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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역사 기본 14. 18세기 스페인 부르봉 개혁과 계몽주의 영향
18세기 스페인은 부르봉 왕조의 통치 아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개혁을 경험했다. 이 시기는 '부르봉 개혁' 또는 '스페인 계몽주의'라고 불리며, 17세기의 쇠퇴에서 벗어나 스페인이 다시 강대국으로 도약하려 했던 노력의 시기였다. 펠리페 5세, 페르난도 6세, 카를로스 3세 등으로 이어지는 부르봉 군주들은 프랑스식 중앙집권적 모델과 계몽주의 사상을 결합해 스페인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18세기 부르봉 군주들과 그들의 통치
펠리페 5세(1700-1746)
펠리페 5세는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스페인의 체제를 재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프랑스의 행정 모델을 스페인에 도입하려 했다. 그의 주요 업적은 '누에바 플란타 칙령'을 통한 국가 통합이었다. 이 칙령은 아라곤 왕국 지역(아라곤, 발렌시아, 카탈루냐, 마요르카)의 전통적인 자치권(푸에로스)을 폐지하고, 카스티야의 법과 행정 체계를 전국에 적용했다.
펠리페 5세는 또한 행정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시대의 위원회(consejos) 시스템을 축소하고, 프랑스식 국무장관(secretarios de estado)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더 효율적이고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가능하게 했다. 그의 통치 시기에 1734년 마드리드 왕궁이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웅장한 왕궁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펠리페 5세는 심각한 우울증과 정신질환을 앓았다. 그는 1724년 잠시 왕위를 아들 루이스 1세에게 양도했으나, 루이스가 7개월 만에 사망하자 다시 왕위에 복귀했다. 그의 통치 후반기에는 두 번째 부인인 이사벨 파르네시오(Isabel Farnese)와 이탈리아 출신 고문 훌리오 알베로니(Julio Alberoni)의 영향력이 컸다.
페르난도 6세(1746-1759)
펠리페 5세의 뒤를 이은 페르난도 6세는 평화주의적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중립 정책'(neutralidad)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스페인이 불필요한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이 평화의 시기는 스페인 내부 개혁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페르난도 6세는 특히 해군력 강화와 교역 촉진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재상 엔세나다 후작(Marqués de la Ensenada)은 해군을 현대화하고, 카디스 해군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또한 왕립 과학아카데미와 왕립 미술아카데미 등이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6세는 자녀가 없었고, 부인의 죽음 이후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통치 능력을 잃었다. 결국 이복동생 카를로스에게 왕위를 넘기고 1759년 사망했다.
카를로스 3세(1759-1788)
카를로스 3세는 18세기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군주로 평가된다. 그는 스페인에 즉위하기 전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카를로 7세)으로 통치하며 이미 개혁 성향을 보여주었다. 스페인 왕이 된 후에는 '계몽군주'(Enlightened Monarch)로서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카를로스 3세는 유능한 개혁 성향의 장관들(레안드로 데 보르본 백작, 플로리다블랑카 백작, 아란다 백작 등)을 기용했다. 이들은 농업, 산업, 무역, 과학, 교육 분야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카를로스 3세 치하에서 마드리드는 현대적인 수도로 탈바꿈했다. 그는 파세오 델 프라도, 알라메다, 푸에르타 데 알칼라, 과학박물관 등 마드리드의 주요 랜드마크를 건설했으며, 도시의 청결과 안전을 위한 조치도 취했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마드리드의 최고 시장'(el mejor alcalde de Madrid)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통치 기간은 스페인 계몽주의의 절정기로, 많은 지식인들이 스페인의 근대화를 위한 논의에 참여했다. 가스파르 멜초르 데 호베야노스(Gaspar Melchor de Jovellanos), 페이호(Benito Jerónimo Feijoo), 캄포마네스(Pedro Rodríguez de Campomanes) 등이 대표적인 계몽주의 사상가들이었다.
카를로스 4세(1788-1808)
카를로스 3세의 아들인 카를로스 4세는 부친과 달리 우유부단했고, 통치에 대한 관심도 적었다. 그의 통치 시기에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유럽 정세가 급변했다. 처음에 스페인은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에 가담했으나, 나중에는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고 영국과 대립했다.
카를로스 4세 시기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왕비의 총애를 받던 마누엘 고도이(Manuel Godoy)였다. 고도이는 처음에는 일부 개혁 정책을 추진했으나, 프랑스 혁명의 위협으로 점차 보수화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하자 아랑후에스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카를로스 4세는 왕위를 아들 페르난도 7세에게 양위한 후 프랑스로 망명했다.
부르봉 개혁의 주요 내용
행정 개혁과 중앙집권화
부르봉 왕조는 프랑스식 중앙집권적 행정 모델을 도입했다. 국가는 인텐덴시아(intendencias)라는 행정 구역으로 나뉘었고, 각 지역에는 왕을 대표하는 인텐단테(intendente)가 파견되었다. 이들은 세금 징수, 공공사업, 군사 업무, 경제 개발을 감독했다.
또한 방대한 관료제가 발전했다. 새로운 행정 엘리트 계층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대학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이었다. 이를 통해 국가 통치의 효율성이 높아졌다.
식민지 행정 구역도 개편되었다. 기존의 두 개 총독구(비스레이노, virreinato)에서 브에노스아이레스, 뉴그라나다 등이 추가되어 네 개로 확대되었고, 인텐덴시아 제도가 식민지에도 도입되었다.
경제 정책과 중상주의
부르봉 왕조는 중상주의적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중상주의는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기 위해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제한하며,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식민지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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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자유화: 카를로스 3세는 1778년 '자유무역령'(Reglamento de Libre Comercio)을 공포해, 스페인의 여러 항구가 직접 아메리카 식민지와 교역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전에는 세비야(나중에 카디스)만이 공식적으로 식민지 무역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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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개혁: 호베야노스와 같은 개혁가들은 대규모 토지 소유와 메스타(Mesta, 양 사육자 길드)의 특권이 농업 발전을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미경작지를 분배하고, 관개 시설을 확충하며, 농업 기술을 개선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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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진흥: 국영 공장(Real Fábricas)이 설립되어 고급 직물, 도자기, 유리, 무기 등을 생산했다. 또한 민간 제조업체들에게도 세금 혜택과 기술 지원이 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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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프라 건설: 도로, 운하, 항구 등의 기반 시설이 확충되었다. 1761년에는 마드리드에서 시작하는 방사형 고속도로 네트워크 건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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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경제 개발: 식민지는 스페인 본국에 원자재를 공급하고 제조품을 구매하는 상호보완적 경제 구조가 강화되었다. 식민지 농업(설탕, 담배, 코코아 등)과 광업이 장려되었다.
군사 개혁
스페인의 군사력 회복도 부르봉 개혁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프랑스식 모델을 따른 상비군이 도입되었고, 해군이 현대화되었다.
특히 해군력 강화는 영국의 해양 패권에 대항하고 식민지 제국을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페르난도 6세와 카를로스 3세 시기에 건조된 군함들은 스페인 해군을 세계 3위 규모로 성장시켰다.
또한 이 시기에 군사 아카데미들이 설립되어 현대적인 전쟁 기술을 교육했다. 요새, 조선소, 항구 등의 군사 시설도 현대화되었다.
교육과 문화 개혁
부르봉 왕조는 교육과 과학 발전을 통한 국가 근대화를 추구했다. 주요 개혁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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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개혁: 전통적인 스콜라 철학 대신 실험 과학, 수학, 의학 등 실용적인 학문이 강조되었다. 살라만카, 알칼라 등 주요 대학의 커리큘럼이 현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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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 아카데미 설립: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언어), 역사 아카데미, 의학 아카데미, 과학 아카데미 등이 설립되어 연구와 지식 전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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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탐험: 식물학, 천문학, 지리학 분야의 탐험대가 아메리카와 태평양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종을 발견하고, 지도를 제작하며, 과학 지식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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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협회(Sociedades Económicas de Amigos del País): 지방의 계몽된 엘리트들이 모여 농업, 산업, 교육 발전 방안을 논의하는 협회들이 전국에 설립되었다.
교회 개혁과 레갈리스모(Regalismo)
부르봉 왕조는 교회에 대한 왕권의 통제를 강화하는 '레갈리스모'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교황청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교회 자원을 국가 발전에 활용하려는 시도였다.
특히 카를로스 3세는 1767년 예수회 추방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예수회는 교육과 선교 활동으로 영향력이 컸으나, 왕권에 대한 충성보다 교황에 대한 충성이 우선한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이는 유럽의 다른 부르봉 왕가들도 취한 조치였다.
예수회 추방 이후 그들이 운영하던 학교와 대학은 국가 통제 하에 들어갔다. 또한 가톨릭 교회의 특권과 면세 혜택이 일부 축소되었고, 종교재판소의 권한도 제한되었다.
계몽주의의 영향과 스페인 특유의 발전
스페인 계몽주의는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계몽주의와 공통점이 있으나, 중요한 차이점도 존재했다. 스페인에서는 대부분의 계몽주의자들이 가톨릭 신앙과 전통적 군주제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추구하는 '온건한 계몽주의'를 표방했다.
스페인 계몽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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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와 응용 과학 강조: 이론적 철학보다는 농업, 산업, 무역 등 실용적인 분야의 발전에 초점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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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앙과의 조화 추구: 볼테르나 루소와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급진적인 종교 비판은 대부분 거부되었다. 대신 '계몽된 가톨릭'이 장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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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주도적 성격: 프랑스나 영국과 달리 스페인 계몽주의는 민간 지식인보다는 정부 관료들에 의해 주도되는 경향이 있었다.
스페인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들로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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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토 헤로니모 페이호(Benito Jerónimo Feijoo): 베네딕트회 수도사로, 미신과 무지를 비판하고 실험 과학과 합리적 사고를 옹호했다. 그의 저서 "teatro crítico universal"은 당대 스페인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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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파르 멜초르 데 호베야노스(Gaspar Melchor de Jovellanos): 농업 개혁을 주장했으며, 특히 "Informe sobre la Ley Agraria"(농업법에 관한 보고서)에서 토지 분배의 불평등과 농업 생산성 저하 문제를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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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로드리게스 데 캄포마네스(Pedro Rodríguez de Campomanes): 교육, 무역, 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을 주도했으며, 길드와 메스타 같은 전통적 경제 기구의 특권을 제한하고자 했다.
개혁의 성과와 한계
18세기 부르봉 개혁은 스페인에 상당한 발전을 가져왔다. 인구가 증가하고(약 750만에서 1,050만으로), 무역량이 늘어났으며, 산업 생산도 확대되었다. 군사력이 회복되고, 식민지 행정이 효율화되었으며, 학문과 예술이 발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는 뚜렷한 한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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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과 교회의 저항: 특권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협하는 개혁에 저항했다. 특히 토지 개혁은 귀족과 교회의 반대로 인해 제한적으로만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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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의 한계: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스페인의 산업화는 제한적이었다. 기술, 자본, 인프라 부족이 주요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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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중심 사회 유지: 사회구조의 근본적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귀족과 성직자 계층이 특권을 유지했고, 중산층이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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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사상의 제한적 확산: 계몽주의 사상은 주로 엘리트 계층에 제한되었으며, 일반 대중에게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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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문제: 개혁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서는 크리오요(현지 태생 스페인인)들의 불만이 커졌다. 이들은 본국의 더 강화된 통제와 과세에 반발했다.
국제 관계와 외교 정책
18세기 스페인의 외교 정책은 주로 프랑스와의 '가족 협약'(Pactos de Familia)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부르봉 가문이라는 공통된 왕가를 가진 두 나라는 영국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
특히 중요한 충돌은 영국과의 식민지 경쟁이었다. 스페인은 영국의 확장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전쟁에 참여했다. 7년 전쟁(1756-1763) 후 파리 조약에서 스페인은 플로리다를 영국에 할양해야 했지만, 미국 독립전쟁(1775-1783) 중에는 영국에 맞서 미국을 지원하여 플로리다를 되찾았다.
남부 유럽과 지중해에서도 스페인은 영향력을 회복하려 했다.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부르봉 가문의 분가가 통치했고, 북아프리카 해안의 몇몇 요새를 확보하여 바르바리 해적의 위협을 줄이려 했다.
18세기 말과 위기의 징후
카를로스 3세가 1788년 사망한 이후, 스페인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다. 그의 아들 카를로스 4세는 유능한 통치자가 아니었고, 프랑스 혁명의 발발(1789)은 유럽 전체에 혼란을 가져왔다.
처음에 스페인은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특히 사촌이자 프랑스의 부르봉 왕 루이 16세가 처형된 후에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795년 바젤 조약으로 화해한 후, 스페인은 오히려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고 영국에 대항했다.
마누엘 고도이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러한 정책 변화는 영국과의 해전에서 패배(트라팔가르 해전, 1805)와 해상 무역 단절로 이어졌다. 스페인 경제는 악화되었고, 개혁의 성과가 위협받았다.
결정적으로, 1807년 퐁텐블로 조약을 통해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포르투갈 침공을 허용했다. 이는 곧 프랑스군이 스페인 영토 내에 주둔하는 계기가 되었고, 1808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점령으로 이어졌다. 아랑후에스 봉기로 카를로스 4세가 퇴위하고 페르난도 7세가 즉위했으나, 두 왕은 모두 나폴레옹에게 속아 바이용에서 왕위를 포기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새 왕으로 임명했다.
이에 반발한 스페인 국민들은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프랑스군에 대항해 봉기했고, 이는 스페인 독립 전쟁(1808-1814)의 시작이 되었다. 18세기 부르봉 개혁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고, 스페인은 다시 한번 격동의 시기를 맞이했다.
결론
18세기 스페인의 부르봉 개혁은 17세기의 쇠퇴에서 벗어나 국가를 재정비하고 근대화하려는 시도였다. 이 개혁은 중앙집권화, 경제 발전, 교육 확대, 군사력 강화 등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계몽주의 사상은 이러한 개혁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으나, 스페인 계몽주의는 가톨릭 신앙과 왕권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온건한 형태로 발전했다. 이는 급진적 변화보다는 점진적 개혁을 선호하는 스페인의 전통적 성향을 반영한다.
부르봉 개혁은 스페인을 다시 한번 유럽의 주요 강국으로 부상시키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했으나,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발전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또한 기존 특권층의 저항, 경제적 한계, 변화하는 국제 정세 등으로 인해 개혁의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부르봉 개혁은 현대 스페인 국가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앙집권적 행정 체계, 지방과 식민지에 대한 통제 강화, 교회와 국가의 관계 재정립 등은 이후 스페인 정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문화적 성취와 지적 논의는 19세기 스페인 자유주의의 씨앗을 뿌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외부 충격은 이러한 개혁의 흐름을 중단시켰다. 스페인은 이후 두 세기 동안 정치적 불안정, 이념적 갈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근대화의 길을 더디게 걸어갔다. 부르봉 개혁이 이룬 성과와 남긴 과제는 현대 스페인의 정체성과 도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