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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역사 기본 15. 나폴레옹 침공(1808)과 스페인 독립 전쟁
19세기 초반 스페인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와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 야망으로 인해 격변의 시기를 맞이했다. 1808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시작된 스페인 독립 전쟁(Guerra de la Independencia)은 단순한 국제 분쟁을 넘어 스페인 사회와 정치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이 시기에 스페인 국민들은 외세에 맞서 저항하면서도, 동시에 자유주의적 정치 개혁의 기회를 모색했다.
나폴레옹 침공의 배경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
18세기 말 스페인은 카를로스 4세(1788-1808)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는 아버지 카를로스 3세와 달리 통치 능력이 부족했고, 실제 권력은 왕비 마리아 루이사와 그녀의 총애를 받던 마누엘 고도이(Manuel Godoy)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고도이는 1792년 스페인의 수상(Primer Ministro)이 되어 큰 권력을 행사했다.
프랑스 혁명(1789) 발발 초기에 스페인은 보수적 가톨릭 국가로서 혁명에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부르봉 왕 루이 16세가 처형된 후 벌어진 전쟁(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은 1795년 바젤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화해했다. 이후 고도이는 정책을 급선회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영국에 대항하는 노선을 택했다.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 대패한 스페인은 해군력을 크게 상실했다. 해상 무역이 차단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고, 고도이의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포르투갈 침공과 프랑스군의 스페인 주둔
나폴레옹은 영국에 대한 '대륙 봉쇄령'(Continental System)을 실시하면서 영국과 무역을 계속하던 포르투갈을 압박했다. 1807년 10월,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퐁텐블로 조약(Treaty of Fontainebleau)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랑스군이 포르투갈을 침공하기 위해 스페인 영토를 통과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침공 후 포르투갈은 분할되어 일부가 고도이에게 주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는 스페인을 장악하기 위한 나폴레옹의 술책이었다. 프랑스군은 포르투갈 침공을 명목으로 스페인에 진입했지만, 곧 주요 도시와 요새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1808년 2월에는 바르셀로나와 팜플로나가 함락되었고, 3월에는 상 세바스티안과 피게라스가 점령되었다.
아랑후에스 봉기와 왕위 교체
나라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왕세자 페르난도 지지자들과 고도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1808년 3월 17일 아랑후에스 왕궁에서 봉기했다. 이 봉기로 고도이는 체포되었고, 카를로스 4세는 3월 19일 아들 페르난도에게 왕위를 양위했다. 페르난도 7세의 즉위는 마드리드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러한 상황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프랑스 바이용(Bayonne)으로 소환하여 협상을 제안했다. 부자는 각각 나폴레옹의 승인과 지지를 얻기 위해 바이용으로 갔지만, 이는 함정이었다. 나폴레옹은 두 사람에게 왕위 포기를 강요했고, 결국 5월 초 스페인 부르봉 왕가는 나폴레옹에게 왕권을 양도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를 새로운 스페인 국왕(호세 1세)으로 임명했다.
5월 2일 봉기와 독립 전쟁의 시작
마드리드의 5월 2일 봉기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시민들은 왕실의 마지막 구성원인 어린 왕자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Francisco de Paula)가 프랑스로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고 자발적으로 봉기했다. 칼, 돌, 부엌 도구 등으로 무장한 시민들이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프랑스군 사령관 뮈라(Joachim Murat)는 이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수백 명의 스페인 시민들이 체포되어 5월 3일 새벽 총살당했다. 이 비극적 사건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의 유명한 두 그림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드리드 봉기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스페인 각지에서 프랑스군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5월 말까지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 발렌시아, 세비야 등 여러 지역에서 자치 위원회(juntas)가 조직되어 프랑스에 대한 저항을 선언했다.
독립 전쟁의 전개
스페인 독립 전쟁은 크게 세 가지 형태의 전투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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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전: 스페인 정규군과 나중에 도착한 영국군(웰링턴 경의 지휘 하에)이 프랑스군과 벌인 전통적인 전장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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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전: 스페인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게릴라 부대들이 프랑스 보급로를 차단하고 소규모 부대를 공격하는 비정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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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포위전: 사라고사(Zaragoza)와 헤로나(Gerona) 같은 도시들의 장기간에 걸친 항전과 포위 전투
전쟁 초기에 스페인군은 베일렌(Bailén) 전투(1808년 7월)에서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어 프랑스군 18,000명을 항복시켰다. 이는 나폴레옹 군대가 야전에서 당한 첫 번째 주요 패배였다. 이 승리로 호세 1세는 마드리드에서 철수해야 했고, 유럽 전역에 나폴레옹이 패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직접 2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페인에 입성하여 상황을 역전시켰다. 1808년 11월부터 1809년 초까지 프랑스군은 일련의 승리를 거두었고, 마드리드를 재점령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주요 도시와 도로만 통제할 수 있었을 뿐, 농촌 지역은 게릴라 세력의 영향 아래 있었다.
게릴라 전쟁의 특성과 의미
스페인 독립 전쟁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광범위한 게릴라 활동이었다. '작은 전쟁'을 의미하는 '게릴라'(guerrilla)라는 용어 자체가 이 시기 스페인 저항운동에서 유래했다.
게릴라 부대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정규군 장교, 지역 부호, 농민, 성직자 등이 지도자로 활동했다. 대표적인 게릴라 지도자로는 후안 마르틴 디에스 '엘 엠페시나도'(Juan Martín Díez "El Empecinado"), 프란시스코 에스포스 이 미나(Francisco Espoz y Mina), 훌리안 산체스 '엘 차로'(Julián Sánchez "El Charro") 등이 있었다.
게릴라들은 지형과 지역 주민들의 지원을 활용해 프랑스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소규모 부대를 공격한 후 신속히 퇴각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프랑스군은 넓은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고, 이는 주요 전투에서의 전력 약화로 이어졌다.
게릴라 전쟁은 군사적으로 효과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 국민 정체성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전까지 지역적 정체성이 강했던 스페인에서, 외세에 대한 공동 저항은 국가적 연대감을 강화했다.
영국의 개입과 웰링턴의 캠페인
스페인의 저항이 시작되자 영국은 이를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중요한 기회로 보고 적극 지원했다. 1808년 8월, 아서 웰즐리(후의 웰링턴 공작)가 이끄는 영국 원정군이 포르투갈에 상륙했다.
초기에 영국군은 소규모 전투 후 철수해야 했지만, 1809년 웰링턴이 재파견되어 포르투갈을 기반으로 한 체계적인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군보다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방어적인 전술과 스페인 게릴라의 지원, 그리고 '토레스 베드라스 선'(Lines of Torres Vedras)과 같은 요새화된 방어선을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1812년 웰링턴은 살라망카(Salamanca)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마드리드를 일시적으로 해방시켰다. 1813년 6월 비토리아(Vitoria)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그들을 스페인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1814년 초, 영국-스페인 연합군은 프랑스 남부로 진격했고, 이는 나폴레옹의 최종 패배와 퇴위에 기여했다.
카디스 의회와 1812년 헌법
지방 자치 위원회와 중앙 대표 자치 위원회
프랑스 점령에 대응하여 스페인 각 지역에서는 자치 위원회(juntas)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다. 이 위원회들은 프랑스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고, 점령되지 않은 지역의 통치를 담당했다.
지역별로 분산된 노력을 조율하기 위해 1808년 9월 세비야에서 중앙 대표 자치 위원회(Junta Suprema Central)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페르난도 7세의 이름으로 통치하며 전쟁 수행과 외교를 담당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계속된 진격으로 중앙 위원회는 안달루시아로, 다시 카디스로 후퇴해야 했다. 1810년 1월, 위원회는 권한을 5인으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Consejo de Regencia)에 이양하고 해산했다.
카디스 의회(Cortes de Cádiz)의 소집
섭정 위원회는 1810년 9월 24일 카디스에서 의회(Cortes Generales)를 소집했다. 프랑스군에 점령되지 않은 유일한 주요 항구 도시였던 카디스는 자유주의 사상이 발달한 상업 중심지였다.
카디스 의회는 전통적인 신분제 의회가 아닌 근대적 의미의 국민 대표 기구로 구성되었다. 의원들은 무작위 선발과 함께 다양한 지역과 해외 식민지에서 선출되었다. 직접 선거가 불가능한 점령 지역에서는 카디스에 거주하는 그 지역 출신 인사들이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의회 내에는 크게 세 정치 세력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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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Liberales):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받은, 근본적인 정치·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세력. 아구스틴 아르구엘레스(Agustín Argüelles), 디에고 무뇨스 토레로(Diego Muñoz Torrero) 등이 대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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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주의자(Absolutistas): 전통적인 절대왕정과 구체제를 지지하는 보수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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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파(Jovellanistas): 가스파르 멜초르 데 호베야노스의 사상을 따르는 온건 개혁파로,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선호했다.
1812년 헌법(La Pepa)의 제정과 내용
수많은 토론과 논쟁 끝에 카디스 의회는 1812년 3월 19일(성 요셉의 날, 스페인어로 'Pepe') 새 헌법을 공포했다. 이 헌법은 발표 날짜로 인해 '라 페파'(La Pepa)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1812년 헌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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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주권: 주권은 국왕이 아닌 스페인 국민에게 있음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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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권 분립: 입법, 행정, 사법권의 분립을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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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적 군주제: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의회(Cortes)의 권한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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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남성 참정권: 재산이나 문맹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성인 남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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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권리 보장: 출판의 자유, 재산권 보호, 법 앞의 평등 등 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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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 국가: 지방의 특권(푸에로스)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적 국가 구조를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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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국교: 가톨릭을 국가의 유일한 종교로 인정하고 다른 종교의 공적 실천을 금지했다(자유주의자들이 보수 세력에게 양보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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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영토 통합: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스페인 식민지를 본국의 일부로 인정하고, 그 주민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이 헌법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헌법 중 하나로,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았지만 스페인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반영했다. 특히 식민지 주민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 점은 혁신적이었다.
카디스 의회의 개혁 법안들
헌법 외에도 카디스 의회는 스페인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목표로 하는 여러 법안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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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제 폐지: 영주권(señoríos)과 봉건적 의무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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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재판소 폐지: 수세기 동안 스페인에서 종교적 순수성을 감시하던 종교 재판소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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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개혁: 교회와 귀족의 방대한 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공유지(bienes comunales)의 일부를 사유화하는 개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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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 제도 폐지: 경제적 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직업 길드의 특권이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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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 개혁: 복잡한 구체제의 세금 체계를 단순화하고 형평성을 높이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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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개혁: 공교육의 확대와 교육 과정의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이러한 개혁안들은 스페인을 봉건 사회에서 자유주의적 근대 국가로 전환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많은 경우 실제 시행은 제한적이었고, 전쟁 상황과 보수 세력의 저항으로 인해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전쟁의 종결과 페르난도 7세의 복귀
나폴레옹의 패배와 발렌세이 조약
1813년 중반, 유럽 연합군이 라이프치히 전투(국가들의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기면서 유럽의 세력 균형이 바뀌었다. 스페인에서도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이 비토리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스군을 스페인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1813년 12월 발렌세이 조약(Treaty of Valençay)을 통해 페르난도 7세를 스페인의 정당한 국왕으로 인정하고 그를 석방했다. 이는 스페인을 연합국 진영에서 분리시키고, 영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적 결정이었다.
두 개의 스페인: 자유주의자와 절대주의자
페르난도 7세가 1814년 3월 스페인에 돌아왔을 때, 국가는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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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들(Liberales): 1812년 헌법을 지지하고, 국왕의 권한이 제한된 입헌군주제를 원했다. 주로 도시 중산층, 일부 지식인과 군 장교들이 이 진영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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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주의자들(Absolutistas 또는 Serviles): 전통적인 절대왕정의 복원을 원했다. 귀족, 대부분의 성직자, 일부 농민층이 이 진영을 지지했다.
페르난도 7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1812년 헌법을 수용하여 입헌군주가 되거나, 절대왕정을 복원하는 것. 그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페르난도 7세의 쿠데타와 절대왕정 복원
마드리드로 향하는 길에서 페르난도 7세는 군 장교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69명의 절대주의 성향 의원들이 서명한 '페르사의 증서'(Manifiesto de los Persas)를 받았다. 이 문서는 1812년 헌법의 폐지와 절대왕정 복원을 요구했다.
1814년 5월 4일, 페르난도 7세는 발렌시아에서 칙령을 발표해 1812년 헌법과 카디스 의회의 모든 법령을 무효화했다. 그는 헌법을 "내 왕권과 내 백성의 권리에 대한 침해"라고 비난했다.
이어서 마드리드에 입성한 페르난도 7세는 자유주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의회를 해산하며, 종교 재판소를 복원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투옥되거나 망명해야 했다. 이로써 스페인은 6년간의 혁신적인 실험 이후 다시 구체제로 돌아갔다.
독립 전쟁의 유산
스페인 독립 전쟁과 그 정치적 여파는 19세기 스페인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시기의 유산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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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정체성의 형성: 외세에 대한 저항을 통해 지역적 정체성을 넘어선 스페인 국민으로서의 의식이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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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 분열의 시작: 자유주의자와 절대주의자 사이의 분열은 이후 한 세기 이상 스페인 정치를 특징짓는 좌우 대립의 시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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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의 정치적 역할 증대: 전쟁 중 군 장교들의 위상이 높아졌고, 이들은 이후 잦은 쿠데타(pronunciamientos)를 통해 정치에 개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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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식민지 독립 촉진: 스페인 본국의 혼란은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독립을 추구할 기회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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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헌법의 상징성: 비록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1812년 헌법은 스페인 자유주의의 상징이 되어 이후 여러 차례 복원 시도가 이루어졌다.
1812년 헌법의 역사적 의미
스페인 자유주의의 기원
1812년 카디스 헌법은 스페인 자유주의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이 헌법은 주권재민, 권력분립, 법 앞의 평등 등 자유주의의 핵심 원칙을 스페인에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도입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헌법이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았지만, 단순한 모방이 아닌 스페인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에 맞게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톨릭을 국교로 유지한 것은 스페인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타협이었다.
또한 이 헌법은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자유주의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포르투갈, 피에몬테, 나폴리, 그리스의 헌법들이 카디스 헌법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특히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초기 헌법 제정에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6년간의 절대주의(1814-1820)
페르난도 7세가 복권한 후 이어진 6년간의 통치는 '6년간의 절대주의'(Sexenio Absolutista)로 불린다. 이 시기 페르난도 7세는 18세기의 계몽 전제주의와 달리, 정치적 억압과 반동을 특징으로 하는 진정한 의미의 절대주의를 실행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투옥되거나 망명했고, 카디스 의회의 개혁은 모두 철회되었다. 종교 재판소와 예수회가 복원되었으며, 검열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7세는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산적한 국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스페인은 독립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황폐화되었다. 농업 생산은 감소했고, 상업은 침체되었으며, 국가 재정은 파탄 상태였다. 미국 식민지에서는 독립 운동이 확산되어 식민지 무역에서 오는 수입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마르틴 데 가라이(Martín de Garay) 재무장관은 1817년 세제 개혁을 시도했으나, 귀족과 성직자 계층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페르난도 7세는 점차 무능하고 변덕스러운 통치자로 인식되었으며, 군부 내에서도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 시기에 자유주의자들은 비밀결사와 프리메이슨 조직을 통해 저항을 준비했다. 특히 군 장교들 사이에서 자유주의 사상이 퍼져나갔는데, 이는 나중에 군부 쿠데타의 기반이 되었다.
1820년 리에고의 봉기와 자유주의 3년(1820-1823)
1820년 1월 1일, 라파엘 델 리에고(Rafael del Riego) 대령은 안달루시아의 카베사스 데 산 후안(Cabezas de San Juan)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로 파병될 예정이던 원정군을 이끌고 1812년 헌법의 복원을 요구했다.
초기에 리에고의 봉기는 큰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점차 코루냐, 사라고사, 바르셀로나 등 주요 도시에서 유사한 봉기가 일어났다. 마드리드에서도 시민들의 시위가 발생했고, 궁지에 몰린 페르난도 7세는 3월 7일 헌법을 수용하겠다고 선언했다. 3월 9일, 그는 "헌법의 길을 가자"(Marchemos francamente, y yo el primero, por la senda constitucional)라는 유명한 선언을 했다.
이렇게 시작된 '자유주의 3년'(Trienio Liberal, 1820-1823) 동안 1812년 헌법이 복원되었고, 자유주의적 개혁이 다시 추진되었다. 주요 개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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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권과 마요라스고(mayorazgo, 장자 상속제) 폐지: 봉건적 토지 소유 관계의 해체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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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개혁: 종교 재판소가 다시 폐지되었고, 수도원의 수가 제한되었으며, 교회 십일조가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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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자유화: 길드 제한이 완화되고, 관세가 개혁되었으며, 국내 무역 장벽이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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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개혁: 신설된 지방(provincias) 체계가 도입되어 오늘날 스페인 행정 구역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부는 곧 내부 분열에 직면했다. 온건파(moderados)와 급진파(exaltados)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는 효과적인 통치를 어렵게 만들었다. 페르난도 7세는 겉으로는 헌법을 수용했지만, 비밀리에 외국 세력에 도움을 요청하며 절대왕정 복원을 모색했다.
백인 테러와 프랑스의 개입
자유주의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신앙과 왕을 위한 군대'(Ejército de la Fe)라는 게릴라 조직을 결성하여 무장 저항을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카탈루냐, 나바라, 바스크 지방의 농촌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프랑스 국경 근처 세우 데 우르헬(Seo de Urgel)에 '섭정 위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한편 유럽의 강대국들은 스페인의 자유주의 체제를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1822년 베로나 회의에서 신성동맹(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과 프랑스는 스페인에 개입하여 절대왕정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1823년 4월, 10만 명의 프랑스군(일명 '성 루이의 10만 아들들', Cien Mil Hijos de San Luis)이 앙굴렘 공작의 지휘 하에 스페인에 침입했다. 프랑스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마드리드를 점령했고, 자유주의 정부와 페르난도 7세는 남쪽 카디스로 철수했다.
카디스에서 마지막 저항이 이루어졌지만, 8월 31일 트로카데로(Trocadero)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유주의 정부는 무너졌다. 10월 1일, 페르난도 7세는 절대 권력을 회복하고 1820-1823년의 모든 자유주의 법령을 무효화했다.
이어진 '백인 테러'(Terror Blanco) 시기에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루어졌다. 리에고는 체포되어 마드리드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수천 명의 자유주의자들이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 많은 이들이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으로 망명해야 했다.
'10년간의 치욕'과 왕위 계승 문제
1823년부터 페르난도 7세가 사망한 1833년까지의 기간은 '10년간의 치욕'(Década Ominosa)으로 불린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 탄압이 지속되었지만, 점차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일부 온건한 개혁도 시도되었다.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졌고, 스페인 내에는 프랑스군이 주둔했다(1828년까지). 페르난도 7세는 급진적인 절대주의자들(일명 '순수주의자들', apostólicos)의 압력에 시달렸다. 이들은 더욱 보수적인 정책을 요구했고, 왕의 동생 카를로스(Don Carlos)를 지지했다.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루이스 로페스 바예스테로스(Luis López Ballesteros)와 같은 온건 개혁 성향의 장관들이 기용되었다. 그들은 은행 설립, 증권 거래소 개설, 상업법 개혁 등을 통해 경제를 현대화하려 했다.
이 시기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왕위 계승이었다. 페르난도 7세에게는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다. 1829년, 그는 넷째 부인인 나폴리의 마리아 크리스티나(María Cristina)와 결혼했고, 1830년에 딸 이사벨(후의 이사벨 2세)이 태어났다.
전통적으로 스페인은 1713년에 도입된 살리카 법(Ley Sálica)에 따라 여성의 왕위 계승을 제한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7세는 1789년에 카를로스 4세가 비준했으나 공표하지 않았던 '국사에 관한 법령'(Pragmática Sanción)을 1830년에 공표하여 여성의 왕위 계승을 허용했다.
이는 동생 카를로스와 그의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카를로스는 전통적인 절대주의와 구체제를 상징했으며, 많은 보수 세력이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7세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함께 점차 온건 자유주의자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이는 페르난도 7세 사망 후 벌어질 카를리스트 전쟁의 전조였다.
독립 전쟁의 문화적·사회적 영향
고야의 그림과 시대상 반영
독립 전쟁은 스페인의 예술과 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의 작품이다. 고야는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담아낸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 등의 그림을 통해 전쟁의 잔혹성과, 민중의 저항, 그리고 프랑스군의 만행을 고발했다.
또한 그의 판화 연작 "전쟁의 참화"(Los desastres de la guerra)는 일반 시민들이 겪은 전쟁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들은 단순한 전쟁 기록을 넘어, 인간 폭력성에 대한 보편적 비판으로 평가받는다.
고야는 말년에 제작한 '검은 그림'(Pinturas negras) 시리즈에서는 전쟁과 정치적 혼란을 겪은 후의 비관적 세계관을 표현했다. 그는 결국 페르난도 7세의 절대주의 체제에서 자유롭게 작업할 수 없게 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민중 문화와 국민 의식의 발전
독립 전쟁은 스페인 국민 의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특정 지역(카스티야인, 카탈루냐인 등)이나 왕의 신민으로 인식했지만, 외세에 대한 공동 저항을 통해 스페인 국민으로서의 공통된 정체성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민중 문화와 애국적 상징들이 크게 발전했다. 프랑스인에 대한 풍자 소설, 애국적 시, 민요 등이 널리 퍼졌고, "게릴라", "자유주의자", "절대주의자"와 같은 새로운 정치적 용어들이 일상 어휘로 자리잡았다.
또한 투우(corrida de toros)와 같은 전통 문화가 국가적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프랑스식 문화에 반대하는 움직임으로, 스페인 고유의 전통이 강조되었고, 이는 나중에 '에스파뇰라다'(españolada, 스페인 고유 문화의 과장된 표현)로 발전했다.
정치적 분열의 심화
독립 전쟁과 그 여파로 인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영향 중 하나는 스페인 사회의 정치적 분열이 심화된 것이다. 이 분열은 19세기 내내, 그리고 많은 면에서 20세기까지도 스페인 정치의 특징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와 절대주의자(후에 보수주의자)의 대립이 분명해졌다. 자유주의자들은 더 나아가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었고, 보수파도 순수주의자(극보수)와 개혁적 보수파로 분화했다.
이러한 분열은 단순한 정치적 견해 차이를 넘어, 종교, 사회 구조, 경제 모델, 교육 등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세계관의 차이로 발전했다. 이는 다음 세기 스페인의 반복적인 내전과 정치적 불안정의 씨앗이 되었다.
결론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독립 전쟁은 단순히 외국 점령에 맞선 투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스페인의 근대 국가로의 전환점이자, 이후 두 세기에 걸친 정치적 갈등의 원점이 되었다.
1812년 카디스 헌법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와 남유럽 여러 국가의 자유주의 헌법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비록 페르난도 7세의 복권과 함께 헌법은 폐지되었지만, 그 이상과 원칙은 이후 스페인 자유주의의 지속적인 전거가 되었다.
독립 전쟁은 또한 민중의 역할이 중요해진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었다. 게릴라 전술은 이후 많은 민족 해방 운동에 영향을 미쳤고, 군부의 정치적 역할 증대는 19세기와 20세기 스페인 정치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페르난도 7세의 복권과 절대주의 복원은 스페인이 근대화와 자유화의 기회를 놓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시기의 갈등과 투쟁은 스페인 국민의 정치 의식을 높이고, 시민사회의 발전을 촉진했다.
결국 나폴레옹 침공과 독립 전쟁은 스페인이 구체제에서 근대 국민국가로 전환하는 복잡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과정의 시작이었다. 이 과정은 왕정 복고와 자유주의 혁명의 교대, 내전, 공화정 실험 등을 거치며 20세기까지 계속되었다. 15회차에서 살펴본 이 시기는 현대 스페인의 정치적, 사회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역사적 맥락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