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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사 기본 13. 프랑스 혁명의 전개(1789-1792)
1789년: 혁명의 시작
프랑스 혁명은 우연적 사건들의 연쇄이면서도 구조적 위기의 필연적 결과였다. 1789년은 프랑스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삼부회에서 국민의회로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에서 개회된 삼부회(États Généraux)는 곧 중대한 정치적 위기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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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착 상태:
- 투표 방식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 신분별 투표 vs. 개인별 투표
- 제3신분: 공동 검증과 개인별 투표(per head) 주장
- 귀족과 성직자: 전통적 신분별 투표(by order) 고수
- 네케르와 루이 16세의 우유부단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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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신분의 단호한 행동:
- 6월 10일: 시에예스(Sieyès)의 제안으로 각 신분에 공동 검증 최후 통첩
- 6월 17일: 제3신분, 스스로를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로 선언
- 6월 20일: 회의장이 폐쇄되자 근처 테니스 코트에 모여 맹세
- '테니스 코트 서약'(Serment du Jeu de Paume): 프랑스에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는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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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대응과 실패:
- 6월 23일: 루이 16세의 '왕실 회의'에서 제한적 개혁 제안과 해산 명령
- 미라보(Mirabeau)의 유명한 반발: "우리는 오직 총검의 힘에 의해서만 자리를 떠날 것이다"
- 귀족과 성직자의 일부가 점진적으로 국민의회에 합류
- 7월 초: 베르사유 주변에 왕실 군대 집결, 파리에 긴장감 고조
이 과정에서 제3신분 대표들은 단순한 세금 논의에서 국가 재구성이라는 혁명적 목표로 빠르게 전환했다. 시에예스의 유명한 팸플릿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의 주장("지금까지 제3신분은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이 실현되기 시작했다.
바스티유 점령과 대공포
파리 시민들은 왕실의 무력 사용 가능성과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여 과감한 행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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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혁명적 상황:
- 곡물 부족과 빵 가격 상승으로 인한 기본적 불만
- 개혁 성향의 장관 네케르 해임 소식(7월 11일)으로 위기감 고조
- 왕실 군대의 파리 포위에 대한 공포
- 팔레 로얄(Palais-Royal)에서의 선동적 연설과 시민 조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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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점령(1789년 7월 14일):
- 화약과 무기를 찾아 앵발리드(Invalides)와 바스티유 감옥 공격
- 바스티유 총독 드 로네(de Launay)와의 협상 실패
- 격렬한 전투 끝에 시민들의 승리와 드 로네 살해
- 약 100명의 공격자와 1명의 수비대원 사망, 7명의 죄수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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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점령의 상징적 의미:
- 전제정의 상징인 왕실 감옥 함락
- 파리 시민들의 무장 자위와 혁명적 주도권 확보
- 파리 시장 바이이(Bailly)와 국민방위군 지휘관 라파예트(Lafayette) 선출
- 루이 16세의 현실 인정: 7월 17일 파리 방문과 삼색 코카드(cockade) 착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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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 확산과 '대공포'(Grande Peur):
- 7월 하순부터 농촌 지역에 소요 확산
- '대공포': 귀족들이 고용한 도적단이 수확물을 파괴한다는 소문 확산
- 농민들의 자발적 무장과 영주 성채 공격
- 봉건적 문서와 권리증서 파괴, 일부 지역에서 귀족 살해
바스티유 점령은 단순한 감옥 습격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이는 파리 시민들이 혁명의 주요 행위자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 국왕과 귀족 중심의 정치 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었다. 이 사건이 후대에 프랑스의 국경일로 기념되는 것은 그것이 구체제의 상징적 종말과 새로운 시민 주권의 시작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8월 4일의 밤과 봉건제 폐지
농촌의 혼란과 귀족 성채에 대한 공격은 국민의회에 급진적 조치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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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박한 상황:
- 농촌 소요에 대한 위급 보고가 국민의회에 도달
- 영주의 봉건적 권리 행사를 거부하는 농민 저항 확산
- 귀족들의 망명 시작과 반혁명에 대한 두려움
- 혁명적 동력을 잃지 않기 위한 개혁파의 압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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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의 밤:
- 노아이유 공작과 에기용 공작의 자발적 특권 포기 선언
- 다른 귀족들의 잇따른 봉건적 권리 포기 선언
- 마을 공동체, 도시, 지방, 길드의 특권 폐지
- 성직자의 십일조 폐지와 교회 개혁 합의
- 사법직과 관직의 매매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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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 법령:
- 개인적 농노제와 영주제적 속박의 무상 폐지
- 다른 봉건적 권리에 대한 보상을 조건으로 한 폐지
- 모든 시민의 조세 평등 원칙 확립
- 사법적 특권과 직업 접근에 있어서의 불평등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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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의의:
- "봉건제의 폐지": 실제로는 봉건 체제의 법적 기반 해체
- 농민들에게는 불완전한 승리: 많은 권리가 보상을 조건으로 함
- 특권에 기초한 사회에서 법적 평등 사회로의 전환
- 프랑스 혁명의 핵심적 사회 개혁으로서의 의미
이 급진적 결정은 단 하루 밤 사이에 수 세기 동안 지속된 프랑스의 사회적, 법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귀족들의 자발적 특권 포기는 부분적으로는 농민 반란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또한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은 일부 귀족들의 진정한 개혁 의지도 반영했다. 8월 4일의 결정은 법적으로 신분제 사회의 종말을 고했으며, 근대 시민 사회의 기초를 놓았다.
인권선언과 헌법 제정의 시작
국민의회는 사회 개혁과 함께 새로운 정치 질서의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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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년 8월 26일):
- 라파예트, 시에예스, 미라보 등의 초안을 바탕으로 작성
- 17개 조항의 간결한 선언문
- 핵심 원칙: 자유, 평등, 재산권, 저항권, 주권재민
- 천부인권과 시민권의 구분과 연결
- 몽테스키외와 루소 사상의 영향이 뚜렷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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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문의 주요 내용:
- 제1조: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 살아간다"
- 제3조: "모든 주권의 원천은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 제4조: "자유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
- 제6조: "법은 일반 의지의 표현이다"
- 제11조: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권리 중 하나"
- 법 앞의 평등, 조세 평등, 공직 접근 평등 원칙 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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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정 작업의 시작:
- 일원제 입법부 vs. 이원제 입법부 논쟁
- 왕의 거부권(veto) 범위에 관한 논쟁
- 적극적 시민(능동 시민)과 수동적 시민의 구분
- 지방 행정 개혁과 중앙-지방 관계 재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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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영향과 의의:
- 미국 독립선언과 권리장전의 영향과 차별성
- 추상적 보편주의 원칙의 강조
- 이후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자유주의 헌법의 모델
- 남성에 한정된 시민권과 여성 배제의 한계
인권선언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적 기초이자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개념의 핵심 문서가 되었다. 그것은 절대왕정과 특권사회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었으며, 새로운 정치 공동체의 원칙을 천명했다. 비록 당시 상황에서는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지만, 인권선언의 원칙들은 이후 200년 이상 전 세계 민주주의 운동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혁명의 진행과 정치적 양극화
10월 5-6일 사건과 국왕의 파리 이송
1789년 가을, 지속되는 경제 위기와 정치적 긴장은 또 다른 중요한 혁명적 행동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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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과 원인:
- 지속되는 빵 부족과 파리의 식량 위기
- 베르사유 왕실 근위대의 삼색 코카드 모욕 소문
- 국왕의 인권선언 승인 거부와 헌법 과정 지연
- 마라(Jean-Paul Marat)와 데물랭(Camille Desmoulins) 등 급진파의 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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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여성들의 행진(10월 5일):
- 6,000-7,000명의 파리 여성들이 빵과 밀가루를 요구하며 집결
- 스탄리슬라스 메이야르의 지도로 베르사유로 행진
- 국민의회 압박과 국왕 면담 요구
- 라파예트가 이끄는 국민방위군의 뒤늦은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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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 습격(10월 6일 새벽):
- 군중의 일부가 궁전에 진입
-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실 습격 시도
- 왕실 근위대 일부 살해
- 국왕 가족의 발코니 등장과 파리 이동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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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와 영향:
- 루이 16세와 왕실의 튈르리(Tuileries) 궁 강제 이주
- 혁명의 중심이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이동
- 국민의회도 파리로 이전(10월 19일)
- 왕의 행동 자유 제한과 파리 민중의 감시 강화
- 여성의 혁명적 주체로서의 등장과 정치적 역할 부각
이 사건은 혁명의 주도권이 점차 온건 개혁파에서 파리 민중과 급진파로 이동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왕실에 대한 존경심의 급격한 약화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대중적 적대감이 드러났다. 국왕을 "시민들의 빵 제공자"(Baker)로 파리에 데려옴으로써, 혁명은 군주의 신성한 권위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헌법제정의회와 혁명의 제도화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는 곧 헌법제정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로 명칭을 바꾸고 프랑스의 새로운 정치, 사회 체제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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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개혁:
- 프랑스를 83개 데파르트망(départements)으로 재편: 고대 지방과 봉건적 경계 폐지
- 도시 자치정부 설립과 선출직 지방 관리 도입
- 균일한 사법 제도와 선출직 판사 제도 도입
- 도량형의 표준화 시도(미터법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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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정책:
- 관세 철폐와 국내 시장 통합
- 길드 제도 폐지와 직업 선택의 자유(르 샤플리에 법, 1791년)
- 아시냐(assignats) 발행: 교회 재산을 담보로 한 지폐
- 봉건적 부담의 금전적 보상 요구로 농민 불만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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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과 정치 참여:
-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의 구분: 납세액에 따른 선거권 제한
- 납세액 많은 시민만 선출될 자격(수동적 선거권)
- 여성, 빈곤층, 하인은 선거권 배제
- 간접 선거 제도 채택: 다단계 선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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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
- 성직자 시민헌법(Civil Constitution of the Clergy, 1790년 7월)
- 교회 재산의 국유화와 성직자의 국가 공무원화
- 주교와 사제의 시민 선출제 도입
- 교황의 권위 축소와 국가 교회의 창설
헌법제정국민의회의 개혁은 프랑스의 정치, 행정, 법률, 종교 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는 중앙집권화와 합리화를 지향하는 계몽주의적 개혁이었으나, 종교 개혁과 같은 일부 조치는 프랑스 사회 내의 깊은 분열을 초래했다. 특히 시민권 제한은 이후 급진파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반혁명 세력의 형성과 국내 분열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그에 반대하는 세력도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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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망명자(émigrés)의 활동:
- 1789년부터 시작된 귀족들의 해외 망명
- 아르투아 백작(루이 16세의 동생, 후의 샤를 10세)을 중심으로 한 조직화
- 코블렌츠(독일), 튜린(이탈리아) 등 망명 중심지 형성
- 유럽 군주국들에 대한 군사 개입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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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분열:
- 성직자 시민헌법에 대한 교황 비오 6세의 비난(1791년)
- 대다수 주교와 절반 이상의 사제들이 헌법 선서 거부
- 선서 거부 성직자(refractory clergy)와 선서 성직자(constitutional clergy) 사이의 분열
- 서부 지역(방데, 브르타뉴 등)에서 강한 가톨릭 전통과 혁명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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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양면적 태도:
- 루이 16세의 공개적 혁명 수용과 비밀 저항
- 마리 앙투아네트와 외국 궁정 사이의 비밀 연락
- 파리 시민들의 왕실에 대한 증가하는 불신
- 바렌 도주 사건(Flight to Varennes)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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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이념 분화:
- 왕당파(monarchiens): 영국식 헌정 군주제 선호
- 페양파(Feuillants): 라파예트, 바르나브 등 입헌군주제 지지
- 자코뱅파(Jacobins): 혁명의 급진화 추구
- 콜드리에 클럽(Cordeliers): 당돌랭, 마라, 에베르 등 민중 민주주의 지지
혁명 초기의 상대적 합의는 점차 심각한 정치적, 종교적, 이념적 분열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분열은 대체로 각 집단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 종교적 신념, 정치적 비전의 차이를 반영했다. 특히 가톨릭 교회에 대한 혁명 정부의 개혁은 많은 평범한 프랑스인들, 특히 농촌 지역에서 혁명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입헌군주제의 실험(1791-1792)
바렌 도주 사건과 그 여파
1791년 6월, 루이 16세와 왕실 가족의 도주 시도는 혁명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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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 계획과 실행:
- 스웨덴 백작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의 도움으로 계획 수립
- 6월 20일 밤, 변장한 왕실 가족의 튈르리 궁 탈출
- 몽메디(Montmédy)의 로열리스트 군대와 합류 계획
- 바렌앙아르곤(Varennes-en-Argonne)에서 우체국장이 국왕 인지
- 6월 21일, 파리로 강제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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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위기:
- 국왕에 대한 대중적 신뢰 상실
- 왕의 행동을 "유괴"로 해석하려는 헌법제정의회의 시도
- 공화주의 정서의 급격한 증가
- 7월 17일 샹드마르스(Champ de Mars) 청원 집회와 발포 사건
- 라파예트의 국민방위군이 시위대에 발포, 50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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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분화의 심화:
- 페양파(Feuillants): 바르나브, 라파예트 등 온건파의 분리
- 자코뱅 클럽 내 급진파(로베스피에르, 페티옹 등)의 영향력 증대
- 공화주의 선동: 데물랭의 『프랑스와 브라방 혁명』 등 공화주의 팸플릿
- 왕당파의 좌절과 망명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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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완성과 타협:
- 1791년 9월, 헌법제정의회가 헌법 완성
- 왕의 제한된 권한 인정: 입법 거부권과 장관 임명권
- 루이 16세의 헌법 수용과 충성 서약(9월 14일)
- 10월 1일 입법의회(Legislative Assembly) 개회
바렌 도주 사건은 루이 16세가 혁명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국왕은 자신이 떠난다는 성명서를 남겼는데, 여기서 그는 1789년 이후 모든 개혁에 대한 자신의 동의가 강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입헌군주제에 대한 치명적 타격이었으며, 프랑스인들이 혁명의 더 급진적인 단계로 나아갈 준비를 하게 했다.
1791년 헌법과 입헌군주제의 한계
1791년 9월 발효된 프랑스 최초의 성문 헌법은 온건한 혁명가들의 비전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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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주요 내용:
- 국민 주권과 권력 분립 원칙 천명
- 일원제 입법부(Legislative Assembly) 설립
- 국왕에게 제한적 거부권 부여(유예적 거부권)
- 법적 평등과 인권선언의 헌법적 수용
- 재산권 보호와 경제적 자유의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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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제도와 시민권:
- 능동적 시민(active citizens): 납세액 기준으로 약 450만 명(성인 남성의 약 60%)
- 선거인단(전국 약 5만 명): 높은 재산 기준
- 대의원 자격: 더 높은 재산 요건
- 여성, 빈민, 하인의 정치 참여 배제
- 2단계 간접 선거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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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한계와 모순:
- 주권재민 원칙과 제한된 참정권 사이의 모순
- 국왕의 진정성 부족과 비밀 저항
- 행정부(왕이 임명한 장관들)와 입법부 사이의 구조적 갈등
- 국왕이 군 총사령관을 임명하는 권한이 안보 위협으로 인식됨
- 혁명 상황에서 권력 분립의 실질적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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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의회 구성과 정치 세력:
- 1791년 10월 1일 개회, 745명의 전원 신진 의원
- 페양파(우파): 입헌군주제 옹호, 약 260명
- 자코뱅파(좌파): 더 급진적 개혁 추구, 약 130명
- 여러 지방 출신 비정파(중도): 약 350명, 상황에 따라 입장 변화
- 브리소(Brissot) 중심의 지롱드파 등장
1791년 헌법은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의 급격한 전환을 법제화했다. 그러나 이 헌법은 탄생 시점부터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혁명 분위기에서 권력 분립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웠고, 국왕의 불신과 외부 위협은 정치적 안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능동적 시민권의 제한은 파리 민중과 급진파의 불만을 샀으며, 혁명의 추가적 급진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전쟁 결정과 혁명의 급진화
1792년 초, 프랑스는 운명적인 전쟁 결정을 내렸고, 이는 혁명의 급진화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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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결정의 배경:
- 망명 귀족들의 국경 지역 군사 활동
-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필니츠 선언(1791년 8월)
-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위협적 외교 노트
- 프랑스 국내 정치 세력들의 다양한 전쟁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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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치 세력의 전쟁 입장:
- 지롱드파(브리소, 롤랑 등): 적극적 전쟁 지지, "혁명 수출" 의도
- 왕과 궁정: 비밀리에 패배 기대, 반혁명적 복원 가능성
- 로베스피에르: 전쟁 반대, "아무도 무장한 선교사를 환영하지 않는다"
- 파리 민중: 초기에는 애국적 열정, 후에 배신에 대한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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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선포와 초기 국면:
- 1792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 선포
- 프로이센의 오스트리아 지원과 참전
- 초기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심각한 패배와 혼란
- 브룬스윅 공작의 선언문(7월 25일): 파리 위협 시 "군사적 처벌"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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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위기의 심화:
- 패배에 대한 책임 공방과 정치적 분열 심화
- "조국의 위기"(La Patrie en danger) 선언(7월 11일)
- 자원병 모집과 국방 동원령
- 반역자 색출과 내부 적에 대한 공포 증가
- 급진 신문들(마라의 『민중의 벗』, 에베르의 『뻬르 뒤셰느』)의 선동적 논조
전쟁 결정은 혁명을 새로운 단계로 이끌었다. 로베스피에르가 경고했던 대로, 전쟁은 프랑스 사회를 극단적으로 양극화시키고 정치를 급진화했다. 지롱드파가 기대했던 쉬운 승리 대신, 프랑스군은 일련의 패배를 경험했고, 이는 반역과 음모에 대한 공포를 키웠다. 연립 유럽 군주국들의 위협은 프랑스 혁명가들에게 생존을 위한 비상 조치의 정당화를 제공했으며, 이것이 왕정 폐지로 이어졌다.
8월 10일 봉기와 왕정의 종말
파리 민중의 봉기와 왕정 정지
1792년 여름, 파리 민중은 입헌군주제를 종식시키는 결정적 행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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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의 배경:
- 국경에서의 연속된 군사적 패배와 침략 위협
- 브룬스윅 선언문의 위협에 대한 대중적 분노
- 왕과 궁정의 반역 혐의 증가
- 지방에서 파리로 모인 연방주의자(Fédérés)들의 급진적 요구
- 마르세유 대대의 파리 도착과 "라 마르세예즈" 보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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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0일 봉기:
- 새벽: 파리 각 구(sections)의 대표들이 시청(Hôtel de Ville)을 점령하고 혁명 코뮌(Paris Commune) 구성
- 새로운 국민방위군 지휘부 임명(생테르, 산떼르)
- 튈르리 궁 공격과 스위스 근위대와의 교전
- 약 600명의 공격자와 800명의 스위스 근위대원 사망
- 루이 16세 가족의 입법의회로의 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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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의 정지와 정치적 전환:
- 입법의회, 국왕의 권한 정지 선언
- 새 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공회(National Convention) 소집 결정
- 보통선거(모든 성인 남성)에 의한 대표자 선출 계획
- 페티옹, 당통, 마누엘 등 급진파 지도자들의 부상
- 루이 16세 가족의 탕플 감옥 수감(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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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이동과 이원적 권위:
- 입법의회의 임시 집행평의회 구성: 당통, 몽주, 르뷔랑 등
- 파리 코뮌의 실질적 권력 장악과 독자적 행동
-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귀환과 영향력 확대
- 선거 준비와 급진 민주주의 요구 증가
8월 10일 봉기는 파리 민중(상퀼로트, sans-culottes)이 주도한 "제2의 혁명"이었다. 이들은 혁명 엘리트들이 만든 1791년 체제가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이 봉기는 프랑스 혁명을 본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이끌었으며, 군주제 자체의 종말을 의미했다. 또한 혁명 내에서 파리 민중과 그 지도자들의 역할을 크게 강화했다.
9월 학살과 공포 정치의 전조
전쟁 위기와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파리는 폭력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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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학살의 배경:
- 베르됭 요새 함락 소식(9월 2일)과 프로이센군의 파리 진격
- "내부의 적"과 감옥 내 반혁명 음모에 대한 공포
- 국경 방어를 위한 자원병 모집과 파리 방어 불안
- 마라의 선동적 기사와 공포 분위기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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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진행(9월 2-7일):
- 파리 감옥들에 대한 조직적 공격
- 임시 "민중 재판소"에 의한 간이 재판과 즉결 처형
- 약 1,200-1,400명의 수감자 살해(귀족, 성직자, 일반 범죄자 포함)
- 특히 잔혹했던 카르므(Carmes) 수도원에서의 성직자 학살
- 푸르소와 랑베르 공주 등 왕실 측근의 잔인한 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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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반응과 책임:
- 입법의회의 무력한 대응과 묵인
- 당통 법무장관의 모호한 태도: "대담함, 더 많은 대담함, 항상 대담함"
- 롤랑 내무장관의 뒤늦은 비난과 지롱드파의 거리두기
- 파리 코뮌 지도자들(마라, 에베르 등)의 옹호와 정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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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의미와 결과:
- 공식적 법 절차 밖의 혁명적 폭력의 선례
- 정치적 분열 심화: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갈등 씨앗
- 지방으로의 확산: 랭, 오를레앙, 베르사유 등에서 유사 사건
- 혁명에 대한 국제적 이미지 손상과 해외 여론 악화
9월 학살은 혁명의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이는 즉흥적이면서도 일정 수준 조직된 집단 폭력으로, "혁명적 정의"라는 이름하에 자행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공포정치의 전조가 되었으며, 정치적 목적을 위한 대중 폭력의 사용에 대한 선례를 만들었다. 학살은 또한 지롱드파와 산악파(몽타냐르) 사이의 도덕적,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켰다.
국민공회 개회와 공화국 선포
입법의회를 대체할 새로운 의회인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는 군주제의 폐지와 공화국 수립이라는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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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공회의 선출과 구성:
- 보통선거(성인 남성)에 의한 선출, 그러나 낮은 투표 참여율
- 749명의 대표자, 다양한 직업과 지역 배경
- 지롱드파(우파): 브리소, 롤랑 부인, 콩도르세 등
- 산악파(좌파):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생쥐스트 등
- "평원"(중도): 상황에 따라 입장을 변경하는 다수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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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선포(1792년 9월 21일):
- 첫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왕정 폐지 선언
- "불가분의, 단일한, 민주적 공화국" 수립
- 새로운 달력 도입: "자유의 해 1년"으로 연호 변경
- 공식 국장의 변경과 공화주의 상징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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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정치 논쟁:
- 루이 16세의 재판 문제: 처벌 여부와 방식
- 전쟁 수행과 군사 전략
- 급진 개혁의 속도와 범위
- 파리 코뮌과 지방 사이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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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개혁 조치:
- 귀족 칭호와 특권의 완전한 폐지
- 이혼법 도입(1792년 9월 20일)
- 시민 등록부를 교회에서 세속 당국으로 이관
- 모든 공직에 대한 선거제 확대
프랑스 제1공화정의 수립은 혁명의 중요한 이정표였다. 비록 공화국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했지만, 군주제 자체에 대한 거부는 명확했다. 국민공회는 구성원 모두가 혁명 지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곧 심각한 파벌 대립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지롱드파와 산악파 사이의 갈등은 국왕 재판 문제와 혁명의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의견 차이를 반영했다.
혁명의 확산과 국제적 영향
유럽의 반응과 "혁명 전쟁"의 성격
프랑스 혁명은 곧 유럽적 현상이 되었으며, 전쟁은 단순한 국가 간 분쟁을 넘어 이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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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국가들의 다양한 반응:
- 영국: 초기 개혁적 지지에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이후 보수적 반대로
-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 마리 앙투아네트의 형제 레오폴트 2세의 적대적 태도
- 프로이센: 혁명의 확산에 대한 두려움과 영토적 이해관계
- 러시아, 스페인: 강한 반혁명적 입장
- 스위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일부: 혁명 사상에 우호적인 세력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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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전쟁의 이념적 성격:
- 11월 19일 국민공회 포고: "모든 민족의 자유를 위한 형제애와 지원" 선언
- 점령지에서 봉건제 폐지와 혁명 체제 도입
- "우리는 왕들에게는 전쟁을, 민중에게는 평화를" 구호
- 혁명 수출과 이상주의적 전쟁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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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몀 전투(1792년 9월 20일)의 전환점:
- 뒤무리에 장군과 켈레르만 장군의 프랑스군
- 프로이센군의 파리 진격 저지
- 불리한 상황에서의 상징적 승리
- 괴테의 유명한 언급: "오늘부터 세계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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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확장과 변화:
- 제마프 전투(11월 6일)에서 오스트리아군 격퇴
- 벨기에(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점령
- 라인란트 진출과 마인츠 등 독일 도시 점령
- 카르노의 군사 조직 개혁과 "조국 총동원"(levée en masse) 개념 발전
프랑스 혁명전쟁은 유럽 전쟁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국민 동원, 이념적 동기부여, 직업군인과 열정적인 시민군의 결합은 근대 전쟁의 새로운 양상을 예고했다. 혁명 이념의 확산은 프랑스의 군사적 성공에 기여했으나, 동시에 유럽 연합 전선의 강화를 촉진하는 양면성을 가졌다.
해외 혁명 운동에 대한 영향
프랑스 혁명은 유럽과 그 너머의 혁명 운동에 중요한 영감과 모델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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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각국의 혁명 운동:
- 벨기에: 브라방 혁명(1789-1790)의 새로운 활력
- 네덜란드: 애국자당과 바타비아 혁명(1795)
- 스위스: 제네바와 바젤의 민주 운동
- 아일랜드: 울프 톤의 통합 아일랜드인 협회(1791)
- 폴란드: 1791년 5월 3일 헌법과 코시우스코 봉기(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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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독립 운동 영향:
- 미란다(Francisco de Miranda): 베네수엘라 독립 운동가, 프랑스 혁명군에서 복무
- 볼리바르(Simón Bolívar)의 초기 사상 형성
- 아이티 혁명(1791-1804)에 대한 직접적 영향
-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 체제에 대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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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개혁 운동:
- 토마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1791-1792)
- 런던 통신 협회(London Corresponding Society)와 영국 자코뱅주의
- 정부의 탄압과 개혁 운동의 억압
-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적 반응과 대중적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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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 영향의 확산:
- 인권, 국민 주권, 공화주의 이념의 국제적 확산
- 프랑스어의 정치 어휘가 다른 언어로 번역됨
- 혁명적 상징(삼색기, 자유의 나무, 마르세예즈 등)의 보편화
- 시민권과 국민국가 개념의 국제화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우애"라는 보편적 가치를 선언했으며, 이는 국경을 넘어 강한 반향을 일으켰다. 물론 이러한 영향은 지역과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수용되고 변형되었다. 유럽의 보수 세력에게는 혁명이 위험한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이는 프랑스에 대한 적대적 연합의 형성에 기여했다. 반면 진보적 개혁가들에게 프랑스 혁명은 근본적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식민지 문제와 아이티 혁명
프랑스 혁명은 식민지, 특히 카리브해의 생도맹그(현 아이티)에서 복잡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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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식민지 정책의 모순:
- "자유, 평등"의 원칙과 노예제 기반 식민지 사이의 근본적 모순
- 식민지 백인 대지주들의 자치 요구와 인종적 계층화 유지 의도
- 흑인 노예, 물라토(자유 유색인), 백인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
- 프랑스 국내 정치 세력의 다양한 입장: 아미 데 누아르(Amis des Noirs) vs. 식민지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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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맹그 혁명의 발발:
- 1791년 8월 22일: 부크망(Boukman) 주도의 노예 봉기
-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의 부상과 지도력
- 노예제 폐지를 향한 점진적 투쟁
- 스페인과 영국의 개입 시도와 복잡한 국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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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정부의 대응:
- 1792년 4월: 입법의회, 자유 유색인에게 평등한 권리 부여
- 지롱드파의 식민지 문제 접근 한계
- 1794년 2월 4일: 국민공회, 모든 식민지에서 노예제 폐지 선언
- 소니악(Sonthonax)과 폴베렐(Polverel)의 현지 급진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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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혁명의 발전과 독립:
- 투생 루베르튀르의 자치 정부와 프랑스와의 복잡한 관계
- 나폴레옹의 식민지 회복 시도와 노예제 재도입 계획(1802)
- 데살린(Jean-Jacques Dessalines) 주도의 최종 독립 투쟁
- 1804년 1월 1일: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 아이티 독립 선언
아이티 혁명은 프랑스 혁명의 원칙이 가진 급진적 잠재력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초기 혁명가들은 식민지와 노예제 문제에 대해 모순된 입장을 취했으나, 혁명의 급진화와 함께 보다 보편적인 해방의 비전이 채택되었다. 아이티 혁명은 단순히 프랑스 혁명의 '식민지 버전'이 아니라, 자체적인 역동성과 목표를 가진 독립적인 혁명 과정이었다. 그것은 흑인 노예들이 자신의 자유와 존엄을 쟁취한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다.
루이 16세의 재판과 처형
국왕 재판의 정치적 의미
공식적으로 시민 "루이 카페"로 불리게 된 루이 16세의 재판은 혁명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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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의 법적, 정치적 쟁점:
- 국왕의 불가침성 문제: 1791년 헌법상 국왕의 면책 특권
- 재판 관할권: 국민공회의 재판권 자체에 대한 논쟁
- 증거 수집과 제시: 튈르리 궁에서 발견된 '철제 금고'(armoire de fer) 문서
- 변호의 권리와 공정한 재판 절차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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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치 세력의 입장:
- 지롱드파: 대체로 재판 찬성, 그러나 사형에 대해서는 국민투표 제안
- 산악파: 재판과 사형 강력 지지, "폭군은 이미 재판받았다"(로베스피에르)
- 평원: 분열된 입장, 다수는 결국 산악파 지지
- 마라: "머리를 자르고 나서 재판하라"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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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진행과 결과:
- 1792년 12월 11일: 재판 시작, 33개 혐의 제시
- 루이의 방어: "나는 항상 국민의 행복만을 원했다"
- 변호인 말제르브, 트롱셰, 드세즈의 법적 방어
- 1793년 1월 15-17일: 국민공회 표결, 693:0으로 유죄 판결
- 사형 여부 투표: 387:334로 사형 결정
- 집행 연기 제안 부결: 38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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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상징적 의미:
- "국민이 왕을 재판하다": 주권의 근본적 이동
- 국왕의 신체와 국가의 신체 분리: 정치적 신학의 전환
- 혁명의 불가역성 확인: "우리는 왕과 다리를 건넜다"(당통)
- 혁명 내 분열 심화의 계기: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결정적 분리
루이 16세의 재판은 단순한 법적 절차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군주제의 신성함이라는 오랜 전통과의 결정적 단절이었으며, 국민 주권의 최고 표현이었다. 동시에 혁명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럽 군주국들의 적대감을 더욱 강화했다.
처형과 국내외 반응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의 처형은 프랑스와 유럽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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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의 진행:
- 콩코르드 광장(당시 혁명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
- 오전 10시 22분 집행, 산송(Sanson) 집행관의 기록
- 루이의 마지막 말: "프랑스인들이여, 나는 무고하게 죽는다... 내 피가 프랑스에 내리지 않기를 기원한다"
- 수만 명의 시민들과 국민방위군 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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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반응:
- 파리: 혼합된 반응, 침묵과 충격, 일부 환호
- 지방: 대체로 충격과 슬픔, 특히 전통적 왕당파 지역에서
- 정치 세력: 지롱드파의 곤경 심화, 산악파의 강경 노선 정당화
- 종교 분열 심화: 헌법 선서 성직자들의 난처한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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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반응:
- 영국: 충격과 공분, 프랑스 대사 추방과 전쟁 준비
- 스페인, 네덜란드, 러시아: 혁명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 강화
- 2월 1일: 프랑스, 영국과 네덜란드에 선전포고
- 3월: 제1차 반프랑스 동맹 형성(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사르디니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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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의미:
- "폭군의 피를 통한 혁명의 세례"(마라)
- 혁명의 급진화와 비타협적 성격 강화
- 국제적 고립과 전쟁 확대의 결정적 계기
- 향후 왕당파 운동에 순교자 제공
루이 16세의 처형은 예외적 조치로서의 대혁명에서 새로운 정치적 패러다임의 확립으로 혁명의 성격을 바꾸었다. 이는 내부적으로는 "혁명이냐 반혁명이냐"의 양자택일적 정치 분위기를 강화했고, 외부적으로는 전유럽적 전쟁의 불가피성을 확인했다. 실용적 관점에서 이 결정은 혁명가들에게 후퇴의 다리를 불태우는 행위였으며, 혁명의 성공과 생존이 유일한 선택지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왕실의 운명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나머지 왕실 가족들의 운명은 혁명의 급진화를 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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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투옥과 재판:
- 탕플 감옥에서의 엄격한 감시
- 아들(루이 17세)과의 분리(1793년 7월)
-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 감옥으로 이송
- 10월 14-16일 혁명재판소에서의 재판
- 반역, 방탕, 근친상간 등 혐의(아들에 대한 근친상간 혐의는 특히 모욕적)
- 푸키에-텡빌(Fouquier-Tinville)의 격렬한 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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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 처형:
- 36세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 처형
- "용기 있는 죽음"으로 평가되는 위엄 있는 태도
- "자유의 여신"(시민 앙투아네트)이라는 모욕적 호칭
- 역사적으로 논쟁적인 인물에 대한 가혹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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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왕실 가족의 운명:
- 루이 16세의 여동생 엘리자베트: 1794년 5월 처형
- 왕세자 루이 샤를(루이 17세): 탕플 감옥에서 1795년 비참하게 사망(10세)
- 마리 테레즈(왕녀): 유일한 생존자, 1795년 석방되어 오스트리아로 추방
- 루이 16세의 동생들: 프로방스 백작(후일의 루이 18세)과 아르투아 백작(후일의 샤를 10세)은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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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에 대한 문화적, 정치적 표현:
-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반왕정 선전물의 확산
- "오스트리아의 암캐"(L'Autrichienne)와 같은 모욕적 별명
- 혁명적 기억 정치의 희생자로서의 왕실
- 왕당파들에 의한 순교자 숭배와 신화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은 실질적으로 부르봉 왕조의 종말을 의미했다. 비록 공식적으로 탕플 감옥에 갇힌 어린 왕세자가 "루이 17세"로 왕당파들에게 인정받았으나, 그는 실질적인 통치 없이 비참하게 사망했다. 왕실의 처형과 왕권의 부정은 프랑스에 근본적인 정치적 공백을 남겼으며, 이는 혁명 정부가 채워야 할 과제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 선전에서 구체제의 타락과 사치의 상징으로 묘사되었으나, 후대 역사가들은 그녀에 대한 더 균형 잡힌 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1789-1792 혁명의 평가와 의의
초기 혁명의 성취와 한계
프랑스 혁명의 첫 단계(1789-1792)는 중요한 성취와 함께 근본적인 한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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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제도적 성취:
- 봉건제와 특권 체계의 법적 폐지
- 인권선언과 시민권 개념의 확립
- 1791년 헌법과 입헌군주제의 시험
- 지방 행정 체계의 합리화(데파르트망 제도)
- 사법 제도 개혁과 형법 체계 현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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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적 변화:
- 토지 소유 구조의 부분적 변화(교회 재산의 국유화와 판매)
- 길드와 내부 관세의 폐지를 통한 경제적 자유화
- 직업 선택과 경제 활동의 자유 확대
- 교육 및 문화 기관의 세속화
- 계약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관계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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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 한계:
- 왕권과 국민 주권 사이의 긴장 미해결
- 제한적 참정권과 정치적 평등 원칙의 모순
- 여성, 비재산 소유자, 노예의 배제
- 종교 문제에 대한 과도한 개입과 분열 초래
- 경제 위기와 전쟁 압력에 효과적 대응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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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과 목표의 변화:
- 초기의 계몽주의적 개혁주의에서 급진적 변혁으로
- 귀족 주도 개혁에서 부르주아지로, 다시 민중 참여로 확대
- 구체제 개선에서 완전한 체제 대체로 목표 변화
- 국민 통합의 이상에서 계급적, 이념적 분열로
1789-1792년의 혁명은 근대 국민국가와 시민사회의 기본 골격을 마련했다. 특권이 아닌 권리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질서의 비전을 제시했으며, 이는 그 자체로 역사적 돌파구였다. 그러나 이 초기 혁명은 여러 내부 모순과 현실적 도전에 직면했고, 결국 더 급진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입헌군주제라는 타협적 해결책은 국내외 압력 속에서 붕괴했으며, 이는 혁명의 제2단계인 공화정과 자코뱅 독재로의 길을 열었다.
초기 혁명가들의 이상과 현실 정치
혁명의 초기 주도 세력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려운 균형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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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적 이상:
- 이성과 자연법에 기초한 정치 체제 구상
- 국민 주권과 대의 민주주의 원칙 추구
- 시민적 자유와 재산권 보장 중시
- 권력 분립과 헌법적 제약을 통한 균형 모색
- 법 앞의 평등과 특권 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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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혁명가들의 사회적 비전:
- 신분이 아닌 재능과 미덕에 기초한 사회
- 경제적 자유주의와 시장 활성화
- 개인 재산권의 신성시와 경제적 불평등 용인
- 능력 있는 엘리트 중심의 대의 정치
- 교육과 계몽을 통한 점진적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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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정치의 도전:
- 경제 위기와 재정 문제의 지속
- 기존 엘리트(귀족, 고위 성직자)의 저항
- 파리 민중의 급진적 요구와 직접 행동
- 농촌 소요와 교회 개혁에 대한 반발
- 국제적 고립과 전쟁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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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의 충돌:
- 국민의회: 이론적 원칙과 실용적 타협 사이의 긴장
- 입법의회: 혁명 수호와 입헌 질서 유지의 모순
- 국민공회 초기: 민주적 절차와 위기 상황의 긴급성 사이 갈등
- 정치적 관용의 이상과 내부 적에 대한 공포 사이의 충돌
초기 혁명가들은 대체로 근대적 자유주의의 원칙에 충실했으나, 혁명의 동력을 유지하고 반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점차 더 급진적인 조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미라보나 라파예트 같은 온건 개혁파는 입헌군주제를 통한 안정적 개혁을 희망했으나, 국왕의 저항과 외국의 위협 앞에서 그들의 중도적 비전은 실현 가능성을 잃었다. 브리소와 롤랑 같은 지롱드파 지도자들도 중산층 중심의 공화국을 구상했으나, 전쟁과 경제 위기는 더 급진적인 솔루션을 요구했다.
프랑스 혁명의 보편성과 특수성
프랑스 혁명은 보편적 원칙의 선언과 프랑스적 특수성의 독특한 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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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원칙과 영향:
- 인권과 시민권의 보편적 선언
- 국민 주권과 입헌정부의 원칙
- 법 앞의 평등과 특권 폐지의 이념
-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적 가치의 세계적 확산
- 근대 정치 어휘와 개념의 형성(좌파/우파, 시민, 국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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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적 특수성:
- 중앙집권적 국가 전통과 행정 구조
- 갈리칸주의와 교회-국가 관계의 특수성
- 파리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성
- 프랑스 계몽사상의 특징적 영향
- 농촌 사회구조와 봉건제의 프랑스적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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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혁명사적 관점:
- 영국 명예혁명(1688)과의 차이: 더 급진적이고 이론적인 성격
- 미국 혁명과의 공통점과 차이: 기존 체제의 완전한 전복 vs. 식민지 독립
- 이후 19세기 유럽 혁명들의 원형 제공
- 1917년 러시아 혁명과의 연속성과 차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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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의의 평가:
- 마르크스주의: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프랑스 혁명
- 수정주의: 엘리트 주도 정치 변화로서의 해석
- 후기 수정주의: 담론과 문화적 변화의 중요성 강조
- 글로벌 관점: 세계사적 맥락에서의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은 보편적 원칙을 선언하면서도 깊이 프랑스적인 현상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특수한 조건(절대왕정의 위기, 사회경제적 구조, 지적 전통)에서 발생했으나, 그 영향력은 국경을 훨씬 넘어섰다. 인권선언은 보편적 언어로 작성되었으나, 그 구체적 적용은 프랑스의 특수한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혁명은 또한 프랑스 국민 정체성 형성의 결정적 계기였으며, 이후 프랑스 정치 문화의 기본 준거점이 되었다.
초기 혁명(1789-1792)은 구체제의 해체와 새로운 정치 질서의 구상이라는 중요한 과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 초기 단계는 내부 모순과 외부 압력 속에서 더 급진적인 발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1793-1794년의 자코뱅 독재와 공포정치는 초기 혁명의 한계와 도전에 대한 급진적 대응이었으며, 동시에 혁명의 원칙을 심화시키고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시도였다. 루이 16세의 처형과 공화국 선포는 이 새로운 단계의 시작을 알렸으며, 혁명은 이제 더 험난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