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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역사 기본 17. 이사벨 2세, 제1공화정, 그리고 부르봉 왕정 복귀(19세기 중후반)
19세기 중후반 스페인은 급격한 정치적 변화와 불안정을 경험했다. 이사벨 2세의 통치 말기부터 알폰소 12세로 이어지는 이 시기는 왕정, 공화정, 그리고 다시 왕정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정치 실험의 연속이었다. 이 기간 동안 스페인은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시도했지만, 정치 세력 간의 깊은 분열과 군부의 빈번한 개입으로 인해 안정적인 체제를 확립하지 못했다.
이사벨 2세의 통치 후기와 위기(1856-1868)
온건파와 자유연합의 정치
이사벨 2세 통치의 중반기에는 온건파(Moderados)와 자유연합(Unión Liberal)이 번갈아 정권을 잡았다. 온건파는 나르바에스(Ramón María Narváez) 장군이 이끌었고, 자유연합은 레오폴도 오도넬(Leopoldo O'Donnell) 장군의 지도 아래 있었다. 자유연합은 온건파와 진보파 사이의 중도적 입장을 취했으며, 양측의 온건한 인사들을 규합하려 했다.
오도넬의 자유연합 정부(1858-1863)는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를 보여주었다. 이 시기에 스페인은 해외 원정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 했다. 모로코 전쟁(1859-1860)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인도차이나 원정(1858-1862)에 참여했으며, 멕시코 원정(1861-1862)도 시도했다. 이러한 원정은 국내 문제로부터 국민의 관심을 돌리고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철도 건설, 은행 시스템 확장, 그리고 일부 지역의 산업화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지역적으로 불균등했고, 주로 카탈루냐, 바스크 지방, 마드리드 등에 집중되었다.
정치적 위기의 심화
1863년 오도넬 정부가 퇴진한 후, 정치 상황은 악화되었다. 나르바에스의 온건파가 다시 권력을 잡았으나, 점점 더 억압적인 정책을 펼쳤다. 언론 검열이 강화되었고,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다.
특히 대학에서의 자유로운 학문적 표현을 둘러싼 '대학 문제'(cuestión universitaria)가 발생했다. 정부는 교수들에게 이사벨 여왕과 정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도록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많은 교수들이 면직되었다. 이는 지식인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정부에 대한 불만을 키웠다.
1866년에는 진보파 장군 프림(Juan Prim)과 급진주의자들이 군사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정부의 억압은 더욱 심해졌고, 많은 반대파 인사들이 망명해야 했다.
경제 위기와 사회적 불안
1860년대 중반, 스페인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1864-1866년의 금융 위기는 철도와 은행 부문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로 인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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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투자의 과열: 철도 건설에 과도한 투자가 이루어졌으나, 예상했던 수익을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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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금융 시장의 위기: 영국과 프랑스의 금융 위기가 스페인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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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화 공급 부족: 미국 남북전쟁(1861-1865)으로 인한 면화 공급 감소는 카탈루냐의 섬유 산업에 타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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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적자 증가: 정부의 비효율적인 세금 징수와 과도한 지출로 국가 부채가 증가했다.
이 금융 위기는 1867-1868년의 심각한 농업 위기와 맞물렸다. 가뭄과 흉작으로 식량 가격이 상승했고, 농촌 지역에서는 실업과 빈곤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켰고, 정부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켰다.
1868년 9월 혁명과 이사벨 2세의 축출
이러한 정치적·경제적 위기 속에서, 1868년 9월 '영광의 혁명'(La Gloriosa)이 일어났다. 이는 해군 제독 토페테(Juan Bautista Topete)가 카디스에서 시작한 군사 반란으로, 프림과 세라노(Francisco Serrano) 장군이 합류했다.
혁명군은 "스페인의 명예를 짓밟은 부르봉 왕가에 죽음을!"(¡Abajo los Borbones!)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들은 부패한 왕정을 타도하고,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져오겠다고 선언했다.
혁명은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마드리드를 포함한 주요 도시들에서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사벨 2세는 바스크 지방의 산 세바스티안에서 휴가 중이었는데, 반란 소식을 듣고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녀는 다시는 스페인에 돌아오지 않았다.
혁명이 성공한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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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범위한 동맹: 혁명 세력에는 진보파, 민주파, 공화파, 불만을 품은 온건파까지 다양한 정치 세력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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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의 지지: 군 고위층의 상당수가 기존 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었고, 하급 장교들 사이에서는 진보적 이념이 확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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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과 지식인의 지지: 자유주의적 중산층, 대학 교수, 학생들은 이사벨 정권의 부패와 억압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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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 금융과 농업 위기로 인한 실업과 빈곤은 민중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혁명 6년과 정치 실험(1868-1874)
임시 정부와 1869년 헌법
이사벨 2세가 축출된 후, 세라노 장군이 임시 국가 수반으로, 프림 장군이 총리로 임시 정부를 구성했다. 이 정부의 첫 조치는 보통 남성 참정권에 기초한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1869년 6월 제정된 헌법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헌법 중 하나였다. 이 헌법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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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재민: 주권은 국민에게 있음을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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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보장: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기본권을 광범위하게 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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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남성 참정권: 25세 이상 모든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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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권분립: 입법, 행정, 사법부의 명확한 분리를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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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헌군주제: 정부 형태로 보충적 기능의 군주를 둔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다.
이 헌법의 제정과 함께, 정부 형태에 대한 논쟁이 격화되었다. 프림과 세라노를 비롯한 대다수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했지만, 에스테바네스(Nicolás Estévanez), 카스텔라르(Emilio Castelar), 피 이 마르갈(Francisco Pi y Margall) 등은 공화제를 주장했다.
사보이 왕가의 아마데오 1세(1870-1873)
입헌군주제가 결정된 후, 스페인은 새 왕을 찾아야 했다. 여러 후보가 검토되었으나, 프림의 지지로 이탈리아 사보이 가문의 아오스타 공작 아마데오(Amadeo of Savoy)가 선정되었다.
그러나 아마데오가 1870년 12월 30일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그를 지지했던 프림 장군은 이미 암살당한 상태였다. 이는 아마데오의 통치가 처음부터 어려움에 직면할 것임을 예고했다.
아마데오는 진정한 입헌군주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헌법을 준수했고, 정당 간의 정권 교체를 존중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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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지지 기반의 부재: 주요 지지자였던 프림의 사망 후, 아마데오는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갖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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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귀족들의 냉대: 전통적인 스페인 귀족들은 외국인 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왕궁 행사에도 불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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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리스타 반란: 카를로스 7세를 지지하는 카를리스타들이 북부에서 3차 카를리스타 전쟁(1872-1876)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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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독립 전쟁: 쿠바에서는 십년 전쟁(1868-1878)이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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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분열: 그를 지지했던 자유 세력도 루소리스타(Ruiz Zorrilla 지지 급진파)와 사가스티스타(Sagasta 지지 헌정파)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아마데오는 2년 2개월의 짧은 통치 끝에 1873년 2월 11일 왕위를 포기했다. 그의 퇴위 선언에는 "스페인 사람들은 통치할 수 없다"(Estos españoles son ingobernables)라는 유명한 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제1공화정의 수립과 위기(1873-1874)
아마데오의 퇴위 직후, 의회는 스페인을 공화국으로 선언했다. 이렇게 시작된 제1공화정(Primera República)은 스페인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실험이었다.
공화정은 처음부터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공화파 내부에서도 단일 공화국을 원하는 중앙집권주의자와 연방제를 주장하는 연방주의자 사이에 분열이 있었다. 또한 농촌 지역과 군부 내에는 강한 왕당파 성향이 남아 있었다.
제1공화정 기간 동안 네 명의 대통령이 연속해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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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Estanislao Figueras): 1873년 2월-6월. 초기 혼란 속에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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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Francisco Pi y Margall): 1873년 6월-7월. 연방주의자로, 스페인을 자치 칸톤의 연방으로 만들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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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살메론(Nicolás Salmerón): 1873년 7월-9월. 칸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했으나, 사형 선고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고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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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오 카스텔라르(Emilio Castelar): 1873년 9월-1874년 1월. 질서 회복을 위해 비상 권한을 행사했으나, 의회의 신임을 잃었다.
공화정 기간 중 가장 심각한 위기는 '칸톤 반란'(Rebelión cantonal)이었다. 1873년 여름, 카르타헤나, 발렌시아, 세비야 등 여러 도시에서 급진적 연방주의자들이 독립적인 '칸톤'(자치 단위)을 선언했다. 특히 카르타헤나 칸톤은 1874년 1월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이와 동시에 북부에서는 카를리스타 전쟁이 계속되었고, 쿠바에서는 독립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이러한 다중적 위기는 공화정의 권위와 통치 능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결국 1874년 1월 3일, 카스텔라르가 의회에서 신임을 잃자, 마누엘 파비아(Manuel Pavía) 장군이 의회를 해산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어서 세라노 장군이 이끄는 권위주의적 공화정이 잠시 유지되었다.
그러나 1874년 12월 29일, 마르티네스 캄포스(Martínez Campos) 장군이 사군토에서 이사벨 2세의 아들 알폰소를 왕으로 선포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제1공화정은 종말을 맞이했고, 부르봉 왕조가 복원되었다.
왕정 복고와 알폰소 12세의 통치(1874-1885)
왕정 복고의 배경과 과정
부르봉 왕조의 복원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로 인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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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안정에 대한 갈망: 많은 스페인 사람들, 특히 재산 소유층은 6년간의 정치적 혼란 후 안정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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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의 이미지: 알폰소는 영국에서 교육받은 젊고 현대적인 왕자로 인식되었다. 그는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보낸 '산드허스트 선언'(Manifiesto de Sandhurst)에서 입헌군주제와 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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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의 지지: 스페인 군 내 영향력 있는 장군들, 특히 마르티네스 캄포스가 왕정 복고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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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바스의 정치적 노력: 안토니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Antonio Cánovas del Castillo)는 정치적 세력들을 규합하여 왕정 복고를 준비했다. 그는 왕당파뿐만 아니라 온건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도 얻었다.
마르티네스 캄포스의 쿠데타 후, 제1공화정의 대통령이었던 세라노는 저항하지 않고 물러났다. 알폰소 12세는 1875년 1월 스페인에 입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시 카노바스를 총리로 임명했다.
복원 체제(Restauración)의 확립
카노바스는 '복원 체제'(Sistema de la Restauración)라고 불리는 새로운 정치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체제의 핵심 원칙은 정치적 안정과 질서 유지였으며,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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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헌법: 카노바스가 초안한 새 헌법은 1869년 헌법보다 덜 진보적이었다. 이 헌법은 국왕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했으며, 제한적 참정권을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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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당 체제: 카노바스는 보수당(Partido Conservador)을 이끌었고, 프라세데스 마테오 사가스타(Práxedes Mateo Sagasta)는 자유당(Partido Liberal)을 주도했다. 두 정당은 '교대주의'(turno pacífico)라는 시스템을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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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키스모(Caciquismo): 지방 정치는 '카시케'(cacique)라 불리는 지역 유력자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이들은 선거 결과를 조작하여 중앙 정부가 원하는 결과를 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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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와의 화해: 복원 체제는 가톨릭교회의 특권을 일부 회복시켰다. 교회는 교육에 대한 영향력을 되찾았고,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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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통제: 초기에는 검열이 강화되었으나, 점차 완화되어 제한적 언론 자유가 허용되었다.
이러한 시스템은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지만, 진정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선거는 조작되었고, 대중의 정치 참여는 제한되었다.
카를리스타 전쟁과 쿠바 전쟁의 종결
알폰소 12세와 카노바스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진행 중이던 두 개의 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었다.
제3차 카를리스타 전쟁(1872-1876)은 북부 지역, 특히 바스크와 나바라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알폰소 12세는 직접 북부 전선에 가서 군대를 지휘했고, 1876년 2월 카를리스타의 지도자 카를로스 7세(돈 카를로스)가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카를리스타 전쟁 종결 후, 바스크 지방의 전통적 특권인 푸에로스(fueros)가 폐지되었다. 이는 바스크 민족주의의 성장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쿠바에서는 십년 전쟁(1868-1878)이 계속되고 있었다. 스페인은 더 많은 군대를 파견하고, 일부 개혁을 약속했다. 1878년 2월 산혼 협정(Pacto de Zanjón)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쿠바는 독립을 얻지 못했지만, 노예 해방과 일정한 정치적 개혁을 약속받았다.
이 두 전쟁의 종결은 복원 체제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알폰소 12세는 "평화의 왕"(Rey Pacificador)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알폰소 12세의 통치와 정책
알폰소 12세(1874-1885)의 통치 기간은 상대적으로 짧았지만, 스페인의 근대화와 안정화에 중요한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카노바스의 보수당과 사가스타의 자유당 사이의 교대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1881년에는 최초로 사가스타의 자유당이 평화적으로 정권을 인수했으며, 이는 교대주의 시스템의 작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경제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발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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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발전: 카탈루냐의 섬유 산업, 아스투리아스의 석탄 산업, 비스카야의 제철 산업이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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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확장: 철도망이 계속 확장되어 국내 시장 통합을 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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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개혁 시도: 농업 현대화와 관개 시설 개선이 추진되었으나, 대토지 소유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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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무역: 프랑스, 영국과의 무역이 증가했으며, 쿠바와 필리핀의 식민지 무역도 중요했다.
사회적으로는 도시화가 진행되고, 노동 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1879년에는 스페인 사회주의노동당(PSOE)이 창당되었고, 1888년에는 전국노동연합(UGT)이 설립되었다.
알폰소 12세는.양측 결혼으로 정치적 화합을 시도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사촌인 메르세데스(Mercedes of Orléans)였으나, 그녀는 결혼 5개월 만에 사망했다. 두 번째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María Cristina)와의 사이에서 딸 메르세데스와 아들 알폰소(후의 알폰소 13세)를 두었다.
불행히도 알폰소 12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 당시 왕비는 임신 중이었고, 사망 후 태어난 아들(알폰소 13세)이 왕위를 계승했다. 이로 인해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섭정(1885-1902)을 맡게 되었다.
섭정 시기와 1898년 위기(1885-1898)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섭정
알폰소 12세의 사망 후,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태어날 자녀(후의 알폰소 13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을 맡게 되었다. 이 섭정 기간(1885-1902)에는 카노바스와 사가스타가 계속해서 번갈아 가며 정권을 잡는 교대주의 시스템이 유지되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특별한 개인적 정치 아젠다 없이, 복원 체제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녀는 정치보다는 아들의 교육과 왕위 준비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은 1890년 보통 남성 참정권의 도입이었다. 사가스타의 자유당 정부는 25세 이상 모든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카시키스모 시스템으로 인해 선거는 여전히 조작되었다.
사회·경제적 발전과 지역주의의 대두
섭정 시기에 스페인의 산업화는 계속되었으나, 여전히 특정 지역에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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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섬유 산업이 발전했으며,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최대의 산업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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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크 지방: 비스카야와 기푸스코아에서 철강 산업과 조선업이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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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투리아스: 석탄 채굴과 광업이 발전했다.
이러한 불균등한 산업화는 지역주의의 성장에 기여했다. 특히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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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민족주의: 카탈루냐의 산업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스페인의 경제 발전을 이끌고 있음에도 마드리드 중앙 정부에서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카탈루냐 민족주의는 문화적 르네상스('레나이셴자', Renaixença)를 넘어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했다. 1892년 발렌티 알미랄(Valentí Almirall)은 '카탈루냐주의 연합'(Unió Catalanista)을 결성했고, 같은 해 '만레사 기초'(Bases de Manresa)라는 카탈루냐 자치 요구 문서가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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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크 민족주의: 사바노 아라나(Sabino Arana)는 1895년 바스크 민족당(PNV)을 창당했다. 그는 바스크의 언어, 문화, 전통적 가치를 강조하며,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바스크 민족주의는 전통과 가톨릭 신앙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산업화와 스페인화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지역주의 운동들은 스페인의 국가 정체성과 통합에 도전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노동 운동과 사회 갈등
산업화의 진전으로 도시 노동자 계층이 성장하면서, 노동 운동도 활발해졌다. 스페인의 노동 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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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1879년 파블로 이글레시아스(Pablo Iglesias)가 스페인 사회주의노동당(PSOE)을 창당했다. 1888년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연합(UGT)이 설립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선거 참여와 점진적 개혁을 통한 변화를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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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스페인, 특히 안달루시아와 카탈루냐에서는 아나키즘이 강한 영향력을 가졌다. 1910년에는 아나키스트 성향의 전국노동연맹(CNT)이 설립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즉각적인 사회 혁명과 국가의 폐지를 주장했다.
노동 갈등은 종종 폭력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1892년 헤레스 봉기(Jerez uprising), 1896-1897년 바르셀로나 폭탄 테러, 1898년 농촌 소요 등이 발생했다. 정부는 이러한 노동 운동과 사회 갈등에 주로 억압으로 대응했다.
쿠바와 필리핀 독립 전쟁
19세기 말, 스페인의 마지막 주요 식민지였던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에서 독립 운동이 강화되었다. 특히 쿠바에서는 1895년 호세 마르티(José Martí)의 지도 아래 두 번째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쿠바 반군은 '마체테로스'(machete를 사용하는 게릴라)라 불리는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다. 스페인은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 장군을 파견하여 '재집결 정책'(reconcentración)이라는 가혹한 대응 전략을 펼쳤다. 이는 농민들을 특정 지역에 강제로 집결시켜 반군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전략이었지만, 많은 민간인 사망자를 낳았다.
필리핀에서도 1896년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가 이끄는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는 호세 리살(José Rizal)과 같은 지식인들이 주도한 개혁 운동인 '프로파간다 운동'(Propaganda Movement)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이러한 식민지 전쟁은 스페인에 큰 인적, 물적 부담을 주었다. 1897년 카노바스 총리가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암살된 후, 사가스타 정부는 식민지 문제에 대한 유화 정책을 시도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미국-스페인 전쟁(1898)과 '재난'(El Desastre)
1898년 2월 15일, 쿠바의 하바나 항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메인(USS Maine)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언론은 이를 스페인의 소행으로 몰아갔고, 이는 미국의 선전포고로 이어졌다.
미국-스페인 전쟁은 스페인에게 완전한 재앙이었다. 필리핀 마닐라 만에서 조지 듀이(George Dewey)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가 스페인 함대를 격파했다. 쿠바에서는 산티아고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가 다시 패배했다. 육지에서도 미국 원정군이 산후안 고지 전투 등에서 승리했다.
짧은 전쟁 끝에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 쿠바의 독립을 인정했다(실제로는 미국의 영향권에 들어감).
- 푸에르토리코와 괌을 미국에 할양했다.
- 필리핀을 2,000만 달러에 미국에 매각했다.
1898년의 패배는 스페인에게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마지막 주요 식민지들의 상실을 넘어, 스페인의 국제적 위상과 자존심에 큰 타격을 의미했다. 이 '재난'(El Desastre)은 스페인이 이차적인 유럽 강국으로 전락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98세대'와 지식인들의 반응
'98세대'의 등장과 특징
1898년의 재난적인 패배는 스페인 지식인들 사이에 깊은 성찰과 자기비판의 물결을 일으켰다. 이 시기에 활동한 작가와 지식인 그룹을 '98세대'(Generación del 98)라고 부른다.
이 그룹에는 미겔 데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 피오 바로하(Pío Baroja), 아소린(Azorín), 안토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 라몬 델 바예-인클란(Ramón del Valle-Inclán) 등이 포함된다. 이들의 주요 관심사와 특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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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정체성과 본질 탐구: 그들은 "스페인 문제"(problema de España)라는 개념을 통해 스페인의 쇠퇴 원인과 정체성의 위기를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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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에 대한 관심: 스페인의 중심부인 카스티야 지방의 풍경, 역사, 민중들에 대한 깊은 성찰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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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태도: 그들은 기존 정치 체제, 사회 구조, 문화적 지체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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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화와 전통 사이의 균형 모색: 스페인의 유럽화(Europeanization)를 옹호하면서도, 독특한 스페인적 가치와 전통의 보존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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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혁신: 전통적인 문학 형식을 벗어나 새로운 표현 방식과 주제를 탐구했다.
'98세대'의 작품은 종종 철학적이고 내성적이며, 존재론적 질문을 다루었다. 예를 들어, 우나무노의 "삶의 비극적 감정"(El sentimiento trágico de la vida)은 신앙과 이성 사이의 갈등, 죽음과 불멸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재생운동(Regeneracionismo)과 정치적 대안
'재생운동'(Regeneracionismo)은 1898년 패배 이후 스페인 사회와 정치 체제의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한 지식인 운동이다. 이 운동의 주요 인물은 호아킨 코스타(Joaquín Costa)로, 그는 "철의 외과의사"(Cirujano de hierro)가 스페인의 병폐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생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개혁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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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개혁: 문맹률 감소와 과학, 기술 교육 강화를 통한 국가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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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개혁: 관개 시설 확충,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 확대, 농업 현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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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개혁: 카시키스모(부패한 지방 정치 시스템) 철폐와 진정한 대의 민주주의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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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혁: 국내 산업 보호와 경제 근대화.
재생운동은 직접적인 정치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20세기 초 스페인의 정치 개혁 논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 프란시스코 히네르 데 로스 리오스(Francisco Giner de los Ríos)가 이끄는 '자유교육협회'(Institución Libre de Enseñanza)는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교육을 통한 사회 변화를 추구했다.
세기 전환기 스페인의 모습(1898-1902)
복원 체제의 위기
1898년 패배는 복원 체제의 정당성을 크게 약화시켰다. 교대주의 시스템은 점점 더 공허한 형식으로 변질되어갔다.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복원 체제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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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와 대중의 분리: 정치 엘리트들은 일반 대중의 요구와 열망에서 점점 더 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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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 지역주의자들은 기존 체제에 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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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의 불만: 군 장교들은 1898년 패배의 책임을 정치인들에게 돌렸고, 군부의 특권과 위상 강화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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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변화: 도시화, 산업화, 그리고 신흥 중산층의 등장은 전통적인 사회 구조를 변화시켰다.
사가스타의 마지막 정부(1901-1902)는 일부 개혁을 시도했지만, 근본적인 체제 변화를 이루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1902년 노동법은 여성과 아동 노동을 제한하고 산업 재해 보상을 규정했지만, 노동 운동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알폰소 13세의 즉위와 새로운 시대의 시작
1902년 5월 17일, 알폰소 13세는 16세 생일을 맞아 성년으로 선포되고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이로써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17년 섭정 시대는 종결되었다.
젊은 알폰소 13세는 열정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을 가졌으나,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다. 그는 군대에 특별한 애착을 가졌으며, 군사 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새 왕의 즉위는 스페인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복원 체제의 구조적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알폰소 13세 시대의 스페인은 진정한 민주주의로의 전환과 전통적 권위 사이에서의 갈등, 그리고 사회·경제적 근대화와 깊은 불평등 사이의 긴장이라는 도전에 직면했다.
결론: 19세기 중후반 스페인의 의미와 유산
19세기 중후반 스페인의 역사는 전통과 근대성 사이의, 그리고 안정과 변화 사이의 복잡한 균형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주요 특징과 역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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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실험과 불안정: 이사벨 2세의 불안정한 통치에서 제1공화정의 짧은 실험, 그리고 부르봉 왕조의 복원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은 다양한 정치 체제를 경험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정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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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의 정치적 역할: 프로눈시아미엔토(pronunciamiento, 군사 쿠데타)는 정치 변화의 주요 메커니즘이 되었다. 이는 민간 정치 기관의 약화와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 강화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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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서 민족국가로의 전환: 1898년 마지막 주요 식민지들의 상실은 스페인이 완전히 제국에서 민족국가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는 국가 정체성의 위기와 함께 새로운 스페인의 정의를 모색하는 과정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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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근대화의 불균등한 발전: 산업화와 경제 근대화는 제한적이었고, 지역적으로 불균등했다. 이는 카탈루냐, 바스크 같은 산업화된 지역과 나머지 농업 중심 지역 사이의 경제적·사회적 격차를 심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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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두: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에서는 독자적인 정체성과 자치에 대한 요구가 강화되었다. 이는 현대 스페인이 여전히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정치적 문제의 시작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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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제와 노동 운동의 성장: 산업화로 인한 도시 노동자 계층의 형성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같은 새로운 이념의 확산과 노동 운동의 성장을 가져왔다. 이러한 사회 변화는 전통적인 엘리트들에게 도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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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문화적 혁신: '98세대'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은 스페인의 정체성, 문제점, 그리고 미래 방향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했다. 이들의 문학적, 철학적 기여는 현대 스페인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19세기 중후반 스페인의 경험은 현대 스페인이 직면한 많은 문제들의 역사적 뿌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의 긴장, 중앙집권과 지역 자치 사이의 갈등, 전통과 근대화 사이의 균형 모색 등은 오늘날까지도 스페인 정치와 사회의 핵심 과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