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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역사 기본 16. 스페인 식민지의 독립(19세기 초)와 국내 불안정
19세기 초반 스페인은 국내 정치적 혼란과 함께 세계 최대 제국의 붕괴를 경험했다. 한때 지구 표면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스페인 제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게 되었고, 이는 스페인의 국제적 위상과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 시기 스페인은 절대왕정, 입헌군주제, 그리고 공화주의 세력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국내 정세도 매우 불안정했다.
스페인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 과정
독립의 배경과 원인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을 추구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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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 18세기 후반부터 크리오요(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후손) 엘리트들 사이에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이 확산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 아이티 혁명 등의 사례에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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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오요의 불만: 식민지 태생 백인들은 경제력과 교육 수준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사회적으로 차별받았다. 고위 행정직과 성직은 주로 스페인 본국에서 파견된 페닌술라레스(peninsulares, 이베리아 반도 출신자)가 독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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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르봉 개혁의 영향: 18세기 스페인의 부르봉 왕조가 추진한 중앙집권화와 효율적 통치를 위한 개혁은 식민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세금을 인상했다. 이는 식민지 엘리트들의 자율성을 제한하고 불만을 증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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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무역과 경제적 이해관계: 식민지들은 스페인과의 독점 무역 체제에서 벗어나 영국 등 다른 국가들과 직접 교역하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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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과 왕위 문제: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하고 페르난도 7세가 퇴위하면서 발생한 권력 공백은 식민지들이 자치를 주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제1단계: 자치 운동과 초기 봉기(1808-1814)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소식이 전해지자,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누가 통치의 정당성을 가지는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식민지의 엘리트들은 스페인 본국과 마찬가지로 자치 위원회(juntas)를 구성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페르난도 7세에 대한 충성을 표명하면서 자치를 요구했다.
1809년 차르카스(현 볼리비아), 키토(현 에콰도르), 라파스(현 볼리비아)에서 초기 봉기가 일어났지만 신속히 진압되었다. 그러나 1810년에는 카라카스(베네수엘라), 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 보고타(콜롬비아), 산티아고(칠레) 등에서 더 강력한 자치 위원회들이 구성되어 실질적인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이 시기 주요 사건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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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독립 선언(1811년 7월 5일):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Francisco de Miranda)와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의 주도로 베네수엘라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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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5월 혁명(1810년 5월 25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스페인 부왕을 몰아내고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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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이달고 봉기(1810년 9월 16일): 가톨릭 사제 미겔 이달고(Miguel Hidalgo)가 이끈 민중 봉기로, 스페인 통치에 반대하는 최초의 대규모 저항이었다.
그러나 이 초기 독립 운동들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다. 페르난도 7세가 1814년 복권한 후, 스페인은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하여 대부분의 반란을 진압했다. 볼리바르는 망명해야 했고, 이달고와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José María Morelos) 같은 멕시코 독립 지도자들은 처형되었다.
제2단계: 결정적 독립 전쟁(1816-1826)
1816년부터 새로운 독립 운동의 물결이 일어났다. 이 시기의 주요 지도자들은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이었다.
볼리바르의 북부 캠페인: 시몬 볼리바르는 '해방자'(El Libertador)로 알려진 베네수엘라 출신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1816년 아이티의 지원을 받아 베네수엘라로 돌아왔다. 볼리바르는 1819년 보야카 전투(Battle of Boyacá)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하고 콜롬비아(당시 뉴그라나다라고 불림)를 해방시켰다. 1821년 카라보보 전투(Battle of Carabobo)에서의 승리로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확보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에콰도르(1822), 페루(1824), 그리고 마지막으로 볼리비아(1825)를 해방시켰다.
볼리바르는 대콜롬비아(Gran Colombia)라는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를 통합한 국가를 수립했으며, 라틴아메리카 통합의 비전을 가졌다. 그러나 그의 죽음(1830) 이후, 이 통합 국가는 분열되었다.
산 마르틴의 남부 캠페인: 호세 데 산 마르틴은 스페인군 출신 장교로, 1812년에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독립군에 합류했다. 그는 '안데스 군대'(Ejército de los Andes)를 조직하여 1817년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로 진격했다. 차카부코 전투(Battle of Chacabuco)에서 승리한 후, 칠레의 독립을 이끈 베르나르도 오히긴스(Bernardo O'Higgins)와 협력하여 1818년 칠레의 완전한 독립을 달성했다.
이후 산 마르틴은 해군력을 이용하여 페루로 진격했고, 1821년 리마를 점령하여 페루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내륙 지역에는 여전히 강력한 스페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1822년 과야킬(Guayaquil)에서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이 회동했다. 이 역사적 만남 이후 산 마르틴은 페루에서 물러나 유럽으로 망명했고, 볼리바르가 페루 해방을 완수했다.
멕시코의 독립: 멕시코는 아이러니하게도 보수파 장교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의 주도로 독립했다. 그는 원래 왕당파였으나, 스페인에서 1820년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입장을 바꾸었다. 이투르비데는 1821년 '이괄라 계획'(Plan de Iguala)을 발표하고 전 반란군 지도자 비센테 게레로(Vicente Guerrero)와 연합하여 독립군을 조직했다.
1821년 8월 24일, 스페인 부왕은 코르도바 조약(Treaty of Córdoba)에 서명하여 멕시코의 독립을 인정했다. 이투르비데는 잠시 멕시코 황제(아구스틴 1세)로 즉위했지만, 1823년 공화주의자들의 반란으로 퇴위했다.
중앙아메리카의 독립: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등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은 1821년 멕시코의 독립에 영향을 받아 평화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처음에는 멕시코 제국에 합류했다가, 1823년 이투르비데 퇴위 후 중앙아메리카 연방(Federal Republic of Central America)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연방은 1838-1841년 사이에 현재의 개별 국가들로 분열되었다.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카리브해의 스페인 식민지인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는 이 시기에 독립하지 않았다. 이들은 '충성스러운 섬들'(Islas fieles)로 불리며 19세기 말까지 스페인의 통치 하에 남았다. 쿠바는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후 독립했고,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스페인의 대응과 실패 원인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 운동에 강력하게 대응했다. 페르난도 7세가 1814년 왕위에 복귀한 후, 그는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하여 식민지를 진압하려 했다. 파블로 모릴로(Pablo Morillo) 장군이 이끄는 약 10,000명의 군대가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로 파견되어 '평화 정착'(Pacificación)이라는 이름으로 잔혹한 진압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스페인의 대응은 결국 실패했으며, 그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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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제약: 대서양을 건너는 긴 보급로, 광대한 아메리카 대륙의 험난한 지형은 스페인군의 작전을 어렵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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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적 한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미 재정이 고갈된 스페인은 대규모 원정군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능력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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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지원: 독립군은 영국, 미국, 아이티 등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았다. 특히 영국은 무역 이익을 위해 남미 독립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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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정치적 불안정: 1820-1823년 자유주의 3년(Trienio Liberal) 동안 스페인 정부는 식민지 정책에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고, 해외 원정에 필요한 자원을 집중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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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엘리트의 단합: 초기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크리오요 엘리트들은 점차 독립이라는 공통 목표 아래 단합하게 되었다.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는 1824년 12월 9일 페루 아야쿠초(Ayacucho)에서 벌어졌다.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스페인 부왕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고, 이로써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의 지배는 사실상 종결되었다.
스페인은 오랫동안 전직 식민지들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멕시코의 독립은 1836년에야 인정되었고, 일부 남미 국가들의 독립은 1840-50년대에 인정되었다.
독립이 스페인에 미친 영향과 결과
경제적 영향
아메리카 식민지의 상실은 스페인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주요 영향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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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수입 감소: 식민지, 특히 멕시코와 페루의 광산에서 오는 세금과 로열티가 크게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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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패턴의 변화: 스페인과 아메리카 식민지 간의 독점 무역이 중단되었다. 카디스와 세비야 같은 항구 도시들이 특히 큰 타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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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유입 감소: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으로의 자본 송금이 중단되었고, 이는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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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기회 상실: 많은 스페인 상인과 기업가들이 식민지에 투자하던 기회를 잃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일부 역사학자들은 식민지 상실이 결과적으로 스페인 경제 근대화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스페인은 더 이상 식민지 부에 의존할 수 없게 되면서 국내 산업과 농업 발전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정치적·사회적 영향
식민지 상실은 스페인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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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위상 약화: 한때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던 스페인은 이차적 유럽 강국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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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의 정치 개입 증가: 아메리카에서 귀환한 군 장교들이 스페인 정치에 개입하는 비중이 커졌다. 이들은 반란과 쿠데타(pronunciamientos)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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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분열 심화: 식민지 상실에 대한 책임 공방이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간의 갈등을 더욱 악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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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정체성의 위기: 광대한 제국의 상실은 스페인 국민들에게 정체성의 위기를 가져왔다. "스페인다움"(Españolidad)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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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이주 패턴 변화: 식민지 상실 이후에도 스페인인들의 라틴아메리카 이주는 계속되었지만, 그 성격이 관리와 통치보다는 경제적 기회를 찾는 이민으로 변화했다.
문화적 영향
식민지 상실은 스페인 문화와 지적 생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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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문제'(problema de España):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스페인 지식인들은 제국의 몰락과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이는 '98세대'(Generación del 98) 등 중요한 문학·사상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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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패닉 문화권에 대한 관심: 식민지 상실 이후,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와의 문화적·언어적 유대를 강조하는 '히스패니시즘'(Hispanism)을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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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서술의 변화: 스페인의 역사가들은 제국의 역사를 재평가하고, 식민지 시대의 의미를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전반기 스페인의 정치적 불안정
페르난도 7세 시기의 혼란(1814-1833)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페르난도 7세의 통치는 '6년간의 절대주의'(1814-1820), '자유주의 3년'(1820-1823), '10년간의 치욕'(1823-1833)으로 구분된다. 이 시기는 절대왕정 지지자와 자유주의자 간의 첨예한 대립이 특징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1812년 카디스 헌법을 바탕으로 한 입헌군주제를 원했으나, 페르난도 7세는 전통적 절대왕정을 고수하려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쿠데타와 반란이 시도되었고, 정치적 탄압과 망명이 반복되었다.
페르난도 7세 말년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은 왕위 계승 문제였다. 그는 딸 이사벨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살리카 법(여성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법)을 폐지했다. 이에 페르난도의 동생 카를로스와 그 지지자들(카를리스타)이 강하게 반발했고, 이는 페르난도 사망 후 카를리스타 전쟁으로 이어졌다.
카를리스타 전쟁과 그 의미
1833년 페르난도 7세가 사망하자, 3살의 이사벨 2세가 어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섭정 하에 즉위했다. 그러나 페르난도의 동생 카를로스(카를로스 5세로 자칭)는 자신이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렇게 시작된 제1차 카를리스타 전쟁(1833-1840)은 단순한 왕위 다툼을 넘어, 두 개의 상반된 스페인 비전 사이의 충돌이었다.
카를리스타(Carlistas)는 전통, 절대왕정, 가톨릭 교회의 특권, 지방의 전통적 특권(푸에로스)을 지지했다. 그들은 주로 농촌 지역, 특히 바스크 지방, 나바라, 카탈루냐, 아라곤에서 지지를 받았다.
자유주의자(Liberales)는 이사벨 2세를 지지하며, 중앙집권적 국가, 입헌군주제, 자유 시장 경제, 교회 권력의 제한을 주장했다. 이들은 주로 도시 지역과 중앙부 스페인에서 강세를 보였다.
이 전쟁은 칠 년 동안 스페인 전역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카를리스타 군은 게릴라 전술에 능숙했지만, 정부군은 더 나은 장비와 국제적 지원(영국, 프랑스, 포르투갈로 구성된 '4국 동맹')을 받았다. 결국 1839년 베르가라 협약(Convention of Vergara)으로 제1차 카를리스타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카를리스타 운동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19세기에 두 차례 더 전쟁이 일어났고(1846-1849, 1872-1876), 카를리스타의 이념은 20세기 스페인 내전에서도 프랑코 진영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했다.
자유주의의 발전과 분열
카를리스타 전쟁 중과 그 이후, 이사벨 2세의 섭정 정부와 이후 그녀의 통치 하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자유주의 내부에서도 중요한 분열이 일어났다:
온건파(Moderados): 부유한 지주, 상인, 금융인들이 지지한 이 그룹은 제한된 참정권, 강한 행정부, 가톨릭 교회와의 화해를 주장했다. 그들은 1845년 새로운 보수적 헌법을 제정했다.
진보파(Progresistas): 중간 계급과 도시 장인들의 지지를 받은 이 그룹은 보다 광범위한 참정권, 국가 권력의 분산, 교회 권력의 제한을 주장했다. 발파르테로(Baldomero Espartero) 장군이 대표적 지도자였다.
민주파(Demócratas): 1840년대 후반에 등장한 가장 급진적인 분파로, 보통 선거권, 표현과 집회의 자유,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이 시기 스페인 정치는 이러한 분파 간의 권력 다툼, 군부 쿠데타, 그리고 도시 봉기의 반복으로 특징지어진다. 1834-1868년 사이에 무려 60여 개의 내각이 교체되었으며, 대부분 쿠데타(pronunciamiento)에 의한 것이었다.
경제적 변화와 근대화 시도
정치적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전반기 스페인에서는 중요한 경제적·사회적 변화가 시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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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권 분립 철폐(Desamortización): 멘디사발(Juan Álvarez Mendizábal), 마도스(Pascual Madoz) 등의 자유주의 장관들은 교회와 시 소유의 토지를 국유화하여 경매에 부쳤다. 이는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토지 시장을 자유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부유한 지주들이 대부분의 토지를 구매하여 토지 불평등이 더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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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의 시작: 카탈루냐에서는 면직물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아스투리아스와 바스크 지방에서는 석탄 채굴과 철강 산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산업화는 영국, 프랑스, 독일에 비해 느리고 제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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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건설: 1848년 바르셀로나-마타로 노선을 시작으로 철도망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1855년 철도법(Ley General de Ferrocarriles)은 철도 건설에 대한 외국 투자를 장려했고, 이로 인해 주로 프랑스와 영국 자본이 스페인 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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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개혁: 1857년 모야노 법(Ley Moyano)은 스페인 최초의 포괄적인 교육법으로, 초등 교육의 의무화와 중등·고등 교육의 체계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실제 시행은 제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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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시스템 발전: 스페인 은행(Banco de España)의 전신인 산 페르난도 은행(Banco de San Fernando)이 설립되었고, 지방 은행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근대화 시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여전히 농업 중심 사회였으며, 산업화와 도시화는 주로 카탈루냐, 마드리드, 바스크 지방 등 특정 지역에 국한되었다.
이사벨 2세의 성격과 통치 스타일
이사벨 2세(1833-1868)는 1843년 13세에 성년으로 선포되어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그녀는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정치적 판단력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인적으로 충동적이고 변덕스러웠으며,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다.
이사벨의 결혼은 중대한 정치적 사안이었다. 1846년 그녀는 자신의 사촌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와 정략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불행했고, 이사벨은 여러 연인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녀의 사생활 스캔들은 왕실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다.
통치 스타일에 있어, 이사벨은 주로 온건파에 의존했으며, 진보파에 대한 불신이 컸다. 그녀는 나르바에스(Ramón María Narváez), 오도넬(Leopoldo O'Donnell), 곤살레스 브라보(Luis González Bravo) 같은 강한 군 지도자들을 총리로 임명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사벨은 정당정치의 원칙보다는 개인적 친분과 충성도에 따라 총리를 교체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 발전과 부패 문제
이사벨 2세 시기의 스페인 정치는 크게 다음과 같은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온건파의 10년(Década Moderada, 1844-1854): 나르바에스 장군의 주도로 온건파가 권력을 장악했다. 1845년 온건파 헌법이 제정되어 참정권이 제한되고 중앙집권화가 강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상당한 정치적 안정이 있었지만, 동시에 부패와 족벌주의가 만연했다.
진보적 2년(Bienio Progresista, 1854-1856): 1854년 '비칼바로 봉기'(Vicalvarada)로 진보파가 잠시 정권을 잡았다. 이 기간 동안 발파르테로와 오도넬이 공동으로 정부를 이끌었고, 철도법과 삼권분립법 등 경제 개혁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내부 갈등으로 진보파 정부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자유연합(Unión Liberal, 1856-1863): 오도넬 장군이 이끄는 중도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이 시기에는 해외 원정(모로코 전쟁, 인도차이나 원정)을 통해 국민적 단합을 도모했고, 경제 발전에 집중했다.
마지막 위기(1863-1868): 오도넬 이후, 정치 상황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나르바에스와 곤살레스 브라보의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정책은 반발을 샀고, 경제 위기와 맞물려 정치적 불안정이 고조되었다.
이사벨 통치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만연한 부패였다. 특히 철도 사업권과 공공 계약 배분 과정에서 부패가 심각했다. 국가 채무가 증가했고, 이는 주로 비효율적인 재정 운영과 정부 관리들의 착복 때문이었다. 또한 선거 부정과 조작도 일상적이었으며, 이를 '선거 조작'(caciquismo)이라 불렸다.
경제적 위기와 사회적 변화
이사벨 2세 통치 후반기에 스페인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1864-1866년의 금융 위기는 철도 회사들의 파산과 은행 붕괴로 이어졌다. 1867-1868년에는 심각한 농업 위기도 발생했다. 가뭄으로 인한 흉작은 식량 가격 상승과 농촌 빈곤을 초래했다.
한편, 도시화와 초기 산업화는 새로운 사회계층과 사회 문제를 만들어냈다. 도시 노동자 계층이 형성되었고, 카탈루냐와 같은 산업화된 지역에서는 노동 운동이 시작되었다.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같은 급진적 이념이 스페인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사회적 불평등도 심화되었다. 삼권분립으로 인해 토지는 더 적은 수의 부유한 지주들에게 집중되었다. 농촌 지역에서는 지주와 소작농 간의 갈등이 증가했고, 도시에서는 상류층과 노동자 계층 간의 격차가 벌어졌다.
1868년 9월 혁명과 이사벨 2세의 축출
이러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위기 속에서, 1868년 9월 혁명(La Gloriosa 또는 Revolución de Septiembre)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해군 제독 후안 밥티스타 토페테(Juan Bautista Topete)가 카디스에서 시작한 쿠데타로, 프림(Juan Prim)과 세라노(Francisco Serrano) 장군이 합류했다.
혁명 세력은 "스페인의 명예를 짓밟은 부르봉 왕가에 죽음을!"(¡Abajo los Borbones!)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들은 이사벨의 부패한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적 개혁을 요구했다.
곧 마드리드를 포함한 주요 도시들에서 시민 반란이 일어났고, 이사벨 2세는 10월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는 부르봉 왕가의 일시적 종말이었고, 스페인은 새로운 정치 실험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이사벨 2세 실각 이후의 정치 실험(1868-1874)
임시 정부와 1869년 헌법
이사벨 2세가 축출된 후, 세라노 장군이 이끄는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정부는 보통 남성 참정권에 기초한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1869년 제정된 헌법은 스페인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헌법 중 하나였다. 이 헌법은 주권재민, 권력분립, 개인의 권리와 자유(종교의 자유 포함)를 보장했다. 그러나 정부 형태는 여전히 입헌군주제로 유지되었다.
이 시기에는 민주적 자유가 확대되었고, 다양한 정치적 의견이 공개적으로 표출되었다. 노동조합의 합법화, 교육 개혁, 지방 자치 확대 등의 진보적 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 임시 정부는 곧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카를리스타들이 북부에서 제3차 카를리스타 전쟁(1872-1876)을 일으켰고, 쿠바에서는 독립 전쟁(십년 전쟁, 1868-1878)이 시작되었다.
사보이 왕조: 아마데오 1세(1870-1873)
새 헌법에 따라 스페인은 새로운 왕을 찾아야 했다. 다양한 후보들이 검토된 끝에, 이탈리아 사보이 가문의 아마데오(Amadeo of Savoy)가 선정되었다. 이 선택은 주로 프림 장군의 영향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아마데오의 통치는 처음부터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가 마드리드에 도착하기 전에 그의 주요 지지자였던 프림 장군이 암살당했다. 스페인 귀족들은 외국인 왕을 경멸했고, 보수파는 그가 너무 자유주의적이라고 비판했으며, 진보파는 그가 충분히 진보적이지 않다고 불만을 표했다.
아마데오는 스페인어에 능숙하지 않았고, 복잡한 스페인 정치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짧은 통치 기간(1870-1873) 동안 6개의 내각과 3번의 총선이 있었으며,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아마데오는 1873년 2월 11일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고 사임했다. 그의 마지막 말로 알려진 "이 스페인 사람들은 통치할 수 없다"(Estos españoles son ingobernables)는 당시 스페인의 정치적 혼란을 잘 보여준다.
제1공화정(1873-1874)의 수립과 실패
아마데오의 사임 직후, 의회는 스페인을 공화국으로 선언했다. 이렇게 시작된 제1공화정(Primera República)은 스페인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실험이었다.
초대 대통령 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Estanislao Figueras)는 "저는 더 이상 공화주의자가 아닙니다. 저는 무정부주의자입니다!"(Ya no soy republicano, ¡soy anarquista!)라고 말했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공화정은 짧은 기간 동안 4명의 대통령(피게라스, 프란시스코 피 이 마르갈, 니콜라스 살메론, 에밀리오 카스텔라르)이 교체되었다.
공화파 내부에서는 연방주의자와 중앙집권주의자 간의 갈등이 심했다. 특히 피 이 마르갈(Francisco Pi y Margall)이 이끈 연방주의자들은 스페인을 여러 자치 지역의 연방으로 재구성하기를 원했다.
1873년 여름, 이 내부 갈등은 칸톤 반란(Rebelión cantonal)으로 이어졌다. 카르타헤나를 비롯한 여러 도시와 지역에서 독립적인 '칸톤'(자치 지역)을 선언하는 급진적 연방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중앙 정부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동시에 공화정은 북부의 카를리스타 반란과 쿠바의 독립 전쟁에도 대처해야 했다. 경제 상황도 악화되었고, 공화국은 국제적 인정을 받지 못했다.
결국 1874년 1월 3일, 마누엘 파비아(Manuel Pavía) 장군의 쿠데타로 공화정은 종말을 맞았다. 이어서 12월 29일, 마르티네스 캄포스(Martínez Campos) 장군은 사군토에서 이사벨 2세의 아들 알폰소를 왕으로 선포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부르봉 왕조가 복원되었다.
결론: 19세기 전반 스페인의 의미와 유산
19세기 전반부 스페인은 제국에서 민족국가로의 고통스러운 전환을 경험했다. 아메리카 식민지의 상실은 스페인의 국제적 위상과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스페인이 자국의 내부 문제와 근대화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전통적 절대왕정과 자유주의 세력 간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이 갈등은 카를리스타 전쟁, 군사 쿠데타, 헌법 실험, 그리고 마침내 제1공화정의 수립과 실패로 이어졌다. 이 시기 스페인의 정치적 불안정은 장기적으로 군부의 정치 개입 전통과 정당정치의 약화를 초래했다.
경제적으로는 근대화와 산업화의 시도가 있었지만, 그 성과는 불균등했다. 철도 건설, 은행 시스템 발전, 일부 지역의 산업화 등 진전이 있었으나, 스페인은 여전히 유럽의 주요 산업국들에 비해 뒤처져 있었다. 또한 토지 개혁(삼권분립)은 오히려 농촌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계층과 이념의 등장이 두드러졌다. 산업 노동자 계층이 형성되었고,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같은 새로운 이념이 스페인에 유입되었다.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문맹률이 감소했으며, 신문과 같은 대중 매체가 발전했다.
이 시기는, 결국 스페인이 근대 국민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의 일부였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스페인은 과거의 제국적 영광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해야 했고, 전통과 근대화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이어지는, 보다 안정적인 입헌군주제의 수립, 그리고 또 다른 정치적 혼란과 내전의 씨앗이 모두 이 시기에 뿌려졌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