다. 노동자와 고용주가 함께 참여하는 혼합 위원회를 통해 노동 분쟁을 해결하려 했다.
-
지역주의 억압: 카탈루냐, 바스크 등의 지역주의 운동을 강력하게 억압했다.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는 초기에는 일부 성과를 거두었으나, 점차 국민적 지지를 잃어갔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영향, 페세타(스페인 화폐)의 가치 하락, 지식인과 학생들의 반발 등으로 인해 체제는 약화되었다. 결국 1930년 1월 28일, 군부의 지지를 상실한 프리모 데 리베라는 사임하고 프랑스로 망명했다(1930년 3월 사망).
1898년 이후 스페인의 문화와 지적 생활
문학과 예술의 발전
1898년 이후 스페인 문화는 국가적 위기를 배경으로 오히려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
문학: '98세대' 이후 '14세대'(Generación del 14)와 '27세대'(Generación del 27)가 등장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 라몬 고메스 데 라 세르나(Ramón Gómez de la Serna),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라파엘 알베르티(Rafael Alberti), 루이스 세르누다(Luis Cernuda) 등이 활동했다.
-
미술: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후안 그리스(Juan Gris),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호안 미로(Joan Miró) 등 세계적 화가들이 이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은 입체파의 시작을 알렸다.
-
음악: 마누엘 데 파야(Manuel de Falla), 이삭 알베니스(Isaac Albéniz), 엔리케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 등의 작곡가들이 스페인 민속 음악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을 창작했다.
-
건축: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의 독특한 모더니즘 건축이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ília), 카사 밀라(Casa Milà), 카사 바틀요(Casa Batlló) 등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교육과 학문의 변화
1898년 패배 이후, 교육과 과학 발전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
자유교육협회(Institución Libre de Enseñanza): 프란시스코 히네르 데 로스 리오스(Francisco Giner de los Ríos)가 이끈 이 기관은 세속적, 진보적 교육을 통한 스페인 재생을 추구했다.
-
학생거주기숙사(Residencia de Estudiantes): 1910년 설립된 이 기관은 스페인 젊은 지식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르카, 달리,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 등이 이곳에서 만나고 교류했다.
-
과학연구위원회(Junta para Ampliación de Estudios): 1907년 설립된 이 기관은 스페인 연구자들의 해외 유학을 지원하고 연구소를 설립했다.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Santiago Ramón y Cajal, 1906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이 주요 인물이었다.
-
여성 교육의 확대: 20세기 초 여성의 교육 기회가 점차 확대되었다. 특히 마리아 데 마에스투(María de Maeztu)가 이끈 여성거주기숙사(Residencia de Señoritas)는 여성 고등교육의 중요한 공간이었다.
스페인 사상의 발전
20세기 초 스페인 사상계의 주요 인물과 흐름은 다음과 같다:
-
미겔 데 우나무노: 실존주의적 기독교 사상가로, 이성과 신앙 사이의 갈등, 개인의 불멸에 대한 열망 등을 탐구했다. 대표작으로는 "삶의 비극적 감정"(Del sentimiento trágico de la vida, 1913)이 있다.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유럽의 철학적 전통(특히 독일 철학)을 스페인에 소개했다. "대중의 반란"(La rebelión de las masas, 1930)에서 엘리트주의적 관점에서 현대 사회를 비판했다. 그의 철학잡지 "서양평론"(Revista de Occidente)은 스페인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유제니오 도르스(Eugenio d'Ors): 카탈루냐 출신 지식인으로 '노우센티스모'(Noucentisme) 운동을 이끌었다. 지중해적 고전주의와 합리성을 강조했다.
결론: 1898년 전쟁의 역사적 의미와 유산
스페인-미국 전쟁과 식민지 상실은 스페인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유산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국제적 맥락에서의 의미
-
제국주의 시대 변화: 이 전쟁은 구 유럽 제국(스페인)과 신흥 제국주의 국가(미국) 사이의 세력 전환을 상징한다.
-
미국의 부상: 미국은 이 전쟁을 통해 처음으로 해외 식민지를 획득하고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
국제 질서 변화: 스페인의 식민지들은 미국의 영향권으로 편입되었고, 이는 카리브해와 태평양에서의 세력 균형을 변화시켰다.
스페인 국내적 의미
-
제국에서 민족국가로의 전환: 식민지 상실은 스페인이 완전히 제국에서 민족국가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
국가 정체성의 재정의: 스페인은 제국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유럽의 한 국가로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재정의해야 했다.
-
정치 체제의 위기: 복원 체제의 정당성이 약화되었고, 이는 결국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제2공화정, 내전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불안정의 시작점이 되었다.
-
문화적 르네상스: 역설적으로, 국가적 위기는 문학, 예술, 철학 등 문화적 르네상스의 배경이 되었다.
장기적 영향
-
개혁과 근대화 과제: 1898년의 충격은 스페인 사회와 정치의 근본적 개혁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
-
세대 간 인식 차이: '재난' 이후 태어난 세대와 그 이전 세대 사이에는 국가 정체성과 미래 방향에 대한 인식 차이가 있었다.
-
20세기 스페인 정치의 패턴 형성: 개혁파와 보수파, 세속주의자와 가톨릭 세력, 중앙집권주의자와 지역주의자 사이의 갈등 패턴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으며, 이는 20세기 스페인 정치의 주요 축을 이루게 되었다.
-
자부심의 재발견: 시간이 지나면서, 스페인은 제국적 과거보다는 문화, 예술, 문학적 성취를 통해 새로운 국가적 자부심을 발견해갔다.
1898년 전쟁과 그 여파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스페인이 근대 민족국가로 재탄생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의 일부였다. 이 "재난"은 결국 스페인이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고, 현재를 반성하며, 미래를 새롭게 그려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의 스페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898년이라는 역사적 전환점과 그 이후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