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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역사 기본 1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과 부르봉 왕조의 시작
17세기 말, 스페인은 유럽에서 여전히 광대한 영토를 지닌 강대국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쇠퇴의 징후가 뚜렷했다. 마지막 합스부르크 왕인 카를로스 2세의 사망은 단순한 왕의 죽음을 넘어 유럽 전체의 세력 균형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결국 12년간의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졌고, 전쟁의 결과로 스페인에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새로운 왕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카를로스 2세의 죽음과 왕위 계승 문제
카를로스 2세(1661-1700)는 심각한 유전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났다. 근친결혼을 통해 왕실의 혈통을 유지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자손으로, 그는 신체적·정신적으로 취약했다. 일찍부터 그의 건강 문제로 인해 후사가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팽배했고, 이에 따라 유럽의 여러 왕가들은 그가 죽은 후 스페인 제국을 차지하기 위한 외교적 교섭을 시작했다.
왕위 계승에 관한 주요 경쟁자는 두 집안이었다. 첫째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로, 루이 14세는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인 마리아 테레사(María Teresa)와 결혼했다. 둘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는 카를로스의 또 다른 이복 누나인 마르가리타 테레사(Margarita Teresa)와 결혼했다. 양측 모두 스페인 왕위에 대한 정당한 혈통적 권리를 주장했다.
유럽 열강들은 스페인 제국이 한 세력에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특히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중 어느 한쪽이 스페인 제국을 통째로 흡수한다면 유럽의 세력 균형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이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스페인 제국을 분할하는 여러 조약을 제안했다.
1698년 '제1차 분할 조약'에서는 바이에른 선제후의 아들인 요제프 페르디난트(Joseph Ferdinand)가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각각 일부 영토를 얻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699년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1700년 '제2차 분할 조약'에서는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후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이 스페인, 네덜란드, 식민지를 차지하고, 프랑스 왕세자가 이탈리아 영토를 얻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스페인 사람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스페인인들은 제국의 분할을 원치 않았고, 카를로스 2세 역시 자신의 영토가 분할되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카를로스 2세는 죽기 직전인 1700년 10월, 루이 14세의 손자이자 바바리아 공주(카를로스의 외할머니 안나의 후손)인 필리프 당주(Philip, Duke of Anjou)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필리프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면 프랑스 왕위를 포기해야 하며, 만약 그가 이를 거부한다면 왕위가 오스트리아 측으로 넘어가도록 했다. 스페인 제국의 통합을 유지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카를로스 2세는 1700년 11월 1일 사망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필리프 당주는 스페인의 새 왕 펠리페 5세로 선포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발발과 전개
처음에 유럽 열강들은 펠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묵인했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손자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고, 스페인 네덜란드에 프랑스군을 주둔시키며, 프랑스 상인들에게 스페인 식민지 무역의 특권을 부여하자 상황이 변했다. 이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사실상의 통합을 암시하는 것으로, 유럽의 세력 균형을 크게 위협했다.
1701년 9월,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는 '대동맹'(Grand Alliance)을 결성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을 스페인의 정당한 왕 '카를로스 3세'로 인정했다. 이렇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War of the Spanish Succession)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북이탈리아, 독일 라인강 지역, 스페인 네덜란드(현재 벨기에),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 자체가 주요 전장이 되었다. 식민지 영역에서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전쟁 초기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우세했으나, 영국의 존 처칠(말보로 공작)과 오스트리아의 유진 왕자가 이끄는 동맹군은 블렌하임(1704), 라밀리(1706), 투린(1706), 우데나르드(1708) 등 일련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스페인 본토에서는 마드리드와 카스티야 지역이 주로 펠리페 5세를 지지한 반면, 카탈루냐를 비롯한 아라곤 왕국 영토들은 대체로 오스트리아의 카를(카를로스 3세)을 지지했다. 이는 중앙집권적 카스티야에 대한 지방의 역사적 반감과 아라곤의 자치권 보전 희망이 작용한 결과였다. 1705년 카탈루냐가 동맹군에 합류하면서 스페인 내전의 양상도 띠게 되었다.
1710년 경, 전쟁의 판도가 다시 바뀌었다. 토리당이 집권한 영국은 전쟁에 회의적이 되었고, 171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사망하자 카를(카를로스 3세)이 황제(카를 6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가 통합될 가능성을 의미했고, 이는 애초에 전쟁을 시작한 목적(유럽 세력 균형 유지)에 위배되었다.
유트레흐트 조약과 전쟁의 종결
1712년부터 네덜란드 유트레흐트에서 평화회담이 시작되었다. 영국이 별도로 프랑스 및 스페인과 협상을 진행했고, 이에 오스트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은 불만을 표했지만 결국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유트레흐트 조약(Treaty of Utrecht)은 1713년 4월 체결되었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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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5세는 스페인과 식민지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와 그의 후손들은 영원히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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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 네덜란드(현 벨기에), 밀라노, 나폴리, 사르데냐 등 유럽 내 스페인 영토를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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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지브롤터, 미노르카, 뉴펀들랜드를 획득하고, 남미 노예무역에 대한 독점권(아시엔토, Asiento)을 30년간 부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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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 공국은 시칠리아 섬(후에 사르데냐와 교환)과 함께 왕국의 지위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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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스페인 네덜란드에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를 얻었다.
카탈루냐는 여전히 오스트리아 측을 지지하며 저항을 계속했지만, 동맹국들(특히 영국)의 지원이 끊기면서 결국 고립되었다. 1714년 9월 11일, 바르셀로나는 부르봉 군대에 함락되었고 이로써 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오늘날 카탈루냐의 국경일인 9월 11일(라 디아다, La Diada)은 이 사건을 기념한다.
유트레흐트 조약은 유럽의 국제 질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스페인 제국은 유럽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었지만, 아메리카와 필리핀의 식민지는 유지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개별 왕국으로 남게 되었다. 영국은 해양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했고, 오스트리아는 중부유럽과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펠리페 5세와 부르봉 개혁의 시작
펠리페 5세(1700-1746)는 전쟁 승리 후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정책은 프랑스 모델을 따른 중앙집권화와 근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 번째 주요 변화는 '누에바 플란타 칙령'(Decretos de Nueva Planta, 1707-1716)의 공포였다. 이 칙령은 아라곤 왕국의 특별 지위와 전통적 자치권(푸에로스, fueros)을 폐지하고, 카스티야의 법과 행정 제도를 전국에 통일적으로 적용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반란을 일으켰던 카탈루냐, 발렌시아, 아라곤은 자치권의 대부분을 잃었다. 반면 내전 동안 충성을 유지한 바스크 지방과 나바라는 일부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행정 개혁도 이루어졌다. 합스부르크 시대의 복잡한 위원회(consejos) 시스템 대신, 프랑스식 각료 체제(secretarios de estado)가 도입되었다. 중앙정부의 권한이 강화되고, 지방 행정에는 코레히도르(corregidor)나 인텐단테(intendente) 같은 왕의 직접 대리인들이 파견되었다.
경제 정책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중상주의 원칙에 따라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식민지 무역을 독점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세비야의 '인디아스 교역원'(Casa de Contratación)이 카디스로 이전되었고, 식민지와의 교역을 독점하던 상선단 시스템이 점차 자유화되기 시작했다.
문화적으로는 프랑스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궁정 예절, 패션, 문학, 예술의 영역에서 프랑스 양식이 스페인에 도입되었다. 1713년에는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Real Academia Española)가 설립되어 스페인어 표준화와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부르봉 개혁의 의미와 영향
부르봉 왕조의 등장과 그들이 추진한 개혁은 스페인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는 단순한 왕조 교체를 넘어 스페인의 국가 구조와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첫째, 스페인은 더 이상 '여러 왕국의 연합체'가 아닌 중앙집권적 국민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각 지역의 법, 제도, 관습이 점차 통일되었고, 카스티야 스페인어가 공식 언어로 자리잡았다. 이는 근대 스페인의 기초를 형성했지만, 동시에 지역 정체성과 중앙정부 사이의 갈등이라는 지속적인 문제를 낳기도 했다.
둘째, 스페인은 유럽 내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국력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네덜란드, 이탈리아 방어에 쏟아붓던 자원을 국내 발전과 아메리카 식민지 강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에 스페인은 '부르봉 르네상스'라 불리는 부분적 회복을 경험했다.
셋째, 국제 관계에서 스페인은 프랑스와의 '가족 협약'(Pactos de Familia)을 통해 긴밀한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영국과의 식민지 및 해양 패권 경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넷째, 부르봉 개혁은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점진적으로 근대화와 합리화를 추구했다. 이는 교육, 과학, 산업 분야의 발전으로 이어졌지만, 동시에 가톨릭 교회와 전통 세력의 저항도 불러일으켰다.
다섯째, 카탈루냐를 비롯한 아라곤 왕국 영토들의 자치권 박탈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지역주의와 독립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특히 카탈루냐는 자신들의 자치권이 부당하게 침해받았다는 역사적 기억을 지역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존하고 있다.
결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부르봉 왕조의 수립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의 세력 균형이 재편되었고, 영국이 새로운 해양 강국으로 부상했다. 스페인은 유럽 내 영토를 상실했지만, 국내 통합과 중앙집권화를 통해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다.
펠리페 5세가 시작한 부르봉 개혁은 그의 후계자들(특히 카를로스 3세)에 의해 계속 발전되었다. 18세기 동안 스페인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부분적 회복을 이루었고, 식민지 제국을 재정비했다. 그러나 개혁의 과정에서 드러난 전통과 혁신, 중앙과 지방, 교회와 세속 권력 사이의 갈등은 현대 스페인 사회의 분열과 다양성의 뿌리가 되었다.
13회차에서 살펴본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부르봉 왕조의 시작은 쇠퇴하던 스페인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는 결정적 시기였다. 합스부르크의 유산 위에 프랑스식 통치 모델을 결합함으로써, 스페인은 근대 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이는 오늘날 스페인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