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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사 기본 15. 나폴레옹 시대(1799-1815)
총재정부의 위기와 브뤼메르 쿠데타
1795년에 설립된 총재정부는 출범부터 심각한 불안정성을 보인다. 정치적 정당성 문제, 권력 구조의 약점, 만성적 경제 위기, 사회적 분열 등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었다. 총재정부는 4년 동안 지속적인 정치적 불안정을 경험하며 네 번의 쿠데타(1797년 9월, 1798년 5월, 1799년 6월, 1799년 11월)를 겪는다. 선거 결과가 집권 세력에게 불리할 때마다 무효화되는 패턴은 민주적 절차에 대한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탈리아 전역과 이집트 원정을 통해 군사적 명성을 쌓고 혁명 수호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1799년 11월 9-10일(혁명력으로 브뤼메르 18-19일), 나폴레옹은 시에예스, 탈레랑, 푸셰 등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킨다. 외부 위협을 과장하고 의회를 생클루로 이전시킨 후 최종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500인회를 해산시키고 임시 집행위원회(3인 통령)를 구성한다.
브뤼메르 쿠데타는 폭력이 제한적이었고 광범위한 엘리트 지지를 받았다는 특징이 있다. 대중의 반응은 대체로 무관심했으며, 혁명의 피로감과 안정에 대한 갈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통령정부와 나폴레옹의 권력 강화
쿠데타 이후 나폴레옹은 새로운 정치 체제를 신속히 구축한다. 1799년 12월 13일 공포된 새 헌법은 제1통령(10년 임기, 나폴레옹)과 2명의 부통령으로 구성된 강력한 행정부와 삼원제(원로원, 입법원, 호민원) 입법 구조를 갖춘다. 시에예스의 원래 구상과 달리 나폴레옹은 제1통령에게 실질적 권력을 집중시킨다. 1800년 2월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공식적으로는 압도적 찬성으로 승인된다.
통령정부는 형식적으로는 공화제를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나폴레옹에게 권력이 집중된 체제였다. 이는 프랑스인들의 질서와 안정에 대한 갈망을 반영하면서도, 혁명의 주요 성과를 보존하려는 시도였다.
나폴레옹은 효율적이고 중앙집권적인 행정 체계를 구축한다. 도지사(préfet) 제도 도입, 프랑스 은행 설립(1800), 공로와 능력에 기초한 관료제 발전, 경찰과 정보 체계 강화 등의 개혁을 추진한다. 이런 행정 개혁은 프랑스에 강력하고 효율적인 중앙집권 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
나폴레옹 법전과 법적 개혁
나폴레옹의 가장 지속적인 유산 중 하나는 법적 체계의 통합과 체계화였다. 민법전(1804), 형법전(1810), 상법전(1807), 형사소송법전(1808) 등을 통해 법체계를 정비한다. 특히 민법전은 혁명의 법적 원칙과 전통적 관습법을 결합하여 재산권을 강력히 보호하고 모든 시민 앞에 평등한 단일 법체계를 확립했다.
나폴레옹 법전은 혁명의 법적 성과를 체계화하면서도 사회 질서와 안정을 강화했다. 나폴레옹 본인도 법전을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겼으며, 이는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과 세계 여러 나라의 법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종교 정책에서는 혁명 동안 악화된 교회-국가 관계를 실용적으로 해결한다. 1801년 교황 비오 7세와 콩코르다를 체결하여 가톨릭교를 "대다수 프랑스인의 종교"로 인정하고 선서 거부 성직자들의 복귀를 허용한다. 동시에 유기조항(1802)을 통해 국가의 교회 통제를 강화하고 종교적 관용 정책을 유지한다.
제1제국의 수립과 나폴레옹의 통치
나폴레옹의 권력 강화는 결국 제국 수립으로 이어진다. 1802년 종신 통령으로 선출된 후, 1804년 5월 원로원의 추천과 국민투표 승인을 거쳐 같은 해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한다. 이 의식에서 나폴레옹은 교황이 가져온 왕관을 직접 자신의 머리에 씀으로써 자신의 권위가 신이 아닌 자신에게서 비롯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제국 체제는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 공적과 능력 기반의 새로운 귀족제도, 황실 의례와 궁정 문화 등을 특징으로 한다. 동시에 혁명의 일부 원칙인 법적 평등, 능력주의, 세속주의를 유지한다. 나폴레옹은 로마 제국의 상징을 차용하고 공식 예술과 건축을 통해 제국 이미지를 구축한다.
제1제국은 세습적 황제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주요 사회적, 법적 성과를 유지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을 "혁명의 종결자이자 성과의 보존자"로 자처하며 혁명과 구체제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한다.
사회적으로는 1808년 제국 귀족제도를 창설하고 능력과 공적에 기초한 새로운 작위를 수여한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1802)을 제정하여 군인과 민간인 모두에게 공적을 인정하는 "명예의 체계"를 만든다. "능력 있는 자에게 길을" 원칙에 따라 군사, 행정, 교육 분야에서 사회적 이동성을 확대한다.
대외 팽창과 나폴레옹 전쟁
나폴레옹은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프랑스의 영토를 확장한다. 트라팔가르 해전(1805)에서 영국 해군에 패배했지만,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대파한다. 이후 프로이센(1806), 스페인(1808) 등을 차례로 정복하며 유럽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다.
1806년에는 대륙봉쇄령을 선포하여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시키고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유럽 대륙의 경제에 타격을 주고 여러 국가의 반발을 사게 된다.
러시아 원정과 몰락
1812년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어긴 러시아를 공격하기 위해 60만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난다. 모스크바까지 진격했으나 러시아군의 초토화 작전과 혹독한 겨울 추위에 의해 대패하고, 병력의 대부분을 잃은 채 퇴각한다.
이 패배 이후 유럽 각국은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한다. 라이프치히 전투(1813, '국가들의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한 나폴레옹은 1814년 엘바섬으로 유배된다.
그러나 1815년 3월,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해 프랑스로 귀환하여 '백일천하'를 시작한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공작과 프로이센의 블뤼허 원수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하고, 이후 세인트헬레나섬으로 다시 유배되어 1821년에 생을 마감한다.
나폴레옹 시대의 유산
나폴레옹 시대는 프랑스 혁명의 일부 이념을 유럽 전역에 확산시켰다. 나폴레옹 법전을 비롯한 합리적 법체계, 평등 이념, 민족주의 사상 등이 유럽 각국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그의 패배 후 1815년 비엔나 회의를 통해 유럽의 새로운 질서(비엔나 체제)가 수립되는데, 이는 19세기 유럽 국제관계의 기본 틀이 된다.
나폴레옹은 군사적 천재성과 정치적 수완을 겸비한 인물로, 프랑스 혁명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근대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동시에 끊임없는 전쟁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가져왔고, 개인의 권력 욕심이 지나쳤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 시기 프랑스는 혁명의 급진적 이상과 구체제의 안정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했던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며,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는 부르봉 왕정복고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