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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역사 기본 14. 청교도 혁명(1642~1649)과 공화정(크롬웰 시대)
1. 내전의 발발과 전개
외교 정책과 스페인과의 전쟁
크롬웰의 외교 정책은 개신교 국가들과의 연대, 상업적 이익 추구, 그리고 가톨릭 세력(특히 스페인)에 대한 견제를 중심으로 했다. 그는 유럽 대륙의 개신교도들을 보호하는 전통적인 영국의 역할을 중시했다.
1655년, 크롬웰은 '서방 디자인(Western Design)'이라 불리는 스페인 식민지 공격 계획을 승인했다. 영국 원정대는 히스파니올라(현재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 공격에 실패했지만, 자메이카는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이것이 서인도 제도에서 영국 식민 제국의 시작이었다.
1656년부터 1659년까지 진행된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영국 해군은 여러 성공을 거두었다. 블레이크(Robert Blake) 제독은 테네리페 해전에서 스페인 보물선단을 격파했고, 스페인 본토 연안을 봉쇄했다. 육상에서는 프랑스와 동맹하여 던커크(Dunkirk)를 점령했다(1658년). 이 전쟁은 영국이 유럽과 세계 무대에서 주요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크롬웰은 또한 프랑스와의 동맹, 네덜란드 및 북유럽 국가들과의 무역 협정, 그리고 발덴시안(Waldensians) 같은 유럽 대륙의 개신교 소수자 보호 등을 추진했다. 그의 외교 정책은 영국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데 기여했으나, 높은 비용과 다소 이상주의적인 목표로 인해 비판도 받았다.에즈힐 전투와 초기 갈등 1642년 8월 22일, 찰스 1세가 노팅엄에서 왕기를 들어올리며 공식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왕당파(Royalists, '기사당(Cavaliers)'이라고도 불림)와 의회파(Parliamentarians, '원두머리당(Roundheads)'이라고도 불림) 사이의 내전에 돌입했다.
첫 주요 전투는 1642년 10월 23일 에즈힐(Edgehill)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양측 모두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러나 이 전투 이후 전쟁의 기본 구도가 형성되었다. 왕당파는 주로 북부와 서부 지역에서 강세를 보였고, 의회파는 런던과 동부, 남동부 지역을 장악했다.
초기에는 왕당파가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그들은 기존 왕실군 출신 지휘관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훈련된 기병대를 보유했다. 찰스의 조카 루퍼트 왕자(Prince Rupert)는 특히 뛰어난 기병 지휘관이었다. 반면 의회파는 처음에는 조직력이 부족했지만, 런던의 자원과, 해군의 지지, 그리고 무역항들의 관세 수입이라는 경제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1643년 중반까지,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왕당파는 옥스퍼드를 본부로 삼아 서부와 북부의 상당 부분을 통제했다. 의회파는 런던을 중심으로 동부 지역을 확보했다. 양측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협상을 통한 해결 가능성도 있었다.
솔렘 리그와 의회파의 재편
전쟁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사건은, 의회가 스코틀랜드와 맺은 동맹이었다. 1643년 9월, 의회는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과 '솔렘 리그 앤 커버넌트(Solemn League and Covenant)'를 체결했다. 이 동맹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2만 명의 군대를 의회파에 제공했고, 그 대가로 의회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 장로교 제도를 도입하기로 약속했다.
스코틀랜드 군의 개입은 1644년 전세를 의회파에 유리하게 바꾸었다. 1644년 7월 2일, 마스턴 무어(Marston Moor) 전투에서 의회파와 스코틀랜드 연합군은 왕당파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지휘한 기병대가 큰 활약을 했다. 이 승리로 북부 잉글랜드의 대부분이 의회파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의회파 내부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종교적으로는 장로교파와 독립파(Independents) 사이의 긴장이 있었다. 장로교파는 스코틀랜드식 국가 교회를 원했고, 독립파는 각 교회의 자율성을 주장했다. 군사적으로는 맨체스터 백작과 같은 의회파의 귀족 지휘관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추구하기보다는 협상을 통한 해결을 원한 반면, 크롬웰을 포함한 더 급진적인 인물들은 확실한 군사적 승리를 주장했다.
이러한 갈등은 1644년 말 '자기부정조례(Self-Denying Ordinance)'와 '신형군(New Model Army)'의 창설로 이어졌다. 자기부정조례는 의회 의원들이 군 지휘관직을 맡지 못하게 했다(비록 크롬웰은 예외를 받았지만). 신형군은 토머스 페어팩스(Thomas Fairfax)의 지휘하에 기존의 여러 의회파 군대를 하나로 통합한 전문적이고 규율 잡힌 군대였다.
네이즈비 전투와 왕당파의 패배
1645년 6월 14일, 결정적인 네이즈비(Naseby)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페어팩스와 크롬웰이 이끄는 신형군은 찰스 1세의 주력군을 완전히 격파했다. 왕의 비밀 서신들이 노획되어 그가 가톨릭 아일랜드인들과 외국 세력의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는 왕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더욱 떨어뜨렸다.
네이즈비 이후, 왕당파의 저항은 점차 무너졌다. 1645년 9월, 브리스틀이 함락되었고, 1646년 봄까지 대부분의 왕당파 요새들이 항복했다. 1646년 5월, 찰스는 마침내 노팅엄에서 스코틀랜드군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제1차 내전'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지 않았다. 의회, 군대, 스코틀랜드인들 사이에 찰스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인들은 1647년 1월, 의회에 찰스를 넘기고 런던을 떠났다(체불된 급여를 받은 후).
2. 혁명의 급진화
왕과 의회, 군대의 3자 갈등
제1차 내전 이후, 권력은 세 축 사이에서 복잡하게 얽혔다: 의회(특히 장로교파가 다수인 하원), 군대(독립파의 영향력이 강했다), 그리고 여전히 합법적 군주인 찰스 왕.
의회는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신형군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의회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군인들에게 제대로 급여를 지급하지 못했고, 군대 해산과 스코틀랜드군 철수를 원했다. 반면 군대는 체불된 급여 지급과 내전 중 희생에 대한 보상, 그리고 종교적 관용을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찰스는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구심점이었다. 그는 헐름비 하우스(Holmby House)에 연금되어 있었지만, 의회와 군대 사이의 분열을 이용하여 자신의 입지를 회복하려 했다. 그는 의회의 장로교파와 비밀 협상을 시도했고, 동시에 스코틀랜드와도 접촉했다.
1647년 6월, 군대는 코넷 조이스(Cornet Joyce)를 보내 찰스를 헐름비 하우스에서 뉴마켓으로 이동시켰다. 이는 사실상 국왕을 의회로부터 '납치'한 것으로, 군대가 정치적 행위자로 본격 등장했음을 의미했다.
퍼트니 토론과 레벨러스의 등장
1647년 여름과 가을, 군 내부에서 잉글랜드의 미래에 대한 급진적인 논의가 벌어졌다. 가장 유명한 것은 10월에 퍼트니(Putney) 교회에서 열린 일련의 토론이었다. 이 '퍼트니 토론'에서는 민주주의, 보통선거권, 자연권, 종교의 자유 등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인 개념들이 논의되었다.
이 시기 군 내부와 런던의 급진파들 사이에서 '레벨러스(Levellers, 평등파)'라는 정치 운동이 등장했다. 존 릴번(John Lilburne), 리처드 오버튼(Richard Overton), 윌리엄 월윈(William Walwyn) 등이 이끈 이 운동은 1647년 '민중협정(Agreement of the People)'이라는 문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는 보통선거권(비록 여성과 극빈자는 제외했지만), 종교의 자유, 법 앞의 평등, 정기적인 의회 선거 등을 요구했다.
크롬웰과 아이어턴(Henry Ireton) 같은 군 지도부는 이러한 급진적 요구에 반대했다. 그들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만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군 지도부는 레벨러스 운동을 억압했고, 1649년 봄 버포드(Burford)에서 일어난 레벨러스 병사들의 봉기를 진압했다.
제2차 내전과 프라이드 숙청
찰스 1세는 연금 상태에서도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적 술수를 계속했다. 1647년 11월, 그는 와이트섬(Isle of Wight)으로 탈출했고, 거기서 스코틀랜드와 비밀 협약('인게이지먼트', Engagement)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라 찰스는 장로교를 3년간 잉글랜드에 도입하기로 약속하는 대가로 스코틀랜드의 군사적 지원을 받기로 했다.
1648년 봄과 여름, '제2차 내전'이 발발했다.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를 침공했고, 곳곳에서 왕당파 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크롬웰은 프레스턴(Preston)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고, 페어팩스는 콜체스터(Colchester)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 두 번째 내전은 첫 번째보다 짧았지만, 더 잔혹했다. 특히 군 지도부는 찰스가 약속을 어기고 다시 전쟁을 일으킨 것에 격분했다.
제2차 내전이 끝나자, 의회는 찰스와의 협상을 재개했다. 그러나 군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찰스가 '피의 죄인(Man of Blood)'이며,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648년 12월 6일, 군 대령 토머스 프라이드(Thomas Pride)는 의회 입구에서 왕과 타협하려는 의원들의 출입을 막았다. 이 '프라이드 숙청(Pride's Purge)'으로 약 140명의 의원이 배제되었고, 남은 60여 명의 의원들('잔여 의회', Rump Parliament)만이 의회에 남았다.
국왕 처형과 공화국 선포
군의 지원을 받은 잔여 의회는 찰스 1세를 재판하기로 결정했다. 1649년 1월, 135명의 판사로 구성된 특별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이 재판은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군주가 신민들에게 재판받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찰스는 재판소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혐의에 답변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국왕은 신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신권 왕권설을 끝까지 고수했다. 1월 27일, 그는 '폭군, 반역자, 살인자, 공공의 적'으로 선고받았고, 1월 30일 화이트홀(Whitehall) 궁 밖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찰스의 처형은 유럽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신성한 군주의 처형은 전통적 권위와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처형 직후, 잔여 의회는 왕정과 상원을 폐지하고, 잉글랜드를 '공화국(Commonwealth)'으로 선언했다. 새 국가의 통치 기구로 41명으로 구성된 '국무회의(Council of State)'가 설립되었다.
3. 공화정의 수립과 초기 도전
새로운 정부 체제의 수립
1649년에 수립된 공화국(Commonwealth)은 영국 역사상 유례없는 실험이었다. 군주 없는 통치, 상원 없는 의회, 그리고 국가 교회의 기존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이 모두 결합된 급진적 변화였다.
새 정부는 몇 가지 상징적 조치를 취했다. 왕의 조상(彫像)들이 제거되었고, 왕관과 왕실 문장에서 왕권의 상징들이 사라졌다. 공식 문서들은 더 이상 국왕의 이름으로 발행되지 않고, '잉글랜드 공화국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새로운 국새(Great Seal)가 제작되었고, 왕실 자산은 국가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은 즉시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첫째, 정통성의 문제가 있었다. 새 정부는 '프라이드 숙청' 이후 남은 소수의 의원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의회는 1640년에 선출된 이후 새 선거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둘째, 새 체제는 영국 사회의 소수만이 지지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왕정을 선호했고, 찰스의 처형을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정복
국내 문제와 함께, 공화국은 외부 위협에도 직면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찰스 1세의 아들(나중의 찰스 2세)이 왕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아일랜드는 1641년 반란 이후 계속해서 혼란 상태였다. 로얄리스트, 가톨릭 연합(Catholic Confederates), 그리고 얼스터의 개신교도 등 다양한 세력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1649년 8월, 크롬웰은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크롬웰의 아일랜드 정복은 특히 드로헤다(Drogheda)와 웩스퍼드(Wexford)에서의 학살로 인해 악명 높다. 크롬웰은 드로헤다에서 항복한 수비대와 가톨릭 사제들, 그리고 많은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이러한 잔혹 행위는 나머지 아일랜드에 공포심을 심어주어 저항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1650년 5월, 크롬웰은 아일랜드를 떠났고, 그의 사위 아이어턴과 다른 지휘관들이 정복을 완료했다.
이 정복의 여파로 광범위한 토지 몰수가 이루어졌다. 가톨릭 토지 소유자들은 재산을 빼앗겼고, 그 땅은 영국 군인들과 '모험가(Adventurers, 정복 비용을 대출한 투자자들)'에게 분배되었다. 이것이 '크롬웰 정착(Cromwellian Settlement)'이며, 이는 현대까지 아일랜드-영국 관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찰스 2세가 1649년 2월에 왕으로 선포되었다. 1650년 6월, 그는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여 국민 서약(National Covenant)을 수용했다. 스코틀랜드가 새로운 왕을 중심으로 결집하자, 크롬웰은 북쪽으로 진군했다.
1650년 9월, 크롬웰은 던바(Dunbar)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다. 이듬해 9월, 우스터(Worcester) 전투에서 잉글랜드로 침입한 찰스 2세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물리쳤다. 찰스 2세는 간신히 탈출하여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로써 '제3차 내전'이 끝났고, 공화국은 전 영국 제도(British Isles)를 통제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와의 전쟁과 무역정책
국내 정치와 군사적 도전과 함께, 공화국은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특히 중요한 것이 1651년의 항해법(Navigation Act)이었다. 이 법은 유럽 상품이 영국으로 수입될 때 영국 선박이나 상품의 원산지 국가의 선박만을 이용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당시 해운 강국이던 네덜란드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 법과 함께 영국의 다른 공격적인 무역 정책들은 1652년 제1차 영네덜란드 전쟁(First Anglo-Dutch War)을 촉발했다. 이 전쟁은 주로 해상에서 벌어졌으며, 1654년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 승리는 네덜란드의 해상 패권에 도전하는 영국의 부상을 보여주었다.
공화국은 또한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국제적 인정을 추구했다. 처음에는 유럽의 군주국들이 국왕 살해자들의 정부를 인정하기를 꺼렸지만, 점차 실용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4. 호국경 체제와 크롬웰의 통치
잔여 의회의 해산과 권력 집중
1649년부터 1653년까지, 잔여 의회와 국무회의가 공식적으로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이 정치 권력의 중심이었고, 군 내에서는 크롬웰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다.
의회와 군 사이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특히 의회 개혁, 종교적 관용, 법 개혁 등의 문제에서 의견 차이가 있었다. 크롬웰과 군 장교들은 잔여 의회가 약속한 개혁을 실행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만 연장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1653년 4월 20일, 크롬웰은 병력을 이끌고 의회에 들어가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는 의회 의원들에게 "주님의 사업에서 비켜라"라고 외치며, 의회 의사봉을 치웠다. 이로써 잉글랜드 내전 초기부터 계속된 '장기 의회'가 마침내 종결되었다.
의회 해산 후, 크롬웰은 '신도 회의(Nominated Assembly)' 또는 '베어본 의회(Barebone's Parliament)'라 불리는 새로운 입법 기구를 소집했다. 140명의 '경건한 사람들'로 구성된 이 회의는 7월부터 12월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기구는 너무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다가 보수파 의원들의 사직으로 해산되었다.
통치 구조와 호국경의 권한
베어본 의회 해산 후, 1653년 12월 16일, '통치 구조(Instrument of Government)'라는 헌법적 문서가 발표되었다. 이는 영국 역사상 최초의 성문 헌법이었다. 이 문서에 따라 크롬웰은 '호국경(Lord Protector)'으로 임명되었다.
호국경 체제는 일종의 입헌적 공화정이었다. 크롬웰은 종신직 호국경으로 행정부의 수장이 되었고, 그를 보좌하는 국무회의가 있었다. 입법부는 단원제 의회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선거권은 연간 200파운드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호국경의 권한은 상당했지만, 무제한은 아니었다. 그는 의회의 동의 없이 법을 제정할 수 없었고, 국무회의의 조언을 들어야 했다. 또한 의회에서 통과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크롬웰이 정치 권력의 중심이었고, 이는 점차 군사 독재에 가까워졌다.
1654년 9월에 소집된 첫 호국경 의회는 크롬웰과 즉시 충돌했다. 의회는 '통치 구조'를 검토하고 수정하려 했고, 종교적 관용 정책에 반대했다. 이에 크롬웰은 최소 회기인 5개월이 지난 1655년 1월, 의회를 해산했다.
주요 군구 제도와 국내 통치
1655년 초, 남부 잉글랜드에서 왕당파의 소규모 봉기(페너루디스 봉기, Penruddock's Uprising)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크롬웰은 더 강력한 통제 체제를 도입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11개의 지역(10 'Major-Generalcies')으로 나뉘었고, 각 지역은 군 장성(Major-General)의 통치를 받았다.
이 주요 군구 제도(Rule of the Major-Generals)는 1655년 8월부터 1657년 1월까지 지속되었다. 군 장성들은 지방 민병대를 통제하고, 범죄와 반란을 진압하며, 도덕 개혁을 추진했다. 그들은 왕당파들에게 특별세(decimation tax)를 부과했고, 선술집, 도박, 연극, 마상 경기 등을 제한했다.
이 제도는 널리 불만을 샀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군사 독재로 여겼고, 전통적인 지방 정부 체계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1656년 9월에 소집된 두 번째 호국경 의회에서, 의원들은 이 제도를 비판했고 재정 지원을 거부했다.
크롬웰의 국내 정책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그는 법 개혁을 시도했고, 대학 교육을 개선했으며, 유대인들이 잉글랜드에 재정착하도록 허용했다(1290년 이후 처음). 또한 그는 폭넓은 종교적 관용을 추구했다. 독립파, 장로교파, 침례교도 등 다양한 개신교 집단들이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었다. 다만 이 관용은 가톨릭과 성공회에는 적용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